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WING INTO A MAN

위 아 영, 자전거 탄 소년

MOVIE <위 아 영>, <자전거 탄 소년>

GROWING INTO
A MAN

어른이 된다는 것 

내년이면 나도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이 된다. 나는 어른이다. 내가 어른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하면 그건 꼴사나운 투정밖에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어른인 척하면서 산다. 운전을 하고 통장을 만들고 부동산 계약서를 쓴다.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는 제각기 다른 어른의 이미지를 마음에 품은 채로 자란다. 내게 어른의 이미지란 운전을 하는 이미지였다. 운전을 하게 된다면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어른만이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물다섯 살 겨울에 나는 집 근처의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한 번의 도전 끝에 합격점에서 딱 2점을 더한 점수로 운전면허를 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내게 운전은 두려운 것이었다. 운전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면허를 따는 일과 같았다. 꼬부랑 할머니도, 앞만 보며 달리는 김 여사도 운전을 했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밤이면 차를 몰고 질주하며 온갖 것들을 다 부수는 꿈을 꾸었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워서였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노아 바움벡의 영화 <위 아 영>의 주인공 조쉬는 40대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뉴욕의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아름다운 아내와 저명한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장인어른, 그리고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들까지 둔 조쉬의 그럴듯한 인생은 사실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는 10년째 남들에게 설명할 길도 없는 지루하고 모호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지원금도 보조금도 떨어져 편집기사에게 줄 돈조차 없다. 한때 스승이던 장인은 조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부수입을 벌기 위해 평생교육원에서 누구도 관심 없는 다큐멘터리 강의를 한다. 친구들처럼 아이를 가져보려도 했지만 수차례 시도에도 실패한 후 아이 없이 무덤덤하게 사는 인생에 적응해버렸다. 이제는 부모가 된 친구들에게서도 소외된 느낌이다. 

그런 그의 앞에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 제이미와 그의 아내 다비가 나타난다. 이들 커플은 조쉬의 팬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작품을 칭송하고 그와 가까워지려 애쓴다. 제이미와 다비는 힙스터 커플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쿨하게 산다. 휑한 로프트에서 닭을 키우고, 레코드플레이어로 오래된 음악을 듣고,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 돈이 없어도, 구닥다리 패션을 해도,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어쩐지 멋져 보이고 뉴욕 거리 한구석에서 해변인 듯 파티를 벌이며 인생을 즐기는 모습도 근사하기만 하다.

조쉬와 아내 코넬리아는 곧 제이미와 다비를 따라 버려진 지하도를 탐사하고 수상쩍은 명상 모임에도 참여하게 된다. 아이폰만 들여다보며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려고 애쓰던 중년 부부는 세상 돌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아니 세상의 흐름보다 한발 앞서 살아가는 제이미와 다비의 라이프스타일에 홀딱 빠져버린다. 제이미와 다비 커플은 그들 앞에 도착한 무기명 소포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소포 안에는 ‘젊음’이 들어 있다. 

내년이면 나도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이 된다. 소싯적 가수 이승환은 ‘마흔이 되어서도 청바지를 입고’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는 마흔이 되면 기지 바지를 입거나 몸뻬를 입는 것이 일반적인 시절이었다. 고작 청바지를 입는 것으로 젊어질 수 있다고 믿다니, 그 시절 사람들은 참 순진했구나. 나는 마흔이 코앞인데 청바지를 입고 있다. 내가 신는 천으로 된 신발에는 구멍도 뚫려 있고 나는 아직도 제대로 된 장례식 복장 하나 장만하지 못 했다. 이걸 어떻게 마흔이라고 볼 수 있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어른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이제는 운전을 한다. 자연스럽게 운전을 한다. 차를 몰고 강원도에 가본 적도 있고 제주도에서 운전해본 적도 있다. 주유소에 들러 가스 충전을 하는 것도,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내는 것도, 평행주차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가끔 몰상식한 운전자들에게 클랙슨을 울리거나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차오른다. 나는 어른이다. 진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함정이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우리는 뭐든 다 아는 척하지만 실제로 아는 건 거의 없다. 어린 애들이 보기에 우리가 어른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도 어른인 척하는 것뿐이란 얘기다. 자동차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도 모르고 보닛 한 번 열어본 적 없으면서 운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어렵고 두렵고 막막하다. 그래도 나이를 먹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겼으니 어떻게든 운전대를 잡고 달릴 수밖에 없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거라면 계속해서 잘못 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룬 것들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조쉬가 자기 자신도 지루해 미칠 지경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10년째 놓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조쉬는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조작하고 장인과 인맥을 만들기 위해 그를 이용하는 제이미의 알맹이 없는 인생을 조금씩 눈치채게 된다. 조쉬는 기를 쓰고 제이미의 혐의를 밝혀내지만 세상은 제이미의 손을 들어준다. 조작 좀 하면 어떤가. 이렇게 잘했는데. 이렇게 멋진데. 이렇게 젊은데. 그리하여 제이미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다는 조쉬의 고백은 비참하고 치졸하고 또 가슴 아프다. 

“난 존경받고 싶었어. 걔는 날 진짜 어른처럼 바라봤다고.” 

죽었으면 죽었지 권위적인 어른이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던 젊은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 권위란 건 내 말을 들으라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후광 같은 거라 믿었다. 직업상 나보다 젊은 사람들, 어린 사람들을 종종 만나는 나는 어느 순간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보다는,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끄러운 일이다. 나 역시 조쉬처럼 그들에게 존경받고 싶고 멋져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뭐든 다 아는 척, 어른인 척하는 것이다. 

이제 늙어가는 나는 가끔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왜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 역시 그들과 같았다. 그러니까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길. ‘요즘 애들’, ‘나 어릴 때는’, ‘나 젊을 때는’ 운운하시는 어른들은 과연 자신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는 걸까. 사실 나는 항상 버르장머리가 없는 젊은이였다. 예의도 없었고 매너도 없었다. 어딜 가나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고 책임감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조차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고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에게 바락바락 대든 적도, 싸운 적도 많았다. 축의금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장례식장에서 절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런 것을 자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부끄럽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그런 젊은이였기에, 천둥벌거숭이 망아지 같은 젊은이였기에 젊음은 그런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젊을 때는 누구나 재수 없고 건방지고 천지 분간 못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자기가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굴고 그러면서도 조급하고 초조해하는 것, 그게 젊음 아닌가. 젊음은 딱히 아름답지도, 멋지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솔직히 볼썽사나울 때가 태반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젊은 사람들을 보면 감동받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뒤늦게)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유별난 젊은이들일 뿐이다. 그래서 <위 아 영>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도유망한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 잡지 인터뷰 기사에 등장한 제이미를 보며 코넬리아가 내뱉은 말은 마음에 와 닿는다.

“그는 악마가 아니야. 젊은 것뿐이야.”

다르덴 형제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 속에 까칠한 현실을 스웨터처럼 덧입혀 놓는 감독들이다. 그들의 영화 <자전거 탄 소년>에는 시릴이라는 버림받은 소년이 등장한다. 부양능력이 없어 아들을 보육원에 맡긴 아버지는 시릴이 아끼던 자전거를 팔고 몰래 이사까지 가버렸다. 소년은 기를 쓰고 아버지와 자전거를 찾아다닌다. 그 와중에 시릴은 사만다라는 미용사 아줌마를 만난다. 사만다는 보육원 직원들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면부지의 자신을 끌어안고 버티던 소년을 잊을 수가 없었던지 자전거를 찾아와서는 그의 위탁모가 되어주기로 한다. 자기 자전거를 훔치려는 사람은 누구건 투견처럼 물고 놓지 않던 시릴은 겨우 찾아낸 아버지에게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다. 소년이 받은 상처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버지와 헤어져 담담하게 사만다의 차를 타고 돌아오던 시릴은 갑자기 얼굴을 긁어대고 머리를 유리창에 찧어대며 자해를 한다. 소년은 자기 자신을 해치고 싶어질 정도로 절망한 것이다. 그런 시릴을 사만다는 도대체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한없이 품어준다. 

시릴 때문에 사만다는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나쁜 아이와 어울리느라 밤에 집을 빠져나가려는 시릴을 필사적으로 막다가 시릴이 휘두른 가위에 찔리기도 한다. 급기야는 시릴이 저지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배상금까지 물어준다. 사만다는 왜 시릴을 품는 것일까. 왜 손해를 보면서까지 시릴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소년은 혼자 힘으로는 자전거를 되찾을 수 없다.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어린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아이에게는 어른이 필요하다. 다르덴 형제는 그런 어른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끌어안을 수 있는 어른. 그런 어른만이 희망을 만들고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이를 먹는 건 무수한 갈림길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예지력이라도 생긴 듯 눈앞에 앞날이 훤히 펼쳐지는 것도 아닐진대, 우리는 이 선택이 불러올 파국을 예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결과를 책임지는 것, 그것이 어른이 하는 일이니까. 그건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 선택하지 않고 선택의 결과도 책임지지 않으려 할 때 사람은 자라지 못한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나이를 무기로 남을 짓밟으려는 어른들, 권위가 없는 것이 두려워 권위를 휘두르는 어른들, 세상이 나아지게 하는 데는 털끝 하나 보탠 적 없으면서 남을 욕하고 불평만 하는 어른들,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하는 어른들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어떻게 하면 꼰대가 아니라, 어른아이가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의 상처 입은 마음을 돌린 건 무엇이었을까. 돌을 맞고 나무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지만, 나를 그렇게 한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지만, 지금 나는 털고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한다. 사만다에게로. 소년을 돌아가게 한 것은 사만다의 권위였다. 그리고 사만다의 권위는 사랑이었다. 시릴을 향한 사랑. 

그 사랑은 가엾은 존재를 향한 연민과 그 존재를 책임지려는 강인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어른의 권위라는 건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답을 구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보다 약한 존재를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위 아 영 While We’re Young
노아 바움백 감독 | 드라마 | 미국 | 97분

다큐멘터리 감독 조쉬와 제작자인 아내 코넬리아. 그들은 20대 부부이자 같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제이미와 다비를 만나며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최면에 걸린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건 다시 돌아온 청춘이 아니라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다.

자전거 탄 소년 Le Gamin Au Velo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 드라마 | 벨기에, 프랑스 | 87분

내게 소중한 것이 타인에게도 그만큼 소중할 리 없다. 이해조차 불가능한 때도 있다. 꼬마 시릴에게 소중했던 자전거는 아빠가 팔아버렸고, 소년은 그와 동시에서 아빠가 자신을 포기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소년은 멈추지 않고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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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