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발견하게 돕는 존재들

Friends Who Help Me To Find

창문을 끝까지 밀어서 열며 가을을 맞이한다. 이쪽에서 들어온 바람이 반대쪽 창문으로 나간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집이 더 넓어지는 것만 같다. 가을 하늘도 이런 식으로 높아지는 것 아닌가. 완두와 나는 이렇게 부푸는 기분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마치 바깥과 안쪽이 하나가 되는 기분.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침대 밑에 넣어둔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꺼내면 완두가 꼬리를 흔든다. 거기에는 집이 아닌 바깥에서 잘 수 있게 마련해 둔 텐트와 침낭, 작은 의자와 랜턴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가끔 기억나는 강의 내용

대학 때 운 좋게 들은 교양 수업에서 유목민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들이 한자리에 정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 말 그대로 이동의 미학에 관한 것이었다. 농사가 아닌 똑똑한 사냥의 기술, 견고함 대신 사라지는 것을 염두에 둔 건축 같은 이야기들. ‘유목민에겐 역사가 없다’고 교수가 말했을 때 강의실 분위기는 조금 술렁거렸다. 무언가를 정립하고 지키려는 정주민들과, 경계 없이 살아가며 끊임없이 파괴하는 듯한 유목민 사이의 갈등에 관해서도 말한 것 같다. 어쩐지 그런 대립이 요즘에도 있고 또 지금 이 강의실 안에서도 있겠구나, 그때 나는 생각한 것 같다.

정주민과 유목민.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나는 틀림없는 정주민이었다. 집을 구하고 물건을 채우고 잃기 두려워하며, 또 한편 그 안에서 반복되는 기쁨과 편안함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것들이 가끔은 내 겉모습 같고 속마음은 모두 뒤엎고(정확히 말하면 다른 식으로 얻고) 싶기도 했다는 점이다. 나라는 서랍 안에 정주민과 유목민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니. 왠지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캄캄Calm Calm 산악회

내 친구 H는 나처럼 개와 함께 살아가는 남자 어른인데, 나에게 가끔 캠핑을 다니자고 여러 번 말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100만 원이 있으면 필요한 장비를 살 수 있고 그 뒤로는 전혀 돈 드는 게 없다고 말하며 비밀 지도를 보여주듯 내게 장비 리스트를 건네준 사람. 내가 그 비밀 지도의 내용을 잊을 만하면 H는 내게 장비를 하나씩 선물로 주었다. 티타늄 수저 세트라든지, 미니멀한 개인 쓰레기통 같은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H는 이제 품절돼서 구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 물건들을 건넸다. 돌아보면 그것도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는 친구 없이 혼자서도 종종 산에 다니는 H를 보며, 그리고 혼자 다니면서도 산악회 이름까지 짓는 걸 보며(캄캄 산악회), 캠핑의 가치를 미뤄 짐작해 보곤 했다.

캠핑에 필요한 장비를 한꺼번에 다 사버린 것은 작년 이맘때쯤, 완두와 내가 본격적으로 같이 살게 됐을 무렵이었다. 목줄 산책만으로는 답답해 보이던 완두와 마음껏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 결정적이었다. 비밀 지도는 제대로 펴서 보니까 100만 원이 아니라 200만 원이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다 사버렸다. H의 말대로 그걸 다 사고 나니까 정말 드는 돈이 없어서, 잠깐 속았다는 생각에 구겨져 버린 내 마음도 이제는 쫙 펴졌다. 게다가 산에 가보니 정말 좋아서 나는 H와 함께 비밀 지도를 더 치밀하게 만들어 몇몇 친구들을 꼬시기에 이르렀고, 이제는 그 멤버들이 다섯 명도 넘어서, 시간 맞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산에 다니고 있다.

버리고 뒤엎는 기분

내가 옷장에서 옷을 집어들 때마다 완두는 다가와서 냄새를 맡는다. 입었던 옷을 또 입으면 산책을 가는 줄 알고, 청바지 같은 걸 입으면 친구들 만나러 가는 줄 아는 완두. 그러다가 바스락 소리가 나는 기능성 옷을 꺼내 입으면 어느 때보다 눈이 커진다. 침대 밑에 있는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꺼내 배낭을 꾸리면 확신에 찬 얼굴로 기뻐한다. 곧이어 친구에게 전화가 오고, 우리를 태우러 온 차가 집 앞에 서면 배낭을 메고 내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H도 있고 그와 함께 사는 개 댄디도 있고 캄캄 산악회 멤버들과, 가끔은 꽃님이와 심코라는 개도 있다.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완두도 ‘캠핑 가는 날’을 뜻하는 메시지로서 다른 개들을 반긴다.

산에 도착하면 개들은 폭죽처럼 차에서 뛰어내려 실컷 뛰고 새로운 냄새를 맡고 풀 위에 널브러져 잠든다. 개들처럼 우리도 많이 걷고 이야기하다가 침낭을 덮고 잔다. 단 몇 시간, 하루나 이틀 동안은 이동을 위해 걷고 불편함 쪽으로 걷고 넓음 속으로 걸어보는 것이다. 더 가고 싶으면 더 가고 갑자기 멈추고 싶으면 거기 멈춰서 원래는 잘 수 없는 곳에서 잔다. 잠자리 펴고 끼니를 때우는 것 말고 꼭 해야 할 일도 없는 저녁. 우스운 생각이니까 한 번도 말해본 적 없지만, 나는 그런 행동들이 좋아서 ‘내가 유목민이 되고 싶었구나.’ 혼자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날의 강의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무정부주의자였던) 그 교수는 유목민에게는 땅이 없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세우고 규칙을 만들고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할 토대인 땅 말이다. 유목민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며, 정주민들이 땅을 갈고 닦다가 죽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유목민에게는 텐트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문장 속의 텐트가 내 배낭에 있는 그 텐트가 될 수야 없겠지만, 오늘 밤 필요한 모든 것들을 등에 메고 풀 사이를 걷는 동안에는 어쩐지 균형이 맞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오직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떨리곤 한다. 터벅터벅 걸으며, 어쩌면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왜 그렇게 벅차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두 가지 양상의 삶을 번갈아 가며 사는 기쁨일까. 산에서 간소하게 지내다 보면 청소해 놓고 나온 집 생각에 또 몸이 나른해진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나는 캠핑이 나만을 위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 나를 이끌어 준 주요 인물 H와 완두에게 전할 수 없는 고마움 같은 것을 느낀다. 비밀 지도에는 사실 내 이름만이, 다른 사람의 글씨로 적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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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