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단어

소신

소신

 

굳게 믿고 있는 바. 또는 생각하는 바.

 

H를 처음 만난 건 수년 전, 낯설지만 귀여운 사람들이 모인 글쓰기 소모임에서다. 모임을 통해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지만, H 같은 사람들만은 곁에 몇 명 남았다. 우리는 잊을 만할 때 즈음이면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리소문없이 지나간 각자의 날들을 공유하곤 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책을 파는 사람이, H는 매일 방송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글을 쓰는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뭐라도 써보겠다는 의지가 인연의 시작이었기 때문일까. 서울 한복판에 있던 회사에 다닐 때보다 작은 도시에 책방을 열고 나서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 건 참 신기하다. 저 먼 마포구의 프리랜서 노동자는 굳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이 구석진 책방에 찾아온다.
새해가 시작된 후 H는 며칠을 사이에 두고 두 번이나 책방에 들렀다. 단골손님 못지않은 방문에 놀라면서 우리는 색색의 배달음식을 펼쳐 놓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대낮의 책방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H: 나 요즘 영 별로야. 내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죄다 흔들리는 것 같아.

나: 왜? 너 한 뚝심 하잖아.

H: 그게 다 얼마나 허약했는지 알게 됐다니까.

나: 무슨 일 있었어?

H: 아휴, 몰라!

 

그는 나와 동갑이지만 키도 훌쩍 크고 목소리도 한 톤 낮다. 주로 어두운 색 옷을 고르는 H는 생머리를 질끈 묶고 늘 같은 에코백을 휘두르며 걷는다. 너무 단호해서 때론 거칠게도 여겨지는 게 그의 화법이다. 나는 그런 성숙하고 털털한 느낌이 좋았다. 우물쭈물했던 20대의 나는 H 같은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렸다. 그런 친구가 이번에는 나보다 더 물러 보였다.

“무조건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 혼자 끝까지 안정된 모습으로 일할 자신이 사라지고 있거든. 그런데 자꾸 결혼이 해결책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서 끔찍해. 게다가 지난달엔 친구 결혼식에 가려고 절대 사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명품 가방도 샀어. 나 빼고 다 있는 것 같더라고. 그 돈이면 내가 사랑하는 가수의 공연을 30번 볼 수 있는데 말이야. 사고 나서 후회했지만, 어느새 다음 가방은 뭘 살까 구경하고 있다니까. 그리고 나 정치에도 관심 많은 거 알지. 그런데 가끔은 일 때문에 나랑 다른 정치적 신념이 담긴 글을 기계적으로 쓰기도 해.”

따발총 쏘듯 고민을 꺼내놓은 그는 “이젠 여러 종류의 보험과 도피처를 만드는 데 몰두하며 사는 것 같아.”라고 끝맺었다. H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언제나 소신 있는 사람들을 선망했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20대를 힘차게 헤쳐왔다. 스스로 튼튼한 뿌리를 심어놓았다고 믿었는데, 다 자란 듯 보이는 나무 기둥은 이내 휘청인다. H가 만든 뿌리와 기둥은 산들바람만 부는 화창한 날에도 허무하게 제 몸을 떨었다.

 

H: 어쩌면 자꾸 쉬운 방향으로 가는 걸지도 몰라.

나: 사실 우린 늘 쉬워지고 싶었던 거 아니야? 나름대로 어려웠잖아.

H: 응, 그래서 무서워.

나: 뭐가?

H: 이젠 쉽게, 더 쉽게 휩쓸리는 일만 남은 것 같아서.

 

지키고 싶고 놓치기 싫은 것이 많아지면서 그의 소신이 담긴 문장들이 자꾸 흐릿해진다고 했다. 앞으로는 ‘아까운 것’이 더 많아질 테니, 소신을 지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질 거라고도 했다. 나는 고민하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으나,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많아졌다는 뿌듯한 마음도 살며시 피어올랐다.

한 문장을 핑크빛의 두꺼운 책 속에서 가져오려 한다. ‘사자처럼 대담하게’라는 부제가 달린 책 《독립수업》에서 112명의 여성 사업가는 일에 관한 질문에 대답한다. 책에는 근사한 아포리즘이 넘친다. ‘직장인’이라는 빤하고 안전한 트랙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내가 가진 소신 따윈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을 때,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선택하는 책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나는, 깊은 새벽이 되면 그들의 당차고 견고한 답변을 읽으며 감탄하곤 했다. H를 위해 뮤지션이자 작가인 캐리 브라운스타인의 글을 꺼내어 봤다. 잘못된 생각은 없고, 다만 존재한다는 말. 이른 아침부터 그저 존재하는 생각을 머리와 마음에서 굴린 후 글로 만든다는 말.

H의 흔들리는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가 출근길마다 자신의 소신에 대해 찬찬히 생각한다면 어느 날엔 좋은 글 한 편이 뚝딱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떨림과 고민이 담긴 귀한 글이 따뜻한 음성에 실려 전파를 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Q. 좋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매일 아침 첫 번째로 하는 일은?
A. 언제나 아침형 인간이긴 했지만, 지금은 매일 새벽 대여섯 시엔 기상한다. 대도시조차 적막에 잠긴 새에 일어나면 낮을 훔쳐 쓰는 기분이 든다. 그 정적이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일 먼저 하는 건 커피를 내리고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나의 현 위치를 가늠하고 방향을 잡는 거다. 그러면 차츰 정신이 깨어난다. 그러고 나서 하이킹이나 산책을 하러 간다. 핸드폰 대신 작은 수첩을 들고 나간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적기도 하고 안 적기도 한다. 명상과 비슷하다. 잘못된 생각은 없다. 모든 게 다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다음 집에 와서 글을 쓴다.

– 그레이스 보니 《독립수업》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