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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법
How to make my first documentary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법
심심하게만 여겨지는 여름이었다. 가끔 들어오던 일마저 뚝 끊겼을 때였다. 통장 잔고가 빠르게 줄어드는 대신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이 생겼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미뤄가며 노는 것이 재미있는 법이었다. 삶이 그냥 놀기만 하라고 판을 깔아주니 되레 불안해졌다. 불안함은 무기력함이 좋아하는 꼬리다. 잡히면 우울증이 된다. 꼬리잡기가 시작되기 전에 얼른 옷장 구석에 넣어둔 비디오카메라를 꺼냈다. 영화과를 졸업했으니 뭐라도 찍어보자며 구입했던, 늘 그렇듯 나의 게으름만 다시 증명하고 처박아 버린 그 카메라를. 렌즈에 쌓여 있는 먼지를 털었다. 배터리를 충전했다. 마이크를 달았다. 카메라 롤링. 사운드 체크. 모든 것이 작동했다. 이제, 밖으로 나가자.
Pre-Production
촬영 전 모든 준비를 하는 단계
남편은 내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무얼 찍었는지 궁금해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났느냐고 물어보았다. 답하기 어려웠다. 메모리 카드는 길고양이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 내게 방썽이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달라고 했다. 나도 즐거울 거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뷰티풀’하고 ‘어메이징’하기 때문이란다. “너에게 진짜 보라보라 사람들을 보여줄게.” 방썽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름밤, 바다와 달을 뒤로하고 동네 사람들이 모래 위에 섰다. 반쯤 벗고 다니는 앞집 아이들, 생선과 코코넛을 길에 내놓고 파는 옆집 언니, 흰머리가 예쁜 집주인 아주머니까지. 모두 맨발이었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렸다. 양철지붕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비. 돌아보니 북소리였다.
사람들은 모래를 밟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양손을 하늘에 머리에 입술에 천천히 가져가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발이 모래에 빠질 듯 빠지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둔 카메라를 쓰고 싶어서 손이 저릿저릿했다.
방썽은 동네 사람들이 춤을 추는 내내 가장 앞에 서서 소리를 지르던 사람에게 나를 데려갔다. 책임자였다. 그녀가 모든 안무를 구성하고, 가르친다고 했다. 큰 키, 다부진 어깨, 곧게 세워진 몸에서 팔이 뻗어 나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긴장됐다. 이미 마음으로는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시작했다. 불어도 잘 못하는 사람한테 촬영을 부탁하면 어쩌냐고, 현지인이 아니니 안 된다고 할까 봐 불안했다. 그녀는 내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 와줘서 고마워.” 나야말로 영광이라고 대답했다. “축제까지 남은 두 달 동안 잘 부탁해.” 두… 두 달이나? 다른 의미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나. 그녀는 이미 떠나갔다. 방썽만이 웃고 있었다
Production
촬영 단계
처음엔 다들 부끄러움이 많았다. 카메라가 낯설고, 내가 낯설어 그랬을 것이다. 춤을 출 때는 눈도 깜빡이지 않다가, 음악이 멈추고 내가 다가가면 얼굴을 붉히며 도망가기 바빴다. 아이도 어른도 그랬다. 멀찌감치 떨어져서야 나를 보고 수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낯설었다. 사람도, 언어도 무엇보다 카메라가 낯설었다. 영화과를 졸업한 건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노출을 맞추느라 버벅대고, 액정에 생긴 선을 없애느라 또 버벅댔다. 그런 우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매일 두 달을 만났다. 그렇다고 관계가 갑자기 가까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볼이 빨개지는 시간이, 도망가기까지의 시간이 조금씩 더디어졌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결과물을 기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거 기록으로만 남기지 말고,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보라고 했다.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나를 만나면 물어왔다. “작업은 잘 돼가?”, “멋진 다큐멘터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타히티에 유명한 영화제가 있는데.”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들이 언제부턴가 사뭇 진지해졌다. 누군가는 나를 감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뇨, 아뇨. 무슨 감독이에요.”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 갈 곳이 있다는 것에, 아주 작지만 분명한 소속감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카메라에 붙은 모래를 털고, 마이크나 삼각대를 다 분리해서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조차 어떤 위안을 주었다. 어쩌면 진짜 끝내주는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편집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계속 미뤘다. 촬영만 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미루고 미루던 편집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돼서야 컴퓨터를 켰다. 편집 툴을 돌리고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정말 못 찍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여전히 뷰티풀하고 어메이징한데 재미가 없었다. 이건 다큐멘터리는 고사하고 기록용이 되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가만, 이건 영화과를 졸업하기도 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나 편집을 미뤘던 걸까. 촬영만 하는 동안에는, 완성되기 전까지는 어딘가 특별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서둘러 컴퓨터를 껐다. 밤이 깊었고 혼자였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Post-Production
촬영 후 최종 완성 단계
아무것도 없었던 공터가 무대로 바뀌어 있었다. 춤을 추는 공간에는 모래가 깔렸고, 기다랗게 이어 달린 작은 전구들이 밤을 밝혔다. 야외공연이었다. 지정석을 미리 사두려는 나를 방썽이 말렸다. 동네 사람들이 앉는 곳이 따로 있단다. 여행객들로 가득 찬 관객석을 지나가니, 동네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누워서 자는 갓난아기도 있고, 솜사탕을 나눠 먹는 아이들도 있고, 코코넛에 빨대를 꼽고 주욱 들이키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다들 어서 와서 앉으라고 했다. 공연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나오고, 곧 무대와 객석 전체의 불이 꺼졌다. 그때, 카메라를 켰다.
아이가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폴리네시아어로 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발음들이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딱 세 단어만 알아들었다. “요라나, 마루루, 나나(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도 좋았다.
아이가 뒤로 돌아서 들어가자, 요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두 달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한껏 멋을 낸 동네 사람들이 무대로 뛰어나왔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얼굴들을 보니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다 떠올랐다. 춤이 시작되었다. 손바닥을 하늘로 올리고 어깨를 앞뒤로 흔들자 바닷속을 헤엄치는 상어가, 허리와 골반을 빠르게 흔들며 원을 만들면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더 이상 동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관객들은 환호했다. 박수와 휘파람을 보냈다. 누군가는 작은 불꽃에 불을 붙여 흔들었고, 누군가는 소리를 질렀다. “아, 너무 행복해!” 하고. 그 목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미소가 지어졌다. 행복을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했던 적이 언제였지. 가물거렸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행복하다니 그리 나쁘지 않은 밤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모든 재능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카메라를 들어보려고 한다. 매일매일 무언가를 찍을 계획이다. 그렇다고 없던 재능이 생겨나지는 않겠지만, 재능 없음이 재미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역시 찍는 동안에는 즐거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성실하게 카메라를 든다면 어쩌면 그렇게 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줄 무언가를 담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 김연수가 그랬다. ‘매일 글을 쓴다.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작가가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뭐, 아님 말고.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글·사진 김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