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Find Me True Self in the Family

두 발을 딛고 ‘나’로서 살아가는 가족, 복태와 한군

성미산 마을의 한 어린이집 앞이다. 엄마 복태는 안으로 들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나왔고 아빠 한군은 방과 후 마을에서 놀던 첫째와 같이 왔다. 이제 다 함께 ‘바로 앞’인 집으로 걸어가면 된다 싶었는데, 세 아이와 함께면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동네 뒷산을 가로질러 가고 싶은 아이와, 아빠에게 안겨 가고 싶은 아이, 몸을 굴리고 싶은 아이가 있으니까. 결국 우리는 뒷산을 조금 오르다 도로 옆길을 따라 걷기로 한다. 한 아이는 낙엽을 줍고, 다른 아이는 아빠에게 매달리고 나머지 한 명은 슬리퍼를 신은 채 구르면서. 처음 만났지만 오래 안 듯한 풍경을 봤고 익숙한 이야기를 나눴다.

INTERVIEW

복태와 한군 | 삶음악가

가족의 공간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에 산 지 얼마나 되었어요?

복태 결혼하고 망원동에 자리를 잡았어요. 아이를 낳고 혼자 키우는 게 힘들어서 친정 가까이에 살다 성산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성미산 마을은 집이 잘 안 나와 이사가 쉽지 않은데 지인 덕분에 좋은 집에 들어왔어요.

 

일상의 장소를 둘러보니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주는 노래, ‘아이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떠올라요. 노래를 지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복태 ‘마음’은 2012년에 만든 노래고, ‘아이를 바라보았다’는 2014년에 만든 노래예요. ‘마음’은 첫째를 낳고 나서 만든 곡인데, 아마 많은 엄마들이 드는 마음일 거예요. 아이도 남편도 있는데 밀려오는 고독감과 외로움, 슬픔의 마음이요. 그즈음 길에서 청소하시는 환경미화원을 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저분에게도 뜨거운 한때가 있었고 뜨거운 사랑이 있었겠지? 다들 아무렇지 않게 살고들 있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할까?’ 저를 위로하고 싶어서 “슬픔이 찾아와도 기쁨이 찾아와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는 마음”이라는 가사를 썼어요.

‘아이를 바라보았다’는 둘째를 낳고 만들었어요. 한창 예민해져서 한군이랑 많이 싸우던 시절이었어요. 한군은 싸우면 자는데, 저는 못 자거든요. 밤에 펑펑 울다가 아이와 남편이 잠든 방에 들어갔는데 너무 고요한 거예요. 저만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평온하지? 나는 지옥에 있다가 왔는데?’ 고요함 속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어요. 그 마음을 담았어요.

한군 아이들에게 하는 선물이어서, ‘마음’은 첫째 지음이 생일, ‘아이를 바라보았다’는 둘째 이음이 생일에 발표했어요. 저희들만의 암묵적인 시그니처였죠.

 

‘흙의 왈츠’의 노랫말은 친환경,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보여줘요. 

복태 연애 시절 귀촌했을 때 만든 노래예요. 보름은 서울, 보름은 시골에 살았어요. 누가 준 기와집이었어요. 아궁이를 때야 하고 페인트 통에다 변기 커버 올려놓은 게 화장실이었어요. 상수도 시설이 없어서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고 냉장고도 없었죠. 근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텃밭 가꾸고 산책하고 밥해 먹고, 사실 그것밖에 없었죠. 밤 9시만 되면 너무 무서워서 밖에도 못 나가니까 노래 만들고 일찍 자고. 그런 생활 속에서 만든 노래예요.

 

자연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은 어떻게 쌓아왔나요?

복태 저는 착한 딸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부모님이 키워만 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 낭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생이 냉장고 문을 오래 열고 있거나, 물 틀어놓고 양치하면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했어요. 스물다섯 살 때 희망제작소의 지원을 받아 ‘그린 제너레이션’이라는 환경운동을 하는 세대를 만나러 뉴욕에 간 적이 있어요. 보통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하루라도 지나면 버리잖아요. 그런 것들을 주워서 나누고 파티를 열고 음식을 해 먹고 버려진 옷도 주워서 나누더라고요. 그 프리건들을 만나 많은 자극을 받았고 미국의 이면도 봤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테이크아웃 컵이 없을 때거든요. 미국의 스타벅스 매장에 넘쳐나는 일회용 컵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맥도날드도 마찬가지였고요. 한국에 와서 자연을 보호하며 사는 방법을 찾아다녔어요. 친환경 디자인과 제품을 만드는 국민대학교 친구들과도 어울렸고요. 그러다 스물여덟 살에 한군을 만나면서 더 진전된 거 같아요.

 

어떻게요?

복태 한군을 처음 봤을 때 공사화를 신고 있었는데, 뒤축이 빠진 부분을 청테이프로 감싸고 있는 거예요. 끊어진 가방끈을 청테이프로 감아놓고요. ‘이 사람 뭐지?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거지같이 하고 다니지(웃음)?’ 심지어 가방도 옷도 다 주운 거래요. 그때 한군이 저한테 그랬어요. “네 발은 두 갠데, 신발이 왜 많아야 해? 네가 신을 수 있는 신발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가 닳아야 새로운 하나를 사는 게 당연한 거래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저는 환경을 사랑하지만 에코백과 신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거든요. 한군과 살면서 자연과 미니멀, 소유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어요. 아이를 키우니까 기저귀가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일을 쉬고 강사로만 근근이 돈을 버는 상황이었지만 생분해되는 기저귀를 써야 했어요. 죄의식이 너무 컸어요. 그런 의미에서 분유 대신 모유 수유를 열심히 했고요.

 

아니, 어떻게 스무살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한군 부모님이 시골 목회를 하셨어요. 전라북도 마을의 쓰러져가는 교회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공동체를 이루셨어요. 나쁜 일 생기면 도와주고 같이 모여서 밥해 먹는, 동네 홍반장인 거죠. 어머니가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했어요. 부모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모습을 곁에서 계속 지켜봤어요. 자연 속에서 놀면서요. 맨발로 마음껏 뛰어다니고, 비 오는 날에는 홀딱 젖게 놀고, 눈 오는 날에는 눈밭에 굴렀어요. 사철 자연이 주는 느낌이 있잖아요. 춥고 덥고, 건조하고 습하고, 적당한 거에 대한 감각을 치열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너무 자유로웠어요.

엄청 시골이니까 티브이도 안 나오거나 나와 봤자 공중파만 나왔어요. 학창 시절 또래 친구들이 한 반에 세 명이었고, 마을에 버스도 한 대 다녔어요. 한 대 놓치면 세 시간 걸어가야 했죠. 산길을 걸어 다니면서 음악을 듣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어요. 인간에게는 마음속 무언가를 마음껏 분출하고 싶은 총량이 있잖아요. 남성이 가진 폭력성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 같은 것도 있고요. 그 시절 락 음악을 따라 부르고 원 없이 소리지르면서 자연 속에 다 쏟아낸 거 같아요. 자연이 주는 흐트러지지 않은 조화를 피부로 느끼면서요.

복태가 늘 하는 말인데 우리는 지구의 일부로 만들어진 존재예요. 지구와 나를 따로 분리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내가 지구니까 내가 잘 살고 내 친구들과 내 아이들이 잘 살려면 당연히 환경을 지켜야 하는 거죠. 지금은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매일의 삶이 있기에 환경운동가처럼 나설 순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환경을 보호하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대수롭지 않게 늘 하듯이요. 빛 바랜 라면 봉지가 숲속에 떨어져 있으면 뭔가 이상하잖아요. ‘이건 뭐지?’‘부자연스러운 느낌은 뭐지?’ 이런 감각이 늘 있어요.

갑자기 궁금해요. 그때 꿈은 뭐였어요? 꿈대로 살고 있어요?

한군 하나는 완벽하게 이루었어요. 연상의 누님에게 헌신봉사하며 투철하게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이요(웃음). 좀 잡혀 살고 싶었어요. 저는 너무 방임, 방종된 상태로 자랐어요. 부모님이 늘 바쁘셨고 저에게 어떤 강요와 제한도 안 하셨어요. 그게 서운하고 아쉬웠어요. 저를 좀 옥죄고 터프하게 다뤄주기를 바랐거든요. 사람에게 그런 구속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적당히 꽉 조여졌을 때 아이들이 ‘아, 내가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거고, 이걸 선택해야지.’ 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죠. 저는 자연에 대한 감각과 감수성과 조화로움은 충분히 느꼈지만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술, 사회성을 익히지 못했어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화해하는지, 어떻게 지지고 볶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언어 능력이 떨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상형이 생겼어요.

복태 꿈을 이루셨네요(웃음).

한군 그리고 음악을 너무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 하고 악기 연주하면서 음악을 많이 듣고 나누며 살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 락스타가 되어야겠단 꿈은 없었어요. 음악을 좋아하니까 그냥 이걸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해야겠노라, 생각했죠. 지금은 육아계의 락스타가 되었네요(웃음). 이번 생은 이런 운명인가 봐요.


복태 씨도 시골에서 자라셨나요?

복태 아니요. 저는 서울에서 자랐고 한군과 정반대의 삶이었어요. 저 역시 방임이긴 했지만, 많은 제약 속의 방임이었어요. 성당을 열심히 나가야 했고 공부를 잘해야 했고 착한 딸이어야 했어요. 장녀로서 오빠와 동생의 밥을 챙기고 살림을 했어요. 오빠랑 동생이 들어야 할 잔소리도 제가 들었고요. 뭘 하면 칭찬받을 수 있을까 발악하며 살았어요. 그런데도 칭찬을 받을 수 없었죠.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러다 한예종에 입학하면서 자기가 불편한 걸 바로바로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이 중요한 친구들을 마주한 거예요. 거기서 저는 너무나 평범하고 자아가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씩 찾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를 챙기는 삶이 몸에 배인 저에게 한군이 묻더군요. 네가 좋아하는 건 뭐냐고요. 저를 있는 그대로 대해주고 사랑을 줬어요. 뭘 해도 예쁘다고 해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의심 반 감동 반으로 만났어요. 한번은 한군을 30분이나 기다리게 했는데도 “나는 기다리는 동안 너무 행복했어.” 그러더라고요. “아니 그게 말이 돼?” 하면서 신기했어요. 서로 너무 달라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많이 싸웠죠.


주로 어떤 걸로 싸웠어요?

복태 보통의 성인은 어느 정도 사회성이 있잖아요. 근데 한군은 공연에 가서도 말 안 걸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요. 저만 애쓰는 거예요. “넌 왜 이렇게 사회성이 없니? 너도 싫은 것 좀 해. 왜 나만 싫은 거 해?” 친구들 모임에 가도 싫으면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할 말 없어도 얘기 좀 꺼내 봐. 누가 말하면 좀 웃고.” 뭐 이런 거였죠.

한군 저는 그런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대체 왜 노력을 해야 해? 애쓰고 싶지 않은데(웃음). 당시 저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내 것을 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인 것들에 처음 부딪힌 거예요. 낯선 사람 만나서 나를 어필해 내 능력을 보여주고 증명해내고 뭘 얻어야 하는 그런 과정이 너무 막막했어요. 서울에 올라와서 얼마간 대중교통도 못 타고 맥도날드, 커피 주문도 못 했어요.

복태 썸 탈 때 카페를 갔는데, 주문하러 안 가더라고요.

한군 주문을 어떻게 하는 거지? 진동벨, 이건 뭐지? 아, 정말 두려웠어요.


사회성이 부족한 게, 육아를 함께할 남편으로는 꽤 괜찮을 거 같은데요.

복태 맞아요. 아기를 잘 보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사회성이 좀 떨어져요(웃음).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건 어린아이랑 주파수가 잘 맞는다는 거잖아요. 저희는 육아를 같이 시작했어요. 저는 ‘함께 육아’라고 말하는데요. ‘엄마가 열 달을 몸에 품었고 한 번에 힘든 순간을 경험했으니 그다음부터는 아빠 몫이다. 우리는 엄마, 아빠가 처음이니까 같은 선상에 있는 거다.’ 이런 대화를 했어요. 같이 일을 하니까 더 가능했던 거 같아요. 모유는 제가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재우는 건 아빠가 하고요. 아이가 아주 어릴 땐 한군이 돈 벌고 제가 아이를 본 적도 있는데, 낮에 혼자 아이를 보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일을 하기로 하고 9개월부터 수업에 아이를 데리고 갔어요. 제가 일할 땐 한군이 아이를 보고, 같이 일할 땐 친정에 부탁했고요. 손해 본다는 느낌 없이 육아를 하니까 아이 셋까지 온 거 같아요.

한군 제가 아이를 더 낳고 싶어 했어요. 보통의 한국 남자들이 20대에 커리어를 쌓고 30대 중반에 아이를 낳아요.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자신의 커리어는 계속 이어가야 하잖아요. 고민 속에서 ‘엄마는 아이를 낳고, 모유도 먹여야 하잖아. 그런데 아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거 같아.’라면서 발을 뒤로 쓱 빼고 원래 있던 곳, 익숙한 회사로 돌아가요. 그러면서 아내는 고립되고요. 저도 20대에 커리어를 쌓다가 30대에 아이를 낳으면 그랬을지 모르겠어요. 감사하게 20대에 커리어를 쌓기보다 나중에 해야 하는 것들을 미리 한 거잖아요. 인생의 큰 과제 결혼, 출산 같은 거요. 스물두 살에 아빠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체력도 넘쳤었고.

손해 보는 느낌 없이 함께하기, 육아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에요.

복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시작점이 달라서 그런 듯해요. 각자의 사정이 있잖아요. 한군은 사회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채로 결혼했기 때문에 이걸 당연하게 여겼죠. 대신 사회를 더 경험해본 제가 아빠 역할을 해야 했어요. 돈 버는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스텝을 밟아 나가느냐에 대한 것들이요. 결혼하자마자 신혼과 함께 투철한 육아 전쟁에 뛰어들었어요. 사이가 좋고 가치관이 비슷한 거와는 별개로 저는 되게 예민한 사람인데 한군은 무던한 성격이에요. 거기에서 마찰도 많았어요. 무던한 사람은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도 되지만 예민한 사람은 견딜 수 없어요.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그런 사소한 일에 충돌이 있으니까 더 많이 싸웠어요.


굳이 따지자면 저도 예민한 쪽 같아요(웃음). 그래서 무덤덤한 편에 선 사람의 심리가 궁금해요.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저런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어떻게 이해하려고 했어요?

한군 이건 이해의 영역이 아니에요. 할 수 없어요(웃음). 제가 감각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복태가 느끼는 감각의 세계를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요. 다름을 인정해야 했어요. 속으로는 천불이 끓지만 ‘저렇게 생겨먹었구나, 저렇게 태어났으니까 내가 참자.’라고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참아서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한군 그렇죠.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무조건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못 견디겠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꿍하는 시기도 있었고 분노에 차서 어쩔 줄 모르는 시기도 있었어요. 결혼 3~4년 차에 제일 갈등이 심했는데 너무 화가 나서 뭘 집어 던지기도 하고 육탄전을 벌인 적도 있어요. 결혼 9년 차가 되어서야 제 의견을 명확하게 얘기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제 의견을 설명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있었어요.

복태 제 불만은 이런 거였어요. “왜 나를 사랑한다면서 부인이 싫어하는 걸 못 맞추지? 왜 내 부탁들을 다 까먹지? 그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때 한군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너는 나한테 지적밖에 하질 않아.”


아, 뜨끔해요.

한군 (웃음). “나는 너랑 감정의 교류를 하고 싶은데 너는 지적부터 해버리니까 감정적 교류가 일어날 수 없어. 너랑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라고 했죠.

복태 너무 충격이었어요. 근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이거 치웠어? 이거 왜 안 갖다 놔?” 눈에 거슬리는 것만 얘기하고 있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지적하기 전에 감정을 나누는 말을 먼저 하려고 노력했어요. “오늘 뭐 했어? 뭐 먹고 싶어? 우리 이거 보러 갈까?” 같은 거요. 그랬더니 한군의 마음이 바뀌더라고요.

한군 ‘어? 이 사람이 왜 지적을 안 하지? 왜 저런 말을 하지?’

복태 상담 선생님이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싫으면 남편에게 강요하지 말고 직접 하라고요. ‘저 사람은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야. 내가 치우자.’ 생각하려고 해요. 그래도 싫으면 감정을 넣지 말고 직접 얘기해요. “네가 먹던 샌드위치 껍데기는 네가 버렸으면 좋겠어.” 이건 시비가 아니잖아요. 사실 “너는 왜 내 모든 말에 지적과 시비야?” 그 말도 저에겐 상처거든요. 제가 하는 모든 말이 그렇게 여겨진다는 거니까요. 어쨌든 여기까지 오는 데 9년이 걸렸어요.


상담을 받았어요?

복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예술인들에게 무료 심리상담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좋은 기회라 재작년에 제가 먼저 상담을 받고 이어 한군도 상담을 받았어요. 서로 대화가 안 될 땐 제3자가 끼어드는 게 도움이 되거든요.

한군 한국에서는 정신 상담을 너무 유별나게 생각해요. 음지에 있는 걸 양지로 끌어올리는 일인데, 이게 안 되니까 파멸하죠. 너무 필요한 일이에요. 아이들한테도 영향이 가고요. 저는 가족이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저도 한번 받아보고 싶더라고요.

복태 저희는 작년부터 너무 많이 좋아졌어요. 상담을 받다 보니까 ‘맞아. 저 사람이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요구한 걸 다 기억할 수 있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서로 인정하는 때가 오더라고요. ‘아, 너는 이게 힘들고 나는 이게 힘들구나, 하면서 계속 조율하는 거예요. 못 참는 날도 있어서 “내가 계속 참는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했더니 “아, 미안. 내가 다른 데 몰입하고 있어서 너를 배려하지 않았던 거 같아.” 혹은 “노력하고 있는 게 이 정도야.”라고 말하죠. 지금도 어려워서 꾹 참고 해요. 그래도 서로 노력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한군 너무너무 피눈물 피고름 흘리며 지나왔어요. 복태는 자기 기준이 분명해서 엄청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요. 사실 어제도 한판 했어요(웃음). 제가 복태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책을 꽂았거든요.

복태 저는 책이 결대로 꽂혀있지 않는 걸 싫어해요. 세로로 세워진 책 위에 책을 가로로 올려놓는 걸 견딜 수가 없어요. 사실 걸음걸음이 다 거슬려요(웃음).

한군 장난 아니죠(웃음)? 하지만 밸런스를 찾아가고 있다는 게 너무 희망적이에요. 작년부터 내면의 힘이 더 생긴 거 같아요.

아이들 앞에서 싸운 적도 있겠네요.

복태 싸우죠. 저는 아이들에게 헛된 이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요. 엄마, 아빠는 싸우지 않고 울지 않고, 어른들은 화내지 않는 사람, 완벽한 사람이라는 거요. 아이들이 이상적인 어른들만 생각하고 자랐는데 사회에 나갔더니 어른들이 막 화내고 싸우는 걸 본다면 혼란스러울 거 같아요. 저희는 싸우면 애들한테 얘기해요. “엄마, 아빠가 지금 화가 났는데, 너희 때문은 아니야. 너희도 싸우지. 그거랑 같은 거야. 이걸 싸워야 우린 풀 수 있어. 너네는 안심하고 놀고 있어.” 그러면서 대치하고 싸워요. 화해하면 “엄마, 아빠 화해했어. 보이지?” 부들부들 떨면서 손잡고(웃음).

한군 ‘어른도 완벽하지 않다.’ 저는 그걸 되게 늦게 알았어요. 20대 초반까지도 어른은 완벽한 줄 알았어요. 근데 우리보다 못한 어른들이 많다는 걸 알고서 바라본 세상은 정말 달랐어요. 자존감도 높아지고, 어른이라고 다 옳은 것도 아니고, 나도 그런 어른들에 비하면 잘못 살고 있지 않구나. 아이들도 이런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복태 맞아요. 그게 포인트예요. 저는 속상하면 울어요. 엄마도 아빠도 울 수 있으니까요. 가끔은 아이들이 엄마가 이렇게 슬퍼하는데 아빠는 왜 위로를 안 해주냐고, “아빠 나빠!” 하거든요.

한군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만 지금은 눈물을 닦아줄 수 없어.”

복태 그러면 아들인 이음이가 가제 수건 가져와서 “엄마 내가 있어.” 하면서 위로해줘요.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과정을 배운다고 생각해요. 자기들도 싸우니까 어른들이 싸우는 것도 당연하다 느끼고요. 가끔 아이들은 목소리 톤만 달라져도 싸운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럼 알려줘요. “이건 싸우는 게 아니야. 화난 걸 말하는 거야. 화난 건 얘기해야 하는 거야.” 제가 화났을 땐 이런 말도 해요. “엄마가 지금 화가 나서, 같이 놀다가는 너희들에게도 화를 낼 거 같아. 엄마를 내버려뒀으면 좋겠어.”


화해하는 과정을 배우는 건 좋지만, 아이들이 화내는 부모의 모습을 학습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진 않나요?

한군 그렇긴 하죠. 문득문득 따라 해요. 이음이가 셋째한테 잔소리하고 큰 소리 낼 때도 있어요.

복태 수위가 높아지면 조절을 해요. 너무 심하게 보여주진 않으려고요. 다행히 아이들이 친구들한테는 잘 화내진 않고요, 저희 앞에서 다 분출해요. 그런데 아이들을 보면 이유 없이 화내는 경우는 많지 않은 거 같아요. 다섯 살이 내는 짜증이 있고, 여섯 살의 화가 있어요. 그걸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 고비를 넘기고 여섯 살이 되고, 일곱 살이 돼요. 다섯 살 때 짜증을 못 내게 하면 그 화를 가지고 여섯 살, 일곱 살이 되잖아요. 일곱 살에 다섯 살의 짜증을 부려요. 화내는 건 당연하다고, 빨리 화를 내보내면 된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다 받아주기 힘들 때도 있잖아요.

복태 그땐 로테이션 해야죠(웃음). 첫째와 둘째가 정말 많이 싸우는데요, 그럴 땐 정말 화가 나요. 다 저희 자식이고 사정이 있는데 수틀린 감정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싸움의 화두는 아직도 너무 어려워요. 더 크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싶어요. 분명히 풀리지 않는 욕구가 있으니까 싸우는 거라서요. 둘이 멀쩡할 때 사이 좋게 만들려고 해요. 그럼 싸울 때의 폭들이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요? 서로를 이해하는 층이 생기니까요. 둘이 싸웠는데, 둘째가 더 수위가 높은 거 같으면 저랑 둘이서만 남산타워를 가요. 첫째가 더 스트레스 받는 거 같으면 첫째를 데리고 평소에 하고 싶어 하던 네일 케어를 하는 식이죠.

한군 화해시킬 때 중요한 건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려면 이 상황들을 첨예하게 생각해야 해요. 매 순간, 아이 개별의 특성과 욕구를 알아야 조절되는 거 같아요. 왜 이렇게 짜증 내는지, 어제 뭐가 쌓여 있었다든가, 아까 뭐가 안 풀렸다든가, 지금 이걸 풀어줘야 하는 때인지 말이죠.

스스로 견딜 수 있는

힘을 가르치기

아이들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어요.

복태 정릉에 살았을 때 일반 어린이집에 보냈어요.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너무 갑갑했어요. 한정된 공간에서 교구들만 가지고 놀아야 하니까 안쓰러웠어요. 성산동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많은데 국공립 어린이집은 정말 들어가기가 힘들거든요. 예술인으로 차상위 신청이 가능해서, 첫째가 네 살일 때 기적적으로 들어갔어요. 기본적으로 어떤 분위기인 줄은 알았지만, 자세한 건 들어가서 더 많이 배웠어요.

어린이집은 선생님을 애칭으로 부르고 서로 반말을 사용해요. 아이들이 존어부터 배우면 말이 꼬여서 그렇대요. 학부모와도 성별, 나이 상관없이 서로 애칭을 불러요. 하지만 그 안에 존중이 있어요. 두레생협 재료로 먹거리를 만들어 먹고, 날씨가 나쁘지 않으면 오전과 오후에 나들이가 있어 늘 뛸 수 있어요. 또 부모들이 적당히 만나 거리를 지키면서 어린이집을 위해 애쓰고 있죠. 스승의 날, 다 같이 모여 선생님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행사를 하고 감사를 전해요. 아이를 다 같이 키워내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어요.

아이들 등하원 시간에도 교실까지 들어가서 아이들을 배웅해요. 들어가서도 내 아이만 챙기는 게 아니고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요. “하루야 안녕? 파마했네? 복태 오늘 모자 썼네? 한군 팔에 왜 그림 그렸어!” 다른 아이도 챙겨야 우리 애가 잘 자라는구나를 배운 거예요. 들어가기 어려운 어린이집인데 감사하게도 둘째와 셋째까지 기회가 주어져서 잘 다니고 있어요.


아이들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좋아해요?

복태 저희는 부부가 붙어 있는 만큼 아이들이랑도 자주 붙어 지내요. 그래서 지음이는 어린이집에 4년을 다니면서도 안 가고 싶어 하는 날이 더 많았어요. 주변 아이들은 어린이집이 너무 재밌다고 하거든요. 지음이도 가면 잘 노는데 엄마, 아빠랑 어디 가서 노는 게 더 좋대요. 이음이도 그렇고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다행히 우리가 프리랜서라서 정 싫다고 하면, 어린이집 안 보내고 같이 있을 수 있어요. 그땐 두 가지 마음이 생겨요. ‘너무 잘 놀아서 또 어린이집 가기 싫어하면 어쩌지? 그래도 모처럼 기회니까 재미있게 놀아주자.’ 그런데 아이 욕구가 채워지면 다음 날부터 열심히 가더라고요.


공동육아 시스템을 겪으면서 부모로서 느끼고 깨달은 점이 있다면요?

복태 공동육아에서는 부모가 선생님을 전적으로 믿어요. 아이들이 아주 높은 곳에 올라가면 일반 어린이집에선 부모가 난리 나죠. 선생님도 그걸 알아서 아이들을 못 하게 하고요. 저희 어린이집은 아이들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게 놔둬요. 그럼 아이들도 알아요. ‘아 여기는 내가 까불 곳이 아니구나.’ 종종 다쳐서 그걸 깨닫기도 하고요. 이 동네에 산이 있는데 산에 깔아놓은 멍석을 들추면 지렁이가 나와요. 지렁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그걸 다 들추고 다니는 거예요. 선생님은 이 아이가 어디까지 멍석을 뒤질까 지켜봐요. 뒤집고 지렁이를 꺼낸 멍석은 덮어주면서요. 아이들을 믿고 지지해주기, 귀 기울여주기, 아이들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게 하기, 이것이 공동육아에서 저희가 배우는 점이에요.


지음이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졸업했잖아요. 대안학교로 진학한 건가요?

복태 아니요. 스스로 일반 초등학교에 가겠다고 했어요. 사촌 언니가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걸 보고요. 저도 공교육을 겪어봐서 알잖아요. 학생 수가 26명으로 줄었다 해도 선생님이 다 귀 기울여주기 힘들 테고 내 자식이 누군가에게 귀 기울임을 받지 못한다는 건 서운한 일일 수 있어요. 지음이가 간다고 해서 보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계속 아팠어요. 체하고, 배가 계속 아프대요. 생각해보니까 어린이집에서 그렇게 뛰어놀던 아이가 종일 앉아 있으니까 소화불량이 오나 봐요. 일주일을 온전히 가본 적이 별로 없어요.

최근 아토피가 심해져서 2주를 빠졌는데요, 같이 다니고 마음을 들여다봤더니 “엄마, 나 이제 학교에 가도 될 거 같아.” 하더라고요. 저는 부모의 몫도 너무 큰 거 같아요. 좋은 교육에 갖다 놓아줘봤자 그 아이가 기본이 안 되어 있으면 습득하지 못해요. 기본이 되어 있으면 공교육에 가도 견딜 수 있거든요. 저희는 아이들이 스스로 견딜 수 있는 힘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 가서도 싫다는 걸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걸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저희는 그걸 같이 고민하는 거예요.


공교육과 대안교육 사이에서 고민은 없었나요?

한군 저는 지음이가 경계 없이 어떤 토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깡다구를 가진 아이로 자라길 바라요. 예술적이고 대안적인 상황에서도 그렇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두 세계를 알고 겪어보고 여기에 머물지 저기에 머물지 선택해야죠. 그게 제 목표예요. 그래서 지음이를 일반 초등학교에 보낸 거고요.

복태 지음이는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다만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게 힘들대요. 방석을 사달라고 해서 사줬는데 어느 순간 그것도 안 쓰겠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친구들도 안 쓰는데 자기만 너무 유별난 거 같대요. 그것도 이 아이가 배워가야 할 세상인 거잖아요. 스스로 선택한 거고요. 적응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대안학교에 가고 싶냐고 물어본 적도 있는데, 지금 학교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고 싶대요. 지음이가 마을 방과 후 활동을 하고 있는데, 다행히 거기서 해소되는 게 있나 봐요. 학교에서 경직된 감각들이 골목 대장들처럼 노니까 좀 풀어지는 거죠. 또 집에 와서 마음껏 하니까요. 부부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과도 감정의 소통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과 감정의 소통은 어떻게 하나요?

한군 첫째 지음이는 학교에서 친구와 기분 나빴던 일을 담담히 얘기하다 결국 울어버린 적이 있어요. 저희들이 친구처럼 모여들어 “와 어쩜 그런 애가 다 있어?” 하며 같이 험담을 해요(웃음). 남동생 이음이는 “정말 나빴다. 내가 가서 주먹 펀치를 날려줄게!” 하며 막 흥분하고요. 저는 저대로 또 얘기해요. “아빠도 어릴 때 그런 친구가 있었는데, 너무너무 힘들었어. 근데 아빠는 엄마, 아빠에게 얘기를 할 수 없었어. 너는 우리에게 얘기를 해줬구나. 멋지다. 하이파이브 하자!” 셋째는 언니를 안아줬어요. 그랬더니 지음이가 다음 날 씩씩하게 학교를 가더라고요. 가서 그 친구에게 얘기했대요. “너가 이렇게 해서 나 너무 기분 나빴어.”라고요. 연대하는 것. 그게 큰 힘이더라고요.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담은 SNS를 보며 개성이 강한 아이들일거라 짐작 했어요.

복태 셋이 정말 달라요. 지음이는 스스로 잘 챙기는 편이고, 깔끔해요. 그런데 둘째는 어수선해요. 지저분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그게 이음이의 보관 방식인 거예요. 자기 눈에 보이는 곳에 자기가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 나와 있어야 하죠. 절대 못 치우게 하거든요. 저는 그걸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걸 존중받지 않고 자랐더니 다른 방식으로 표출이 되더라고요. 치우는 걸 좋아하는 애는 깨끗하게 해주고 아니면 더럽게 두고, 애가 양말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왜 이렇게 유별이야?”가 아니라 “아, 너는 그걸 싫어하는구나.” 하면서 맞춰주고요. 자기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저절로 타인을 배려하는 거 같아요. 우쭈쭈 해주는 거와 존중해주는 건 차이가 있어요.

기질과 성향이 다른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나요?

복태 학교에서는 다 똑같이 취급받으니까 집에서는 좀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음이는 안 시켜도 뭔가를 하는 아이니까 시키면 그 순간 스트레스가 돼요. 그래서 저희가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해요. “야, 착한 일 하지 마. 너 안 해도 돼. 배려하지 마. 네 거부터 챙겨.” 근데 정말 섬세해서 잘 울어요. 별것도 아닌 일로 울고 있으면 화가 올라오지만, 이게 아이 성격인 거예요. “맞아, 너는 이걸로 눈물이 나지? 그럴 수 있지.” 해주면 이 아이는 더 여려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강단이 생겨요.

이음이는 엄청 수다쟁이에 무조건 자기만 봐야 해요. 호불호도 뚜렷하고 성격이 강해요. 옷부터 연필, 필통 등 제가 절대 사다 놓지 않아요. 안 쓸 거 뻔히 아니까요. 강한 성격의 아이라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 확실한 디렉션을 주고 있어요. “네가 이걸 잘 돌본다고 약속하면 사줄게.” 혹은 “네 용돈을 모아서 사.”처럼 명확하게요. 강한 아이일수록 강하게 대하는 거예요. 잘 지켰다면 “정말 멋졌어. 앞으로도 네 이야기 들어줄 거야.” 그러면 만족해하더라고요.

한군 보음이는 원체 태평한 아이예요. 근데 태평한 애가 자기 의사가 딱 생기니까 더 강한 파워가 생겼어요. 옷 입자고 하면 “응 아니야.” 양말 신자고 해도 “응 아니야.” 오늘 아침에도 양말 안 신고 슬리퍼 신고 갔어요. 잠바도 안 입고 나가요. 추우면 그제야 입고. 얘는 그냥 최대한 내버려 두고, 울고 싶으면 울게 해요. 다 울면 안아주고, 그럼 자요(웃음).


교육이란 뭘까, 생각해본 적 있나요? 

한군 저는 교육이 경험을 익히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경험치를 쌓아서 수용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결합시켜서 사회적인 언어로 바꿔요. 행동하고 표현하고 작업을 수행해나가고 소통하고 관계를 쌓아나가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거요. 사실 학교에 안 가도 된다고 봐요. 경험치라는 큰 범주 안에 공교육도 있고 대안학교도 있고 홈스쿨링도 있고 여행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졌을 때 공교육도 대안교육도 선택의 문제지 크게 목숨 걸 거는 아니거든요. 어떤 좋은 경험치를 아이들이 직접 겪게 할 것인지가 제일 중요한 포인트 같아요. 지음이가 학교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너무 좋다면 하는 거죠. 근데 자신이 이거 별로고 나는 엄마, 아빠 따라다니면서 사람들 만나고 거기서 만난 언니 오빠들에게서 배우는 게 더 많아, 좋아, 잊을 수가 없어, 그러면 학교 안 가고 엄마, 아빠 따라다니는 거고요.

복태 교육이라는 게 나쁘게 말하면 세뇌시킨다는 말이잖아요. 목표가 있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시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요. 저는 교육은 앎이라고 생각해요. 완전 내 것으로 체화하는 앎. 내 걸로 만들면 나로서 살 수 있잖아요. 이 아이에게 앎을 선사하여 지식이 지혜로 발현되고, 내 거가 되어 그걸로 삶을 살아가는 데 쓸 수 있는 거요. 우리가 그런 얘기하잖아요. 학교에서 배운 미분 적분 다 쓸모없는 교육이었다고요. 어릴 때 엄마, 아빠 돈으로 놀이했던 게, 나중에 커서 장사할 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게 진정한 교육인 거죠. 자기가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부부가 하는 노력이 있다면요?

한군 제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문화예술적인 가치와 정서적인 가치, 비물질적인 가치는 정말 확실하게 남겨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함께 음악 듣고, 그림 그리고, 영화를 봐요. 시, 그림책, 동화책도 읽고요. 아이들이 수용할 수 있다면 다 해보려고 해요. 제가 어릴 적 본 영화를 같이 볼 때가 되면 같이 보고 영화에 나오는 공도 실제로 사서 같이 놀아보고요. 여기 있는 카세트 테이프도 제 거 아니에요. 다 둘째 거지.

복태 이게 잘못 받아들이면 이 문화센터도 가고 저 문화센터도 가라는 말이 될 수도 있어요. 체험과는 다른 이야기예요. 아이들이 앞에서만 보던 걸 뒤에서도 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한군은 “음악은 이렇게도 들을 수 있어” 하면서 CD, 디지털, 테이프, LP, 골고루 틀어줘요. LP도 애들이 틀게 해요. 기스가 나든 말든 자기들이 해보죠. 그러면서 수많은 음악을 들려줘요. 클래식부터 헤비메탈, 락까지. 아이들의 음악적 감각이 살아나서 지나가다가도 “어 이거 그 노래 아니야? 이 음악 좋은데, 찾아봐줘. 이거 내 음악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줘.”라고 해요. 저희는 차에 타면 차례대로 돌아가며 각자 선곡을 해요. 음원 재생 사이트에 각자의 플레이 리스트가 있거든요.


아이들이 나로서 사는 삶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요?

복태 여행을 계속 가요. 어떤 냄새 맡으면 “이거 인도에서 먹었던 도사 냄새다. 치앙마이에서 먹었던 팟타이 생각나. 썽태우 매연 냄새인데?” 하면서요. 그걸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요. 사고력이 넓어지는 거 같아요. 지식의 확장이라고 생각해요. 여행을 갈 때 아이들도 ‘인도 갈까, 치앙마이 갈까, 이번엔 발리에 한번 가볼까?’ 같은 선택과 고민을 해봐야 해요. 나중에 학교에 갈 때도 ‘대안학교 갈까, 공교육 갈까? 서울대를 갈까, 하버드를 갈까, 안 갈까? 한국에서 살까, 인도에서 살까?’ 선택할 수 있겠죠.

한군 우리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넓혀가는 거죠. 넓혀서 자기들이 선택할 수 있게끔요. 지금 얘네들은 이성이나 논리로 사는 삶이 아니잖아요. 어떤 느낌의 세계, 감각의 삶에서 살고 있잖아요. 저는 아이들이 ‘이 느낌은 뭐지?’ 싶은 것들을 최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느껴보길 바라요. 작고 시시한 일상에서도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지음이에게 ‘사라스와띠’라는 인도 여신의 별명을 지어줬어요. 너는 한국인이지만, 천주교 세례도 받았지만, 사라스와띠라는 별명을 가진 여신이 될 수도 있어. 종교와 관계없이 인도 신화, 기독교, 불교 이야기를 다 해줘요. 경계를 두지 않고 배척하지 않게 하려고요.


배척하지 않는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르쳐요?

복태 지음이가 학교에서 하느님을 그렸는데 친구가 “이게 무슨 하느님이야? 졸라맨이지!” 그랬다고 울고 온 거예요. “네 마음속에서 나오면 그게 예수님이고 하느님이야.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될 수 있고 모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라고 달래줬어요. 아이들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지로 인한 편견을 갖지 않게 하고 싶어요. 우리가 너무 그런 상황에서 자랐잖아요.

이음이는 흑인음악을 듣고 자라서 그들이 음악을 잘한다고 생각하니까, 흑인을 만나면 진짜 멋있다고 여기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동성애도 마찬가지예요. G보이스라는 동성애 합창단 공연에 첫째와 함께 보러 가요. 첫 장면에서 오빠들이 뽀뽀를 하니까 “어떻게 오빠들이 뽀뽀해?” 물어봐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줘요. “사랑의 형태는 다양해서 오빠와 오빠, 언니와 언니도 사랑할 수 있어. 뽀뽀도 하고. 사랑하는 거야.” 그럼 이상하게 생각 안 해요. 거리를 지나가다가 오빠들끼리 손잡고 가면 “둘이 사랑하나 봐.”라고 해요. 오빠들이 걸그룹 춤춘다고 치마 입고 나오면 ‘남자들도 치마 입을 수 있구나. 나도 바지 입잖아.’ 생각하고요. 다양하고 확장된 정체성을 알려주고 싶어요. 젠더 의식도 마찬가지고요.

가족이 힘쓰는 생활 습관이나 질서도 궁금해요.

복태 저희는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거칠게 말해서 ‘싸가지’가 있어야죠. 요즘 부모를 봉으로 아는 아이들이 많아요. 어른이 말하기도 전에 자기 먼저 다 얘기하고, 그러면서도 “왜 내 얘기 안 들어줘? 왜 나를 안 봐?”라고 해요. 엄마가 일하다 늦게 데리러 오면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하고, 부모에게 함부로 대해요. 부모 자식 간이 아니고 ‘노예와 왕’ 같더라고요. 부모와 자식이 자유롭고 허물없는 관계, 친구이자 동료지만 그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어요. 장난으로 베개놀이를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얼굴을 때리면 멈추고 딱 얘기해요.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뭔가를 계속 달라고 하면 “엄마가 너희를 위해 돈을 벌어오는 존재가 아닌데, 계속 사달라고 하는 건 아닌 거 같아. 용돈을 줄 테니까 그걸 모아서 사. 그리고 그 용돈도 허투루 쓰지 않으면 좋겠어.”라고요.

벗은 양말은 빨래통에 넣기, 사용한 컵은 싱크대에 넣기, 아이스크림 먹으면 그 봉투는 버리기, 길 가다가 쓰레기 버리지 않기, 나무를 꺾을 땐 “나무야 고마워.”라고 말하고 꺾기 등이 있어요. 그리고 아이가 셋이다 보니까 ‘내가 더 가질 거야’가 너무 많아요. 아이들 소원은 자기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럴 때도 “엄마는 똑같이 줄 거야. 그런데 누구 한 명이 더 달라고 하면 다른 사람도 더 줄 거야.”라는 걸 계속 얘기하고 있어요.


부부가 같이 아이를 키우긴 하지만 가족 내에서 각자 하는 역할이 있잖아요.

복태 같이 있을 때 저는 주로 밥을 차리고 치우고 빨래를 하고, 한군은 아이와 놀아줘요. 이게 저희 가정에 맞는 균형 같아요. 복태와 한군에서는 제가 사장님이자 매니저이고, 섭외 전화, 메일 관리, 서류 정리, 사회적인 업무들을 해요. 숫자, 수치와 관련된 은행 업무 등도 하고요.

한군 그럴 때면 저는 아이 셋을 보고 설거지와 밥하기, 집안 돌보기를 하죠. 아이들을 진정으로 키울 줄 아는 아빠라면 의식주를 해결할 줄 알아야 해요. 장도 보고 밥도 먹이고 옷도 입히고 하는 아빠요. 혼자여도 아이를 볼 수 있고, 같이 있을 땐 확실히 역할 분담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놓으니까 서로 억울한 게 없어졌어요.


아이들이 아빠를 참 좋아하네요. 의지도 많이 하는 것 같고요.

복태 아이들이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힘들어요. 저녁에 한군이 수업을 갈 때 제가 셋을 봐야 하는데 “아빠 언제 와?”를 계속 물어요. “엄마가 있잖아.” 해도, “그건 그건데, 아빠 언제 와?”라고 해요. 익숙한 존재가 없으니까 애들이 허전한가 봐요. 11시가 될 때까지 아빠가 안 오면 첫째가 그래요. “큰 게 필요해. 집에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무언가가 있어야 할 거 같아.” 아빠랑 살을 비비고 껴안아야 아이들이 그제야 안정감을 느끼거든요.

한군 만족의 기본값을 너무 올려놨나 싶어요(웃음). 사실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있어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을 즐겁게 만들어놓으면 제가 힘 없고 지칠 때 그만큼 못 해줄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아빠한테 놀아달라고 하지 말고 너희가 노는 데 나를 끼워 줘.”라고 말해요. 


복태 씨는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썼지요. “하루를 엄마로 시작하려 한다. 희생이라기보다 ‘기꺼운 헌신’이라 느끼고 나서 삶에 활력이 생겼다”, “내 안의 어떠한 힘으로 건강해지고 있다.” 어떤 의미예요?

복태 첫째를 낳고 무너지는 저를 보고 엄마로서 자격이 부족하다 생각했어요. 저는 육아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제가 애 때문에 결혼했고 애 때문에 일을 멈추고 이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예쁜 거와는 별개로 그런 원망들이 쌓이니까 야속하고 그랬죠. 셋째를 낳을 때까지도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엄마 역할도 잘 못하면서 바깥에서 일을 한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제가 밖에서 일을 하고 건강한 에너지를 가져오면 아이들을 더 잘 보는 거예요. 각자 할 수 있는 몫이 있고, 잘하는 일이 있으면 그걸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올해 ‘죽음의 바느질 클럽’을 만들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럴 때마다 한군이 지지해주고 아이들을 돌봐주니까 제가 더 힘을 얻어서 제 거를 하는 거예요.

제 거가 확고해지면서 엄마로서의 저도 단단해졌어요. 그전에는 제가 흔들리니까 엄마로서의 저도 더 흔들렸거든요. “내가 이렇게 병들어 있는데 왜 엄마 역할을 수행해야 해?” 한군이 워낙 잘하니까 아침에 밥도 안 차리고, 저는 계속 누워 있었어요. 더 자고,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근데 정신을 딱 차린 거죠. “나는 엄마이기도 해. 나라는 사람이 강해져야 해.”


어떻게 바뀐 거예요?

복태 아침에 눈떠서 나로서의 시간을 30분 보내요. 요가를 하고 체력을 다지고 아침밥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밥을 차리고 모두를 깨우는데 올라온 제 기운이 아이들에게 전해지더라고요. ‘아, 이게 서로 주고받는 거구나.’를 느꼈어요. 제가 엄마로서 역할을 하려고 하니까 아이들이 저를 엄마로 만들어주더라고요. 엄마의 시간을 잘 보내니까 제 시간도 잘 쓰게 되고요. 저를 단단하게 하고 나서 다시 엄마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 동등하게 만나게 돼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관심사와 흥미를 찾으면서요?

복태 그렇죠. 저는 엄마 역할만 해서 힘든 사람들을 보면 빛을 잃은 거 같았어요. 기쁘지 않은 엄마의 얼굴이거든요. 내가 없어지니까 억울하고 빛을 잃은 얼굴로 아이들을 대하고요. 저 역시 그랬어요. 엄마 역할을 잘하려면 빛이 있어야 하고, 내 빛이 있으려면 내가 좋아하는 일, 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아이들이 저를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저렇게 즐거운 거구나. 멋있는 거구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 하면서 꿈을 꿀 거 같아요.

엄마가 매일 짜증만 내고 있으면 어떤 어린이가 어른이 되고 싶겠어요. 아빠가 일하고 와서 “아 진짜 회사 가기 싫다.” 그러면 누가 어른이 되고 싶겠어요? 돈을 안 벌고 싶겠죠? 저희 아이들은 부모의 직업에 질투를 해요. 둘째가 얼마 전 저희 공연하는 데 따라갔는데 아빠가 기타만 치고 있으니까 “아빤 돈밖에 몰라. 기타만 쳐.” 하더라고요. “물론 돈 벌려고 하는 거지만 아빠는 저게 너무 행복한 거야.” 했더니 “내가 있는데도? 엄마도 마찬가지구먼. 엄마도 돈 벌려고 바느질 하는구먼!” 해요. 엄마, 아빠가 즐겁게 일하는 걸 질투하더라고요.

한군 우리가 잘했네. 건강한 거네. 일 끝나고 오면 이렇게 말하거든요.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엄마, 아빠 공연 듣고 좋아했고 돈도 벌었어. 그걸로 맛있는 거 사 왔어. 너무 보람차서 더 이상 보람되면 안 될 거 같아.”


죽음의 바느질 클럽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복태 3년 전에 치앙마이에 처음 갔을 때 우연히 배웠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혼자 하던 거예요. 손바느질은 저 혼자 사부작사부작하면 되죠. 여럿이 있을 때 바느질을 하면 캡슐이 탁 씌워지면서 저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요. 그러다가 ‘아트 윈도우’ 프로그램을 제안받아서 네이버에서 클래스를 했어요. 별 생각 없이 했는데 지인이 SNS에 좋았다고 올려서 관심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이 7시간을 앉아서 화장실 한 번도 안 가고 바느질을 했어요. 완전 죽음의 바느질 클럽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약간 하드코어 스타일로 이름을 붙였어요. 계속하다 보니 이게 참 저다운 작업 같더라고요. 그전에는 ‘내 직업은 뮤지션이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못 하는 게 많네.’ 하는 갈증이 있었는데 ‘나는 복태인데 음악도 하고 요가도 가르치고 죽음의 바느질 클럽도 하는 거야. 그래서 내 직업은 복태야.’라는 마음을 먹게 됐어요. 제가 뭐든지 하면 그게 제 직업으로서 하는 일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죽음의 바느질 클럽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 같아요?

복태 오롯이 자신을 위해 7시간을 몰두한다는 걸 너무 즐거워해요. 엄마들은 도망 오는 거더라고요. 핑곗거리가 없으면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요. “나 바느질 배워서 애 옷 입히려고 해.” 남편한테 말하고 와서 너무 행복해하는 거예요. 아늑한 집에서 누군가 배달해주는 팟타이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같이 수다를 떨고요. 살롱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바느질이 엄청 심플해요. 누구든지 천만 있으면 다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심플하게 내 옷을 만들 수 있고 내 옷은 어떤 옷보다 값지다.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아도 되고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메시지가 숨어 있어요. 사람들에게 억지로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죠. 좋은 작업 같아서 이걸 조금 더 의미 있게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요.


한군도 나만의 취미가 있어요?

한군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음악 안에서 관심사가 바뀌어요. 집에서 기타를 못 치면서 귀로 듣기 시작했고 디제잉을 했어요. 그리고 ‘시타르’라는 인도 악기 공부를 최근 시작했어요. 제가 서른이에요. 10년간 누군가를 가르쳤는데 저를 위한 투자는 못 했어요. 다 쏟아내기만 한 거예요. 마침 인도에서 이 악기를 공부하시던 분이 한국에 들어오셔서 작년부터 공부하고 있어요.


두 분은 예술 치유 프로그램도 많이 진행해왔죠?

복태 좋은 예술은 치유 목적을 하고 있어요. 엄마들을 위한 치유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예전엔 일에서는 엄마라는 역할을 떼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건 그 영역이더라고요. 그래서 보이스 요가를 공부했어요. 보이스 요가는 누구나 노래할 수 있고 누구나 소리 낼 수 있어요. 저희도 워크숍을 듣고 계속해봤는데 소리의 진동을 통해서 내가 나를 치유하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더라고요.

지원 사업으로 엄마들을 위한 워크숍과 공연을 열었어요. 제가 아이들과 나눈 대화들을 들려주고, 엄마로서 느낀 감정들을 내레이션하고, 저희 노래에서 가사를 빼고 허밍으로 불러요. 엄마들이 몸으로 소리 내고. “엄마”라는 단어를 실었더니 막 눈물을 내는 거예요.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냈으면서 오롯이 자기를 위해 못 낸 거예요. 누구나 다 위로가 필요하지만 저는 엄마들이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그 엄마 중 한 명이고 소외된 사람이었으니까 그들을 위해 공연과 워크숍을 계속 열려고요. 올해는 복태와 한군으로 가지만 조금은 결이 다른 작업들을 하려고 해요.


음악이 좋아서 하는 거지 삶의 목표는 아니라는 말을 했어요.

한군 맞아요. 삶이 먼저고 그 삶을 발현하는 표현하는 도구가 음악이에요. 삶의 형태가 바뀌고 달라지면 음악도 달라지겠죠. 나누고 공감하고자 하는 가치관으로 이어져서 가는 거죠. 그 맥락 안에서 음악이 있고 다른 게 생길 수도 있어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정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