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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월차 내고 나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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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월차 내고 나랑 놀자!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고양이들 밥을 줬고, 커피를 내렸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바탕화면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아침부터 누구지’하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익숙한 여자의 이름이 찍혔다. 전화를 받자마자 몰상식한 여자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야, 27일에 월차 내고 나랑 놀자!”
이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몰상식한 여자, 그러니까 내 오랜 친구는 아침 일찍 전화해서 다짜고짜 월차를 내라고 말했다. 이유인즉슨,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27일에 다른 나라로 기약 없는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날 아침 비행기로 떠나는데, 슬퍼서 도저히 일이 손에 안 잡힐 것 같다고 말했다. 슬픈 사연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답했다. 사실 욕을 덧붙이고 싶었는데, 사무실에 듣는 귀가 많아 참았다. 그놈의 남자친구가 생긴 후로 이 여자가 내게 얼마나 소원했던가. 남자친구가 부르면 나와의 약속은 잽싸게 취소하더니, 이제 와서 괘씸하게 내 귀한 월차를 자신에게 써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건 내가 착해서가 아녔다. 몇 년 전, 당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큰 소리로 울며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더니 화장실에서도 침대에서도 숨도 안 쉬고 울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또 보느니, 울 틈도 없이 재미있는 코스를 짜서 데리고 다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못생긴 얼굴을 또 보느니 차라리 하루 신나게 놀아보자.
하루짜리 서울 여행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친구와 놀 궁리를 하는 건 늘 즐겁다. 처음엔 서울 밖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근교의 괜찮은 곳을 물색하다 동해까지 범위가 넓어졌을 때, 그제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루’라는 것이 생각났다. 차도 없는 우리가 거기까지 가면, 도착해서 바다를 보고 밥만 먹고 금세 돌아와야 했다. 다음 날이 금요일이기 때문에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을 해야 하는데, 피로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인터넷 바다를 뒤지다가 우연히 서울의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북촌을 여행해보면 어떨까?’ 북촌은 이미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서울을 잊게 하는 장소가 몇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를 즐겁게 해주고, 저녁엔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원래 실연이나 이별 같은 것을 경험하면, 밤이 제일 힘들다는 걸 몇 번 겪어봐서 알고 있다. 낮엔 회사도 가고 학교도 가고 사람들도 만나지만, 잠도 오지 않는 끝없는 밤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이지. 많이 걷고 지친 몸에 맥주도 넣어주고, 푹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몇 년 전처럼 밤새도록 울면 중간에 한 번 베개를 집어 던지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우리에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안국역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의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굳이 울었느냐고 물으면 또 울 것 같아서, 모른 척 앞장서서 걸었다. 뒤따라 오던 친구는 쪼르르 달려와 팔짱을 꼈다. 내가 “아니, 이게 누구야. 배신의 여왕 아니세요?”라고 말하자 “아, 네. 제가 그 유명한 배신의 여왕입니다. 오랜만이네요.”라고 넉살 좋게 웃었다. 부어있는 눈을 가까이서 보니 더 마음에 걸렸다. 벚꽃 핀 정독 도서관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했다. 문득 오 년 전쯤 그녀가 이곳에 와준 날이 생각났다. 나는 그때 끝이 안 보이는 공부를 하던 중이었고, 하필 그 와중에 이별도 겪었다. 혼자 정독도서관에서 공부하며, 매일 이천 원짜리 도시락과 라면만 사 먹던 그때. 꾸역꾸역 참다가 ‘나, 죽을 것 같아’는 문자를 한 통 보내자 멀리서부터 그곳까지 단걸음에 와줬다. 그때도 지금처럼 추위가 막 사라지던 때였고, 그날만큼은 그녀 덕분에 제법 행복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나는 수시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우리에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바로 ‘과거’ 다.
그녀와 내가 만난 지 올해로 14년 째라, 한 번 시작된 과거 이야기는 끝나는 법이 없다. 몇 번씩 우려낸 이야기도 하고 또 하고, 잊고 지낸 이야기가 나오면 더 크게 웃는다. 한때는 생생하게 말할 수 있던 것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시절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학교에서 제일 덩치 큰 여자애랑 내가 치고받고 싸운 얘기는 언제 들어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기니까. 놀이터에서 처음 소주를 마신 날, 내가 모래를 손으로 퍼먹은 얘기도 나왔다. 그 시절의 우리가 좀 보고 싶다. 신기하게도 이런 얘기는 몇 번씩 곱씹어도 단물이 계속 나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미친 척 놀 걸 그랬나 보다. 지금은 출근 때문에 여행도 한 번 못 떠나는 서울의 소심한 직장인들인데, 그땐 세상이 다 우리 뜻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우리의 작은 동네가, 세상 전부인 줄 알았던 그때. 한참 그런 얘기를 하다가 빨갛던 눈의 붓기가 좀 빠진 것 같아 벤치에서 일어났다.
삼청동이 변했지
북촌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장소로 가기 전, 한때 자주 다니던 카페에 들려 커피를 샀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가 그려주는 천 원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보기로 했다. 털이 많은 아저씨는 “아저씨 이마만 보고 있어요.”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그림을 그렸다. 아저씨 이마를 보며 민망함에 한없이 웃었는데, 일 분만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우리는 크게 웃었다. 못생겨도 이렇게 못 생길 수 있나! 아저씨는 실물이 별로니까 예쁘게 그려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 못생긴 여자들의 초상화를 돌돌 말아 넣고, 우리가 좋아하는 장소로 향했다. 삼청동이 유명해지고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삼청동이 변했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맞는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고, 서울의 많은 동네가 알게 모르게 변하고 있다. 서운함이 있긴 하지만 크게 감정을 이입하진 않는다. 그럴수록 더 슬퍼질 뿐이다. 변화를 막을 길도 없고. 그런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삼청동’이 많이 변하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삼청공원’. 흔히 ‘삼청동길’이라고 말하는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가게가 끊어지는 곳이 나온다.
대부분 사람이 그쪽까지만 오고 되돌아가는데, 예전에 우린 ‘한 번 끝까지 가보자’며 인적 드문 길을 걸었다. 그리고 길 끝에서 우연히 삼청공원을 발견했다. 그곳에 가면, 어릴 때 다니던 약수터가 떠오르기도 하고 동네에서 우리가 종종 숨어 들어가던 작은 산이 생각나기도 한다. 계곡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시냇물이 졸졸 흐르기도 하는데, 그런 모습은 마음을 조금 늘어지게 한다. 운동 아닌 운동도 하고, 산책 나온 가족들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다독인다. 우리가 늙어 이 자리에 돌아왔을 때, 늘 있던 것이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 50년 전쯤, 삼청동을 좋아했던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가 처음 삼청동을 만나 좋아했던 10년 전쯤에도 그들은 지금의 나와 비슷한 아쉬움을 가졌을 것 같다. 그렇다면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은? 홍대가 변하고, 서촌이 변하고 많은 동네가 변하고 있는데, 결국 그 서운함은 내가 그걸 처음 만났던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생각이 많아진다.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 소녀는 문으로 들어서다가 뭔가를 보고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과거, 그러니까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 이유는 지금보다 뭔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
여기에는 모든 것이 지금과 아주 달랐을 때 자기도 그걸 경험했다는 기억도 포함된다. 노화 현상 중 하나다.
앞에서 말한 어린 소녀도 겪는 노화 현상. 이 현상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린 소녀도 나이가 있다는 걸 얼마나 쉽게 잊고 사는가.
-페터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중
어설픈 사람들이 사는 동네
생각보다 하루가 길었다. 아침 일찍부터 만났더니, 이런저런 걸 해도 꽤 시간이 남았다. 이 근처에서 둘 다 안 가본 장소를 꼽아봤다. 워낙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둘이라 웬만한 곳은 다 가본 것 같았다. 그러다가 표지판 하나가 보였다. ‘북촌 한옥마을’. 서울 사람에게 북촌 한옥마을은 어쩐지 놀러 가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 관광객이 찾는 곳 같기도 하고, 인위적이라 진짜 한옥마을이 아니란 얘기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많으니, 속는 샘치고 산책하듯 한 바퀴를 돌아봤다. 흔히 들려오던 인위적인 모습도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지 않아 귀여웠다. 그곳에 사는 주민의 주거지와 관광지가 얼기설기 엮여있어 그걸 보는 게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주로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찾아다녔는데, 어딜 가든 식물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들꽃도 있었지만, 서툰 솜씨로 이곳저곳에 심어놓은 것들이 있어 사랑스러웠다. ‘북촌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해봤다. 관광객이 워낙 많아 시끄럽고 괴로울 것 같으면서도 어쩐지 이 동네 사람들은 꽤 즐겁게 지내고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만나서 들은 얘기는 아니지만, 군데군데 묻어있는 그들의 흔적이 ‘우린 그래도 이곳에 사는 소소한 즐거움을 알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주말에 오면 사람이 많아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황금 같은 월차를 쓰고 한가한 평일 낮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한옥에서의 하룻밤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에 갔다. 광화문으로 내려가 영화를 한 편 보고 왔더니 꽤 늦은 시간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친구분들과 술 한 잔을 하시다가 급하게 뛰어오셔서 볼록 나온 배와 어울리지 않게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미워요!”라는 귀여운 멘트를 날려주셨다. 아저씨는 친절하게 게스트하우스 이용 방법에 대해 얘기해주신 후,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셨고 우린 잘 준비를 했다. 쉽게 ‘한옥’이란 단어를 말해왔는데, 막상 한옥에 들어오니 생각보다 낯설었다.
도톰한 목화솜 이불을 펼치고 누워 창호지가 발린 문을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커플이 옆방에서 작게 나누는 얘기가 어렴풋이 들렸기에 자연스레 우리도 낮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많이 걷고 웃은 하루라 이야기도 잠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오늘 하루, 안 울고 잘 보냈네.” 친구는 그런 말을 하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나는 ‘정말, 다행이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입으로 뱉기도 전에 잠들어 버렸다.
출근하자
단잠을 깨운 것은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 저녁에 묘한 기분을 만들어주던 창호지에 햇빛이 들어왔다.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빛과는 전혀 달랐다. 은은한 빛이 꼭 ‘아침이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누워서 그 빛을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매일 듣는 익숙한 알람 소리가 울렸고, 친구는 기지개를 켜며 “출근하자!”라고 외쳤다. 우린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했고, 주인아저씨는 이 게스트 하우스의 자랑인 아침 식사를 꼭 먹고 가라고 우릴 불렀다. 옆 방의 오스트리아 커플, 네 명의 중국인 친구들 틈에서 한식을 먹었다. 외국인들에겐 처음 접하는 한식이, 내게는 오랜만에 먹는 아침 식사가 특별했다. 분주하게 준비하느라 바쁜 아침에 정갈한 한식은 어림도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모두에게 낯설지만, 기분 좋은 아침 식사가 아니었을까.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우리는 빠르게 걸어 나와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친구는 지하철, 나는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우리가 나눴던 어떤 헤어짐보다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오며 즐거웠던 시간을 되짚으며 혼자 웃다가, 내가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밥도 잘 먹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잠도 잘 잤지만, 무엇인가 빠져있었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어김없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지금 말하는 이 행복이 가물거리거나 감 잡히지 않는다면, 전화기를 들고 친구에게 연락해 보는 건 어떨까. “야, 월차 내고 나랑 놀자!”라고.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휴안 한옥스테이
서울시 종로구 계동 81
Tel 010-9859-9809
Bongsan9809@gmail.com
Hueahn.com
휴안 한옥스테이
북촌에 위치한 전통 한옥 게스트하우스, 휴안 한옥스테이. 백두산 목재로 만들어진 대들보와 우물마루, 자개로 장식된 문, 옻칠 그림 등에서 한국의 전통미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목화솜으로 만든 한국 전통 친구를 사용해 포근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아침마다 정갈한 한식을 식사로 준비하기 때문에 여행객이나 투숙객의 하루를 든든하게 만들어 주는 따뜻한 곳. 자신의 일을 즐겁게 여기는 주인아저씨가 있기 때문에, 누구든 서울에서의 낯선 하룻밤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