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Is Everywhere And Often Nowhere

집은 어디에나 있고 자주 아무 데도 없다
이훤

집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시작되지만 늘 공간의 형태에 그치는 건 아니다. 다 다른 모습으로 발생하고 시작된다. 

 

또 집은 거주하는 누군가 있고 보호된 공동체가 이루어졌음을 환기하지만 닫힌 문에서부터 우리가 타인 됨을 상기하기도 한다.

모든 물질과 비물질이 결핍의 대상일 때, 하나의 얼굴과 목소리, 식당과 과일가게와 동네에 위치한 서점 등이 집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것들 모두 집이 될 수 있다.

이따금 불완전하게

어디나 집인 것처럼

안녕하세요? 한국 사진작가는 오랜만이라 더욱 반갑네요.

반갑습니다. 미국과 한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사진작가이자 시인인 이훤이에요. 이번 주제에 저를 불러 주셔서 기뻤어요. 이국에 살며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지내거든요. 

 

홈페이지의 작가 소개가 흥미로워요. 영문은 “photographerand a poet”, 국문은 “시인이자 사진가”라고 소개했는데요. 영문은 ‘사진작가’가 먼저이고, 국문은 ‘시인’이 먼저더라고요. 머무는 곳에 따라 역할 비중이 달라지는 건가요?

그런 뉘앙스를 읽어주다니, 좀 뭉클하기까지 하네요. 고마워요. 미국에서도 글을 써서 발표하지만 대개 시보다는 산문에 가까운 글이에요. 영어로 존재할 때 시인의 정체를 잃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무의식 중에 사진작가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했나 봐요. 여기서 영어로 시 이야기를 할 때도 있는데 그때도 대부분 한글로 쓴 시를 떠올리며 응답했던 것 같아요. 머무는 곳에 따라 역할의 비중이 바뀌는 거, 아무래도 맞는 거 같네요. 저를 정성스럽게 읽어준 것 같아서 이 질문이 다정하게 느껴져요.

 

덩달아 기분이 좋네요(웃음). 시와 사진 중 어떤 작업이 먼저였어요?

사진이요. 저는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출국 전에 아버지가 작고 귀여운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해 주셨어요. 그때까진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도 아니었고요. 미국에 갈 때만 해도 영어를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였어요. 언어가 불가능해지는 경험은 생각보다 괴롭더라고요. 때마다 사진을 찍으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아마 시각 언어가 활자 언어의 역할까지 해주었던 것 같아요. 사진으로 새 언어를 체득하고 누린 기쁨이 아직도 선연해요. 6년 정도 혼자 사진을 찍으며 지냈는데, 스물다섯이 되고 얼떨결에 첫 전시를 하게 되면서 사진작가로 활동을 시작했죠.

 

사진이 언어를 대신했다니 흥미롭네요. 시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시를 시작한 것도 스물다섯이었어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사진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어요. 시와 사진은 개별 언어라 생각했는데 점점 시가 시각적으로도 구현될 수 있다고 느꼈거든요. 시에 온전히 담는 데 실패한 언어 중 일부는 사진으로 옮기며 해소되기도 했어요. 시와 사진 사이에 아주 작은 접점이 생긴 거죠.

 

서로 다른 시와 사진이 어떻게 섞이고 흩어질 수 있는 건가요?

시는 꼭 활자 형태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식으로 발화된다고 믿어요. 활자로 쓴 시를 읽으며 경험하는,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서사가 머무는 공간’을 다른 매개로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심지어는 시인들도 시가 활자로만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리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시인과 사진작가로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성격이 다른 두 언어가 포개지는 걸 봤어요. 이미지는 직관적이지만 작가의 선택에 따라 설명되지 않기도 해요. 한두줄로 집약하기 힘든 사진들이 그래서 생기는 거고요. 저는 어떤 사진들은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아주 넓은 시간과 긴 공간을 성취한다 믿어요. 제 사진들이 그리 찬찬히 읽혔으면 싶은데, 이미지 과부하 시대에 너무 큰 바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죠.

 

사진은 직유의 매체라고 생각했는데, <집은 어디에나 있고 자주 아무 데도 없다Home Is Everywhere And Often Nowhere> 시리즈를 보면서 은유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실체로서의 집을 찍으면서도 그 안에 이야기를 숨겨두는 것처럼 보여서요.

그리 느꼈다니 기뻐요. 은유로 읽히길 원하는 사진이 꽤 있거든요. 뷰어가 표면 이상의 이야기를 보고자 하는 의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꼭 그리 읽히진 않아도 괜찮아요. 그건 사진작가가 매번 의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니거든요. 그날의 기분, 날씨, 배경 등에 따라 도착하는 사진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시처럼요. 저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는 서사와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자주 고민해요. 뷰어 스스로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오로지 사진만으로요.

 

이번 호 주제는 ‘집’이에요. 시리즈에 등장한 집들을 소개해 줄래요?

대부분 이전에 살던 조지아에서 찍은 집들이에요. 지금은 시카고에 살고 있지만요. 조지아에는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많아요. 마당이 넓고, 창고나 지하 공간을 가진 집들이요. 문을 열고 나가면 수풀과 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언제든지 산책할 수 있는 조용한 모습이 조지아에서는 가장 흔한 풍경이에요. 

 

지금 어떤 집에 사는지도 궁금하네요.

미국 가정집에서는 신발을 벗지 않는 경우가 적잖게 있는데요. 저희 집은 신을 벗고 들어와요. 집에 들어서면 마스크를 벗고, 손을 소독해요. 그러고는 현관에 있는 거치대에 겉옷을 벗어두죠. 가방과 카메라와 휴대폰을 소독하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집에 들어서면 아내가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겨줘요(웃음). 지금 집은 거실과 방 하나만 있는 구조예요. 집 내부가 어두운 편이라 불은 늘 켜두어요. 저는 집 안의 조도가 정서와도 이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음악과 영화가 꽤 중요해서 큰 스피커와 음향 기기가 있고, 그 옆에 책상이 있는데 여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요. 스탠딩 데스크를 두고 앉아서 작업하다가 책상을 높여서 글을 쓰기도 하면서요.

 

집을 물리적인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어요.

맞아요, 물리적인 것 이상이에요. 저에게 집은 ‘내가 나 될 수 있는 장면’ 같아요. 집은 안전한 곳이기도 하고, 마구 느슨해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낡지 않는 기억이기도 하거든요.

 

집을 정의해 줄래요?

이민 오기 전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국에 머물면서 집은 ‘정서적으로 가능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이국에서 그런 순간은 드물거든요. 정서적으로도 완전한 집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그런 공간은 늘 멀리 있다고 느껴요. 그게 반복되면서 집은 필사적으로 하나의 시공간에 묶이지 않는 단어가 돼요. 그래서 저에게 집은 언제나 모국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글자예요. 

 

작업 소개 중에 “이국에 자리 없다는 것이 도리어 집을 여러 군데로 만들어준다.”는 문장이 인상 깊어요. 이국에 정착하지 못한다는 말인 동시에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역설 같기도 하고요. 

정확해요. 두 마음 모두 대변해요. 이국에서 집을 가져도 영혼한 구석은 모국을 향하는 걸 느꼈어요. 남은 생을 이국에서 보낸다면 아마도 완전한 집은 영영 갖지 못하겠다는 걸 깨달은거죠. 모국에 정착한대도 어쩌면 비슷한 맘이 들 거예요. 실제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난 이곳에서도 이방인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었거든요. 결국 어디에 있든 그곳이 온전한 내 자리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는데요. 그때부턴 불완전하더라도 어디든 머물 수 있게 되었어요. 오히려 조금 더 집인 것처럼 살 수 있게 된 것 같고요. 집의 영원성은 소실되었지만 흩어질 수 있게 된 거예요. 기구한 역설이죠(웃음).

 

시리즈를 엮으면서 염두에 둔 분위기가 있었나요?

완전한 관찰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고요 있잖아요. 주위 소음과 관계없이 혼자 철저하게 정적인 공간으로 입장하는 순간. 그런 순간을 시각 언어로 옮기고 싶었어요.

 

그게 곧 작가님이 집을 바라보는 시각인가요?

집 밖에서도 안에서도 그런 고요를 느껴요. 내부에 머물지만 집을 잃어버릴 수 있고, 외부에 있으면서도 집의 상태를 누릴 수 있듯이요. 둘을 오가는 경험은 또 그 ‘자리 없음’의 상태는 시간대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느꼈어요. 또렷하게 감각될 때도 있지만 이른 아침이나 늦은 새벽을 오가는 ‘사이’의 마음이라 생각해서 그런 분위기를 담고자 했어요. 

 

이국에서 지내고 있어서인지 집을 보는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집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코로나19 이후로 집은, 물리적으로는 좀더 작아진 느낌이에요. 예전에는 집 밖으로 나가 카페나 식당, 야외에 앉아서 작업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모든 대안이 불가능해졌잖아요. 집은 편안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것을 대체할 공간의 부재가 가끔 답답해요. 작업이 집에서만 이루어지다 보니 같은 공간에서 이뤄지는 생활-먹고, 휴식하고, 자는 일 모두-이 작업의 연장인 것처럼 느껴져서요. 반면 코로나19를 겪으며 정서적인 집은 더 확장됐다고 느껴요. 보고 싶다, 고맙다, 건강하자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됐고, 마음을 건네는 빈도가 늘어났거든요. 화면으로 얼굴 보며 이야기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요. 막연히 집과 같은 대상이지만 자주 대면하기 어려웠던 사람들과 조금 더 편히 마주할 수 있다는 게 다행처럼 느껴져요.

 

앞으로는 ‘자리 없음’이 다정함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올해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올해 목표는 ‘조금 더 건강한 마음과 리듬으로 생활하자.’예요. 상반기에는 개인 사진 산문집과 시집 원고를 다듬을 거예요. 애정하는 동료이자 친구인 이옥토 작가와 낼 책 작업을 시작할 거고요. 개인 사진 산문집은 7월 말에 출간될 예정인데, 오래 붙들고 있던 책이라 잘 해내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꼼꼼하게 느끼며 만들고 싶고, 정확하게 슬퍼하고 구체적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시인과 사진작가로 살면 살수록 두 매개의 창작자로 잘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업과 작업 텀이 짧을 때 유독 곤두서는 순간이 많아요. 충만해지는 순간을 그때 그때 잘 누리며 더 기꺼이 느슨해지고 싶어요. 나를 감각할 수 있는 내가 모자라지 않게 스스로를 잘 구비해두고 또 갱신하면서요. 창작하지 않을 때도 개인으로서 보내는 시간에 충실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어떤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있나요?

H. poethwon.com

에디터 이주연

Photographer Jinwoo Hwon Lee 이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