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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조화가 모여_6699 이재영
세상에 없는 책들을 꾸준히 출간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주변에 언제나 있어 왔지만 책으로는 온전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목소리를 담아내는 사람이다. 6699press 이재영에겐 무기가 있는 것 같다. 언제나 있어 왔지만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무기, 작은 마음에서 용기를 건져내는 무기. 그 무기가 궁금해 그의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대단한 장비는 발견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리 위엔 둥근 모자가 365일 함께라는 거. 혹시 그 안에 비밀을 숨겨둔 건 아닐까?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1인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는 6699press의 이재영이에요.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어수선한 시국에 날씨가 좋으니 좀 억울해요(웃음). 요즘 어떻게 지내요?
확실히 일감이 많이 줄어서 작년에 비하면 개인적인 시간이 훌쩍 늘었어요. 디자인이나 출판계는 1-3월이 비성수기라 단순히 그 영향인 줄 알았는데, 4-5월이 지나면서도 일감이 작년 같지 않아 긴장을 많이 하며 지냈죠. 개인 시간이 늘어난 만큼 정신 관리를 잘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디자인이나 출판, 어느 하나만 해도 힘든 일인데 혼자서 둘 다 해내고 있다는 게 대단해 보여요.
6699press는 출판사나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겠다는 큰 야망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2013년에 탈북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게 되었는데, 정식 출판사가 필요해서 한 번만 사용할 생각으로 출판사를 등록한 거였죠. 근데 막상 책을 출간하고 나니 바깥에 있는 소수의 목소리, 세상에 없던 목소리, 있는 목소리지만 조명되지 않은 목소리를 좀더 담고 싶더라고요. 6699press의 6699는 큰따옴표 모양에서 따온 건데 큰따옴표 안에 소수의 목소리를 담아 발화한다는 의미예요. 매년 한 권 이상의 책을 만들어 오다 보니 어느덧 13권이나 쌓였네요.
대중성 있는 콘텐츠를 다뤄보고 싶단 욕심은 없었나요?
늘 달콤한 유혹은 있었죠. 저도 잘 팔리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대중적인 콘텐츠는 저보다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많아요. 대형 출판사에서 이미 잘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너도나도 대중적인 소재만 다루다 보면 조명되지 않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제가 관심 있는 건 그런 틈이고, 개중에서도 제가 정말 잘할 수 있겠다 싶은 분야를 다뤄왔어요. 대중이 제 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저한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대중성을 고려했다면 아마 일찍이 지쳐버렸을 거예요. 저는 제가 관심 있고 잘할 수 있는 소재를 저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다른 출판사가 용기내지 않는 부분에 먼저 손을 뻗어 보는 거죠. 잃을 게 없어서 이렇게 도전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소수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묻히거나 공격받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나기도 하고요.
용기를 주는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용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군요.
좋아하는 말 중에 ‘책은 친구를 만든다.’는 문장이 있어요. 책을 만들면서 만나는 사람들, 기꺼이 저와 함께해 주는 친구들을 통해 저는 용기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어요. 저를 위해 용기 내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저 역시 용기를 얻는 거죠.
정의를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용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한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나라는 존재도 존엄하고 상대라는 존재도 존엄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나는 소중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방까지 그렇게 생각하긴 어렵잖아요. 내 생각과 가치관만 기준으로 삼으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충돌하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도 나와 같은 존엄한 존재란 걸 이해할 때 생기는 게 용기라고 생각해요.
이번 호 주제가 ‘아름다운 균형’이에요. 6699press의 작업들이 잘 보여주는 가치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조화를 만들기’라는 말이 있어요. 제 작업 모토이기도 하죠. 디자인 작업에서는 자간, 행간, 여백, 이미지가 조화로워야 할 테고, 책을 만들 때는 콘텐츠와 주제, 독자, 저자, 책의 물성의 조화를 생각해야 해요. 조화를 만드는 건 작업을 넘어 삶에도 적용되는 말 같아요.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저의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이루고…. 저는 아름다움이란 ‘최종의 형태’라고 생각해요. 내면에 켜켜이 쌓아온 것들이 잘 버무려져야만 완성되는 것 같거든요. 아름다움은 애써 꾸민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충실하게 쌓아야만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면의 아름다움은 겉으로도 드러난다고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움은 아마 좀 더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상대를 관용하는 자세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외모 역시 아름다움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일 거예요. 재영 씨는 모자, 안경, 수염의 조합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는데 이 캐릭터는 어떻게 완성된 건가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모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클라이언트와 미팅하거나 강의를 나갔을 때 상대가 저를 어리숙한 대학원생처럼 대하거나 만만하게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하얀 피부와 안경 쓴 제 모습에 카리스마가 부족한가 싶기도 하고, 약점처럼 느끼기 시작한 거죠.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대해 생각하다가 수염을 떠올렸어요. 수염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 수염을 기르면 나이가 좀 들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단순한 생각에서 기르기 시작한 거였죠(웃음). 모자 같은 경우는 아침마다 머리 정돈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쓰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모자쓰는 걸 좋아해서 빵모자, 캡모자, 털모자 등 다양한 모자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르다 보니 어느새 자리를 잡아 지금 모습이 되었어요.
지금 스타일에 만족하나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제 모습에 만족해요. 제가 제 모습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저를 사랑해 주겠어요. 많은 사람이 저를 표현할 때 동그란 안경, 모자, 수염을 떠올리는데 그런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는 것도 재밌는 일이고요.
빵모자도 즐겨 썼다고 했는데 지금은 캡모자나 워치캡을 즐겨 쓰는 것 같아요.
챙이 없는 롤업 형태의 워치캡은 2013년 도쿄에 갔을 때 처음 봤어요. 하나를 골라 써봤는데 너무 제 모자 같은 거예요. 그걸 시작으로 도쿄에 갈 때마다 똑같은 모자를 두세 개씩 사오곤 했어요. 당시만 해도 잘 없는 스타일이라 도쿄 친구들도 저에게 “이 모자 어디에서 산 거야?” 하고 묻곤 했죠(웃음). 한때는 워치캡만 해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씩 잃어버리고 지금은 딱 하나만 남았네요. 근데 제가 처음 쓸 때만 해도 한국엔 워치캡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유행처럼 번지더니 학생이나 동료 디자이너 중에서도 워치캡을 쓰는 사람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스타일이 겹치는 것 같아서 최근에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캡모자를 더 자주 쓰고 있어요.
365일 중 며칠 정도 모자를 쓰고 지내요?
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쓰고 있어요. 저는 외향적인 편이라 365일 전부 집 밖에 나가니까 매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모자가 없으면 좀 불안해요. 옷을 하나 덜 입은 느낌이랄까요. 언젠가부터 모자에서 안정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모자 없이 외출했다가 뒤늦게 알아차리면 곧장 새모자를 사러 갈 정도로요.
모자에는 유난히 예의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과거에는 실내에서, 혹은 어른들 앞에서 모자를 쓰면 안 된다는 인식도 있었고요.
유교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고, 실내엔 햇빛이 없으니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인식은 모자의 기능이 바뀌면서 점차 흐려진 듯한데요. 옛날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기능이 강조되었다면, 지금은 패션 아이템이나 콤플렉스를 가리는 도구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모자의 용도가 어떻든 모자를 벗으라고 강요하는 건 시대에 뒤처지는 일 같아요. 모자를 쓴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자를 벗으라고 이야기하는 건 남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 같거든요.
모자가 어느덧 패션이 되었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해갈 것 같아요. 모자 애호가로서 어떤 변화를 예상하시나요?
지금껏 기능이나 용도가 변했다면 미래의 모자는 소재 면에서 변화가 있으면 좋겠어요. 오랜 시간 모자를 쓰면 답답하고 여름철엔 덥기까지 한데, 쿨링되는 소재의 모자가 나오면 어떨까 자주 상상하곤 해요. 예전엔 망사처럼 구멍 난 소재의 캡모자가 유행한 적도 있잖아요. 그런 원초적인 방식이 아니라 운동복처럼 땀을 흡수하거나 쿨링되는 소재를 사용해서 모자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생각해 보면 모자는 기능뿐만 아니라 스타일 쪽에서도 계속 발전해 왔어요. 워치캡이 나오기 전엔 챙이 없는 모자는 비니가 전부였는데 거기서 롤업하는 귀여운 아이디어가 나온 것처럼요. 이렇듯 모자에도 새로운 시도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최근에 일본에 가서 챙이 짧고 흐물흐물한 소재로 만들어진 모자를 사 왔는데 모양도 특이하고 예쁘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어울리진 않아 보관만 하고 있어요(웃음).
많은 사람이 모자를 보면서 재영 씨를 떠올릴 것 같아요. 누군가 특정한 물건을 보고 나를 생각해 주는 기분은 어때요?
모자도 그렇지만, 6699press에서 서울의 사라지는 목욕탕을 담은 《서울의 목욕탕》이란 사진집을 낸 적이 있는데요. 그 뒤로 지인들이 목욕탕 굴뚝이나 간판만 보면 저한테 사진을 보내주더라고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하면서 제 계정을 태그하기도 하고요. 누군가 무언가를 보고 저를 떠올린다는 것에는 늘 고마운 마음이 있어요.
《서울의 목욕탕》은 사라지는 장소를 기록한 사진집이었죠.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어요.
사라지기 직전이어서 아름다운 건지, 아니면 원래 아름다웠는데 사라질 때가 돼서야 알게 되는 건지, 뭐든 사라지고 나면 후회가 남는 것 같아요. 소중한 친구가 떠났을 때,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아끼던 공간이 없어질 때…. 무언가 사라질 때마다 늦기 전에 소중한 존재들을 존중해야겠단 마음을 먹게 돼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제 인식도 많이 달라졌는데요. 과거엔 저를 위해 살고 더 빨리 성장하고 싶어 했다면 지금은 제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을 지키고 기록하는데 마음을 쏟게 됐어요. 디자인과 출판을 그 방법으로 삼는 거고요. 우리 곁에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있다는 걸,있었다는 걸 계속해서 표현하고 말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다른 존재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나를 돌보는 일에도 소홀할 수 없을 거예요. 나를 위해 특별히 하는 활동이 있나요?
우울하거나 힘들 땐 주로 책을 읽어요. 최근에는 《우울할 땐 뇌 과학》을 읽었는데 이 책을 통해 우울감이 모든 사람에게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어요. 동시에 우울감을 인정하고 언어화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난 봄부터 제 감정을 정제해서 글로 적어보고 있어요. 제 상태를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감정 상태에 도움이 되는 걸 쓸 때마다 느끼고 있죠.
내가 건강해야 계속해서 아름다운 작업을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떤 작업들을 해나갈 예정인가요?
지금 우리는 미래를 논하기가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어요. 저는 요즘 책을 계속 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많이 고민하고, 종종 허무함도 느껴요. 종이를 낭비하는 건 아닌지, 나 한 사람이 이 사회에 과연 도움이 될지…. 요즘 저는 앞으로 6699press가 낼 책보다도 미래 세대에게 느끼는 부채감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특히 이 시대의 청소년들을 바라보면 미안한 마음이 크죠. 그들을 위해 제가 뭔가를 한다는 것도 무책임한 이야기 같아요. 다만, 그들이 대면한 공포에 귀 기울이고 싶다는 마음은 있어요. 우리 세대가 느끼는 공포와는 다른 공포가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도 계속해서 출간 준비는 하고있는데요.
지금은 새로운 ‘서울의’ 시리즈를 준비하며 열심히 지내고 있어요. 《서울의 목욕탕》을 함께 만든 박현성 사진작가와 다시 호흡을 맞춰 《서울의 공원》을 작업하고 있거든요. 도시공원 일몰제로 인해 서울에서 사라질 공원 116개를 작년 8월부터 함께 기록하고 있죠. 다행히 지금은 서울시가 나서서 사라질 공원들을 지켜냈지만,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장소를 기록하는 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코로나19 시대의 공원을 기록하는 것도 그렇고요. 이렇게 힘든 시대일수록 작업에 지치지 않고 즐거우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라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