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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맣게 살아가자
대화를 나누면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주 작은 따뜻함도 놓치지 않고 마음 쓰는 다정한 사람, 귀여운 것에 대해 말할 때면 반짝이는 목소리로 이야길 털어놓는 친절한 사람. 작은 것을 돌보는 그의 선한 본성은 노래가 되어 마음을 덥히고, 그림이 되어 미소를 전한다. 오래된 모차르트 샤프로 쓴 노래부터 애플펜슬로 그린 까맣고 멋진 강아지까지, 소중히 기록해온 그의 세계를 부유하며 생각한다. 여기 참 포근하다고.
“문구는 저에게 꿈꾸게 하는 도구예요. 멋진 도구로 무얼 쓰게 될지 기대하는 건 설레는 일이거든요.”
“문구는 음악과 연결된 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걸로 좋은 가사를 써야지, 좋은 곡을 써야지 하게 만드는….”
만나서 반가워요.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안녕하세요, 음악 하는 성진환입니다. 한동안 쉬다가 다시 음악을 시작했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작업하고 공연하며 지내고 있죠. 요즘은 음악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상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정규 1집 [BABY BIRDS]가 나온 지 벌써 3년이 흘렀어요. 착한 노래로 채워진 앨범이었죠.
[BABY BIRDS]는 꽤 오랜 기간 쌓아온 곡들을 엮은 앨범이었어요. 착하게 살고 싶다는 제 욕구가 그런 노래들을 하나로 묶은 게 아닐까 싶어요. 때때로 어둡고 비관적인 노래들을 만들기도 하는데, 부정적인 에너지가 있는 노래는 어쩐지 잘 남기지 않게 돼요. 돌아보면 저에게도 위안이 되는 곡들을 남기고 있더라고요.
작사, 작곡, 노래, 어쿠스틱 기타, 타악기, 제작까지 일인 다역을 소화한 앨범이었어요.
이전 작업과는 달라져야 한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1집을 만들 때의 마음가짐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것 같아요. 다른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품고 있던 곡들이니까 한 곡 한 곡이 청자에게 잘 가 닿기를 바라면서 집중한 기억이 나요.
안녕하세요 고생하십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중략)처음 만나는 사람을 좋아할 준비 Are you ready?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잘해줄 준비 (중략)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결국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지 솔직한 마음을 담아 모두에게 덕담 “좋은 하루 되세요”
-성진환, ‘친절’, [BABY BIRDS]
착하면서도 단단한 곡들이란 생각이 들어요.
1집에 약한 면이 많다고 생각해와서인지 단단하다는 말이 새로워요. 저는 제 모습을 많이 투영해서 음악을 만들곤 하는데, 제 이야기를 솔직하게 노래하는 덴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어렵게 용기 내서 발표한 기억 때문인지 약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단단한 노래라는 말이 고마워요. 저는 언제나 더 단단해지고 싶으니까요.
가장 최근에 발표한 곡명은 ‘세상 끝날’이었어요. 그간 고양이, 강아지, 엄마, 소년 같은 소재를 노래해서인지 끝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세상 끝날’을 만들 즈음엔 꽤 오랫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어요. 주변 사람들, 좋아하는 아티스트….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죠. 이 노래에서 말하는 ‘세상 끝날 그 날’이라는 건 종말일 수도 있지만, 나,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날일 수도 있고, 세상이 끝나는 기분이 느껴지는 어떤 순간일 수도 있어요.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지금의 제 모습이나 생각의 온도 같은 게 담긴 곡이죠.
도박은 안 돼 그까짓 것에 내 운이 다해 더 소중한 걸 놓쳤다면 와 억울해서 어떡해? 너를 얻고 깨달은 진리 백 원을 넣었더니 백만 원 다 필요 없어 천 원을 넣었더니 천만 원 다 필요 없어 진심을 보였더니 내게 온 너 넌 나의 잭팟
-‘잭팟’, [잭팟]
운에도 총량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 노래 ‘잭팟’의 발상은 참 재미있어요. 살면서 얼마 정도의 운을 쓴 것 같아요?
상당히 많이 쓴 것 같아요(웃음). 좋은 일이 많았거든요. 부모님께도 사랑받았고, 영광스러운 순간도 많았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팀에서 음악도 했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추억도 쌓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강아지도 만났고, 가족들도 저도 건강하고…. 꽤 운이 좋은 인생이죠. 하지만 그걸 공짜로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남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운에도 총량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좋은 맘으로 살다 보면 운을 많이 썼더라도 보너스 스테이지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음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도 직업적인 면에서 보너스 스테이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음악을 그만두려고 했던 시기도 있지만 결국에는 다시 하고 싶은 음악이 생겨서 음악을 하게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방송에서 간단히 표현하려다 보니까 그렇게 이야기하게 됐는데, 특정한 음악이 하고 싶어서 다시 시작했다고 요약하긴 어려워요. 다시는 음악을 못 하겠다고 생각한 긴 시간 동안 곡을 전혀 쓰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노래가 마구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왔어요. 한동안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곡을 쓰게 되더라고요. 그때 쌓인 노래 중 발표하고 싶은 곡들이 생겼고,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음악을 하게 되었어요.
곡 하나를 발표하기까지 심사숙고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이 노래를 좋아해 줄까?’라는 마음과 ‘어쩌면 좋아해 줄지도 몰라.’라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가 많아요. 지금도 곡 작업을 하면서 이 노래가 의미 있는지 의심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세상에 좋은 음악이 이렇게 많은데, 나한테 우연히 나온 노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창작물인지 의구심이 드는 거죠. 그러다 조금이라도 의미를 찾게 되면 발표하기로 맘을 먹어요.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이런 이미지의 뮤지션이 되어야겠다.’고 상상하며 노래를 만드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요. 그저 나누고 싶은 노래가 다시 찾아왔다는 게 고맙고, 앞으로도 조금조금씩 계속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
앞서 이야기한 방송은 <복면가왕>이었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 만큼 얼굴을 가리고 노래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많이 떨렸어요. 이전에도 제안받았던 프로그램인데, 겁이 나서 쉽게 출연을 결정하지 못했거든요. 저한텐 무척 부담스러운 포맷이어서 생각할수록 못 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론 너무 많이 걱정하면 앞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단 맘이 들었어요. 잘하든 못하든 뭐라도 남는 게 있겠지 싶어서 출연하게 됐어요. 많이 떨렸지만 즐거웠어요.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는 뿌듯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고요. <복면가왕>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데엔 이미 출연했던 데이브레이크 원석이 형의 역할도 큰데요, 제가 매일 걱정하고 있으니까 “아 그냥 해!” 하고 약간 짜증 낸 적이 있거든요(웃음). 워낙 다정한 사람이어서 강하게 말하니까 확 와닿더라고요. 지금도 결정을 앞두고 망설일 때마다 그 순간을 생각하곤 해요. “넵! 할게요!” 하게 됐던 그 순간을(웃음).
이번 호 주제는 ‘문구’예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평소 문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어릴 때도, 지금도 문구를 좋아해요. 문구는 저에게 꿈꾸게 하는 도구거든요. 특유의 필기감, 그립감을 가진 도구로 어떤 종이에 무얼 쓰게 될지 기대하는 건 근사하고 설레는 일이에요. 여전히 문구에 관심이 많지만, 언젠가부터 쓰지 않은 노트나 펜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메모할 수 있게 되면서 노트나 펜을 사용하는 빈도가 많이 줄었거든요. 문구는 지금도 저를 설레게 하지만, 쓰지 않은 문구가 집안 곳곳에 생겨나고 있어요.
‘꿈꾸게 하는 도구’라는 말이 와닿아요. 문구로 꿨던 꿈 이야기가 궁금해요.
새로운 곡 작업을 시작하거나 앨범을 구상할 때 일부러 새 문구를 사기도 했어요. 지금 구상하고 있는 음악과 이미지가 비슷한 문구를 만나면 반갑기도 했고요. 어떤 문구를 보면 그 문구로만 작업한 특정 앨범이 생각나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문구는 음악과 연결된 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걸로 좋은 가사를 써야지, 좋은 곡을 써야지 하게 만드는….
앨범 아트워크를 매번 제로퍼제로가 작업하고 있어요. 문구와 떼어놓을 수 없는 디자인 스튜디오이기도 하죠.
망원동에 있을 때 제로퍼제로와 같은 골목에 살았어요. 꽤 오래전 일인데, 오며 가며 보이는 작업이 마음에 쏙 들어서 언젠가 솔로 작업을 하게 되면 아트워크를 부탁하고 싶었어요. 제 음악은 물론이고 제 성향과도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이 같은 느낌이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의 것 같으면서도 아닌 부분들이 보여요. 제로퍼제로의 그림은 단순한 선과 색채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너무 장난스럽거나 가볍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지도 않죠. 항상 그 절묘한 지점에서 그림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리는 사람이 묻어나는 손그림과 손글씨인 것도 좋고요. 노래를 발표할 때마다 제로퍼제로에게 데모 파일을 보내고 있어요. ‘제로퍼제로의 감성으로 표현할 만한 노래라고 느껴진다면 아트워크를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매번 흔쾌히 응해주셔서 부탁할 때마다 너무 기뻐요.
귀여운 손글씨와 손그림으로 직접 공연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어요.
어릴 때부터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나이 먹으꿈꾸게 하는 도구, 문구면서 글씨나 그림체가 점점 귀여워지는 것 같아요. 10대 때는 지금처럼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는 아니었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귀여운 걸 더 좋아하고 추구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문득 든 생각으로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작고 귀여운 것들에서 위안을 찾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인 것도 같아요.
최근엔 어떤 귀여운 것에서 위안을 찾았나요?
1집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어쿠스틱 기타 위주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최근엔 일렉 기타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일렉 기타가 사운드의 근간이 되면서 올해 초엔 페달보드를 만들었고, 최근엔 그걸 귀엽게 구성하는 데 꽂혀 있죠. 기타 소리에 효과를 주는 이펙터의 세계는 굉장해서 배열만 달라져도 사운드에 미묘한 차이가 생겨요. 장비 세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론 사운드이지만, 페달보드가 항상 발밑에 있으니까 제 기분을 위해 꾸미고 싶더라고요. 더 예쁘게, 더 귀엽게 구성하고 싶어서 디자인과 색깔을 자꾸 바꾸고…(웃음). 아, 최근에 꽂힌 귀여운 거 또 있어요!
어떤 거죠(웃음)?
저희 집 근처에 아르디움이라는 문구 브랜드가 있는데, 스티커가 너무 예뻐서 색깔별로 몇 세트나 샀어요. 빨강, 분홍, 초록, 파랑, 주황…, 색상도 다양하거든요. 제 기타에 어울리는 색깔의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죠. 어쩐지 쑥스러운데, 제 악기랑 맞는 색상의 스티커를 찾으면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사인에도 그림을 곁들이던데, 사인할 때 특히 선호하는 펜도 있을 것 같아요.
모나미 네임펜이요. 저는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그리는 그림, 또박또박 쓰는 글씨를 좋아해요. 네임펜의 특히 매력적인 점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학창 시절엔 톰보우TOMBOW에서 나온 플레이컬러를 좋아했어요. 얇은 심, 두꺼운 심이 위아래에 있는, 뚜껑이 두 개인 콘셉트가 마음에 들었고, 색상도 다양해서 자주 사용했어요. 제가 학생 땐 다들 시스템 다이어리를 썼는데, 친구에게 속지를 한 장 건네 받아 전하고 싶은 이야기나 그림을 빼곡히 채워서 돌려주는 게 유행이었거든요. 당시에 제가 속지를 예쁘게 꾸며주기로 좀 유명했는데요(웃음). 그때도 플레이컬러를 자주 썼어요.
오늘, 까맣고 착한 깜짝 손님과 함께했죠.
작년 6월부터 함께 살게 된 소중한 강아지 ‘흑당이’예요. 저를 좋아해줘서 고맙고, 건강해서 고맙고, 웃게 해줘서 고맙고…. 고마운 것만 많은 존재죠. 흑당이 덕분에 하루 한 번 이상은 무조건 웃게 되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흑당이는 예민하고, 조심스럽고, 똑똑한 강아지예요. 음식이든 물건이든 장소든 늘 스스로 적응하려 하면서 편하고 익숙해진 다음에야 즐기곤 해요. 성장하면서 점점 편안해지거나 더 예민해지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그런 변화를 함께 느끼는 것도 즐거워요. 저는 흑당이 덕분에 얻게 된 게 너무너무 많아요.
SNS에 일상을 그림으로 그려 업로드하고 있어요. 최근엔 ‘흑당툰’이 된 것 같던데…(웃음).
한동안 뭘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지낸 적이 있거든요. 그땐 온종일 1985년 버전 슈퍼마리오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 저를 보다 못한 배우자가 그림이라도 그리라며 아이패드를 쥐여주더라고요. 지금 제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배우자인 오지은 씨랑 같이 만들어서 예전부터 끼적거리던 그림이에요. 그 캐릭터를 살려서 그림으로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지인들이 재밌다고 웹툰처럼 연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SNS에 올리고 있어요.
한동안 하지 않았던 SNS도 그림 업로드와 함께 다시 시작된 것 같아요.
맞아요. 아무것도 못 하겠던 당시엔 SNS도 다 닫아놓고 지냈어요. 저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걱정스러워 할 것 같아 마음에 걸렸는데, 그림으로라도 근황을 전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죠. 처음엔 결심이 필요했지만 막상 업로드하고 보니 저도 재미가 붙어서 한동안은 열심히 그림만 그렸어요. 업로드하고 나면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 되니까 욕심도 생기더라고요. ‘더 웃기고 싶은데? 좀더 귀엽게 그리고 싶은데?’ 하면서요(웃음).
어떤 도구로 그리고 있어요?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펜슬을 쓰는데, 정말 잘 만든 문구라고 생각해요. 아마추어가 그리기에도 편하고 아주 미세한 필압까지도 살려줘서 좋은 문구를 사용할 때의 기분도 들죠. 오래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컴퓨터용 태블릿을 산 적도 있는데, 모니터를 보면서 손만 움직여야 하는 게 영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이건 프로의 영역이라 생각해서 일찍이 포기하기도 했죠. 그에 비해 아이패드는 정말 편리해요. 언제든 꺼내서 바로 그릴 수 있다는 점, 쉽게 그리고 지울 수 있다는 점, 레이어가 있어서 크기나 위치 조절이 자유롭다는 점…. 앱이 잘 구현돼 있어서 정교한 표현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전자 제품은 문구와 먼 기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패드가 문구라는 말에 설득당한 것 같아요(웃음). 진보한 문구만큼 오래된 문구에도 추억이 있을 것 같아요.
아빠가 어릴 때 저랑 제 동생에게 샤프를 한 자루씩 선물해주셨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왠지 르네상스 시대가 생각나는 탁한 빨간 바디에 금색 팁을 가진 모차르트 샤프였어요. 오래오래 쓰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모차르트 그림이 다 지워질 때까지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필기감도 좋고, 여전히 튼튼해요. 이사를 해도 늘 곁에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워낙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거라 애착도 많아요.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어떤 것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나요?
문방구는 별천지였죠. 아무래도 펜 코너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각양각색의 펜 앞에 머물면서 계속 시필해보곤 했거든요. 주인이 눈치 줄 때 즈음 겨우겨우 하나 골라서 사 오고(웃음)…. 불량식품도 좋아했어요. ‘테이프’라고 오묘한 맛이 도는 희한한 불량식품이 있었어요. 달지도 고소하지도 않고 느낌도 이상한데, 입안에서 싸악 녹는 그 미묘한 느낌과 맛을 좋아했어요. 테이프를 먹는다는 기분이 키치하기도 했고요. 불량식품이 주는 묘한 즐거움이 있었죠.
불량식품도, 오래된 문방구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요. 앞으로 문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없어지는 것을 슬퍼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어린 친구들은 불량식품을 먹기보단 스마트 기기를 조작하면서 성장할 테니까, 나중엔 전통적인 문구를 파는 문방구는 훨씬 줄지 않을까 싶어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반대로 제가 그곳에서 즐거웠던 기억들이 남아 있는 세대라는 게 행운이란 생각도 들어요. 저도 언젠간 사라질 테니 사라지는 건 사라지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소중한 기억을 부디 잊지 않고 잘 간직하길 바랄 뿐이죠.
요즘엔 옛날에 유행했던 것들이 돌아오기도 해요. 패션, 간판, 먹거리….
복고적인 것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추억팔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하지만, 그 반짝 지나가는 것들 사이에서 진짜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유행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를 되새기는 순간이 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작은 걸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작고 쓸모 있는 존재인 ‘문구’란 주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고요.
정말 고마운 말이네요. 저는 작은 걸 좋아하고, 작은 걸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도 그런 게 통했는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조그맣게 살아가자.’란 말을 많이 하며 지내거든요. 노래를 발표하거나 공연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등 많은 사람에게 노출될 때마다 반대급부로 조그매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사람 앞에 서고 난 다음날에는 항상 “자, 오늘은 조그맣게! 조그매지자!” 하면서 정말 조그매지는 상상도 해요.
내일은 조그매지는 날이겠네요(웃음). 누구나 때때로 작아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예전부터 이상하게 작은 것에 마음이 쓰였어요. 물건도 그렇지만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많은 사람과 어울릴 때도 어딘가 불편해하는 듯한 사람에게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물론 제가 그런 입장일 때도 많았고요. 다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어떨 땐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인식을 유난히 싫어하기도 해요. 그런 게 어찌 보면 대중의 흐름을 빨리 파악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성격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인 만큼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대중 예술인으로 활동하기에 좋은 성격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더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쪽으로 생각하는 걸 잘 못 해요. 팬들을 ‘같은 마음으로 모인 무리’로 인식하고 대하는 것도 여전히 힘들어요. 무대에 있을 때도 많은 사람이 저한테 집중하는 게 편치 않아서 최대한 제 성향대로, 항상 일대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노래한 지 오래되었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반대 성향이 되지 못하는 게 속상할 때도 많지만, 사람은 잘 안 변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나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이런 나라서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 믿으면서요.
작은 것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 믿어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내년에도 조그맣게 살아갈 것 같아요. 큰 고비를 넘길 때마다 잠깐씩 커지면서 적응하고, 그렇게 변함없이 살아가면서 많은 노랠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년엔 더 소중한 모양과 음악이 담긴 앨범을 남기고 싶어요. 정규 앨범이면 더 좋겠고요. 라이브도 많이 해서 사람 대 사람으로 자주 만나고 싶어요. 오늘 대화를 계기로 그림도 더 열심히 그릴 거고요(웃음).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 장소 협조 천천히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