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를 오가며 즐겁게 살아보는 것이 꿈이지만, 어느 멋진 여행가처럼 많은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대범함은 내게 없었다. 그 오랜 꿈을 채워 줄 대안으로, 나는 일 년에 한 달씩이라도 낯선 곳에서의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한 달을 제외한 나머지 날들은 여행을 꿈꾸며 열심히 살기로 했다. 매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때로는 그 추억들과 설렘들로 지친 일상을 조금 더 특별하게 보낼 수 있었다. 동경하고 사랑하던 파리로 나의 첫 프로젝트 여행을 다녀온 다음 해,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섬 ‘하와이’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여행 속 여행 빅아일랜드
하와이에서 나는 항상 게으른 일상을 보냈다. 늘어지게 잠을 잤고,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나서는 비치 타올 하나를 달랑 들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했다. 야자수 그늘에 자리를 펴고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낮잠 을 잤다. 저녁이면 근처 마트에 들러 음식과 맥주를 한가득 안고 숙소로 돌아와서 원 없이 먹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노스쇼어North Shore와 하와이에서 제일 유명하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마쓰모토 쉐이브 아이스Mat*sumoto Shave Ice(할레이바 지역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 쉐이브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다)에 몇 번이고 다녀왔다. 우리가 오랜 시간 머물렀던 오하우O’ahu 섬은 그리 크지 않아 차를 렌트할 필요가 없었다. 몇 가지 노선만 알아둬도 어렵지 않게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구글맵을 이용하면 버스 노선과 자세한 시간, 정류장 정보까지 알 수 있으며 미리 숙소에서 컴퓨터나 핸드폰 화면을 캡처한 뒤 외출하면 무선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에서도 당황할 일이 없다. 한 달간의 게으른 여행 속에서 일상의 지루함을 느낀다는 건, 그곳의 생활에 어느 정도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그 평범한 날들이 쌓이고 쌓여 시시해질 때쯤, 우리는 빅아일랜드Big island로 떠났다. ‘여행 속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제주도의 8배에 달하는 크기의 큰 섬이지만, 오하우 섬만큼 관광으로 발달하지 않아서 국내 서적으로는 정보를 찾기 힘든 곳이다.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하와이로 세미나를 다녀왔던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있다.
하와이에 가면 꼭 별을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그때만큼 많은 별들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곳의 밤을 몰래 상상하곤 했는데,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곳을 찾은 또 한가지 이유는, 영화 <호노카아 보이> 촬영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비행기를 타고 30분쯤 이동해 우리가 도착한 곳은 힐로Hilo 공항이었다.(반대편에는 코나Kona공항이 있다.) 빅아일랜드는 면적이 넓어서 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여행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미리 렌터카를 예약해놓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륜자동차에 올라탔다. 오하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모험이 펼쳐질 것 같았다.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볼케이노 국립공원Volcanoes National Park’과 ‘호노카아Honokaa’, 그리고 ‘마우나케아 산Mauna Kea’의 정상이었다.
하와이의 숨은 별들
남쪽에 위치한 화산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검은 용암지대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생전 처음 보는 꽃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타거나 말라 있는 식물도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한쪽에서는 새로운 잎이 자라나고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낮에는 보이지 않던 용암이 출처가 어디쯤인지 모를 붉은빛을 띠며 대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평선 근처까지 빼곡하게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별을 보려면 하늘을 올려다봐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많은 별을 보았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마우나케아 산으로 가기 전에 작은 마을 호노카아로 향했다. 들뜬 마음으로 찾아간 마을은 정말 작았고, 영화 속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호노카아 영화관도 그대로였다. 이 오래된 영화관은 애석하게도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 문이 닫혀있었는데, 우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누군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매니저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영화관뿐만 아니라 영사실까지 보여주며 우리를 반겼다. 내가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를 좋아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니, 그녀는 그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영화 속 주인공인 비이 할머니가 자신의 할머니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음식을 매우 잘하셨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연과 그녀의 친절함에 마음이 벅찼다. 친한 친구에게 비밀이라도 들은 것마냥 작은 행복이 느껴졌다. 우리는 곧바로 마우나케아 산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200번 국도 새들로드Saddle Road를 지나야한다. 빅아일랜드를 가로지르는 길로, 두 시간 반 정도면 힐로에서 코나로 갈 수 있다. 새들로드에서는 길 이외에아무런 건물도 볼 수 없지만, 도로를 기준으로 양옆에 펼쳐지는 멋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황량한 사막, 푸른 초원, 검은 용암지대,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길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쪽이 일렁거린다. 모든 것이 신비로운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느꼈다. 안내서에서 일러준 대로 마우나케아 산으로 가는 길은 정말 험하고 위험했다. 천 길 낭떠러지부터는 정말 느린 속도로 긴장하며 정상에 올랐다. 그곳은 내가 알고있던 하와이 날씨와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웠다. 챙겨간 옷이며 담요를 둘러도 소용이 없었다. 해가 지는 풍경을 보고 다시 산 중턱으로 내려와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별보기 투어에 참여했는데 그날은 내생에 가장 많은 별똥별을 본 날이 되기도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언젠가 들었던 교수님의 말이 다시 떠올랐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하와이의 밤하늘과 그 안에 숨은 별들을 보라.”
여행의 끝에서
항상 가난한 여행을 했다. 쇼핑이나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에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한 달간의 여행에서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많은 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홍대 옥탑방에서 자취하며 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출이었다. 다만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 비용을 남들이 매달 여가생활에 돈을 지불하듯 1년 동안 조금씩 갚아 갔다. 그렇게 떠나는 여행은 낯선 곳도 익숙하게, 심지어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게는 파리에서의 한 달이 그랬고, 하와이에서의 한 달이 그랬다.
특별한 곳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나면 ‘이제 꽤 괜찮은 날들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건 여행의 끝에서 얻게 되는 용기이기도 했다. 내가 바라고 원할 때까지 이 즐거운 여정은 계속될 것이고, 어쩌면 여행 안에서 내 인생은 조금 더 소중해질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시절, 빛나는 청춘을 나는 이렇게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