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ing To The Another World

오소희 여행 작가

FLYING TO THE
ANOTHER WORLD
오소희
여행 작가

마치 용사의 모험기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한 악당과 적당한 정의감으로 세계의 평화를 찾는 이야기 같은 것. 하지만 그녀의 여행기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은 온전히 서로의 마음을 내어 놓았고 각자의 이야기를 경계 없이 나누었다. 관찰기 같으면서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의 살결이 그대로 올라오는 그녀의 여행. 그리고 매 순간 그녀 곁엔 항상 작은 동행자가 있다. 엄마와 아들 관계인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주고 싶다. 세계를 탐험하는 ‘친구’라고.

요즘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오소희 가을까지 엄마들 만나는 자리에 강연을 다녔고, 요즘은 다음 책을 쓰고 있어요. 엄마들에 관한 책이지만 육아서는아니에요. 환경은 좋아졌지만 엄마들이 무기력하고 자존감이 낮아졌잖아요. 여러 가지 요인들 위로 그런 상황을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엄마들의 페미니즘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죠. 엄마들이 어떻게 행복해지고 성장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예요. 제가 여행을 다니고 그 시기를 지난 뒤에 알게 된 것들을 책으로 써요.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을 때, 그 시간을 또 통과한 뒤에 알게 되는 것도 있더라고요. 할 수 있는 말과 해주고 싶은 말들, 그리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에 대해서. 아이를 잘 키웠는가와 별도의 이야기인 셈이죠. 그리고 이제 엄마로서의 책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에요.

이유가 있나요?

오소희 그동안 엄마로 열심히 살았잖아요. 아이가 성인이 되었으면 이제 다른 것을 봐야죠. 열심히 해온 이 역할을 내려놔도 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피날레 같은 책인 거죠. 엄마를 통과한 뒤에 알게 되는 말을 담으려고 해요.

오랜 시간 멀리 여행을 다녔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오소희 제가 결혼하기 전 일명 계룡산 시절이 있었어요. 사회적인 정규 코스에서 이탈한 3년이었죠.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요. 주변에서 이렇게 살아야 잘 사는 거다, 라는 말을 듣는 방식들이었죠. 그런 것에서 벗어나 계룡산에서 3년을 살았는데, 그제야 아이를 낳고 싶어지더라고요. 그 전에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외부에서 주어지는 일들을 쳐내기 바빴으니까요. 남편과 결혼을 하고 3년이 지난 무렵 많은 게 치유됐어요. 사실 냉담했던 것에서 오는 질병이 있거든요. 불통처럼요. 자기애가 없으니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자신을 사랑하게 되니 준비가 되는 거예요. 

그때 중빈이를 낳고 상경했어요. 남편은 취직하고 저는 3년 동안 아이를 열심히 키웠는데, 만 3년 즈음 되었을 때 특정한 순환기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한글 안 가르치느냐고 묻는 사람들, 아이에게 1등이 중요하다고 묻는 환경. 하지만 저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엄마였어요. 그때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건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가장 궁금했던 의문점이었죠. 그러기에 여행자로서의 엄마라는 자리가 좋았어요.

어떻게 다른데요?

오소희 그 전에는 하지 못했을 여행을 하게 되었어요. 유네스코가 선정한 문화재가 있더라도 1달러짜리 휴지 파는 애가 있으면 걔가 먼저 보여요. 그 아이의 구멍 난 슬리퍼가 보이고요. ‘쟤는 밥은 먹었나? 부모는 있나? 학교는 다니나?’ 그런 게 궁금해졌죠. 또 중빈이가 어리니까 그 아이랑 어울려 놀잖아요. 아주 천진하게, 어떤 구분도 없이. 그렇게 친구가 되고, 헤어질 때 아쉬워하고요. 그제야 ‘아, 엄마라는 여행자가 진짜 좋은 거구나!’ 했어요. 훨씬 양질의 것들을 보고 접하고 담으면서 계속 여행을 할 수 있거든요. 

정확히 중빈 군이 언제 처음 여행을 떠난 거예요?

오소희 중빈이가 세 번째 생일 맞이하고, 다음다음 날 출발했어요. 

중빈 군은 기억이 나요?

오중빈 여행 자체는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아무리 옛날이야기라도 무척 인상 깊은 이야기는 기억에 남잖아요.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되게 밝았던 게 기억나요. 그리고 ‘신은 어디 있지?’ 하고 찾아봤던 것도 기억나고요. 하늘나라에 신이 있다고 했는데 없어서 엄마한테 물어봤거든요.

친구랑 놀던 것도 기억에 남지 않아요?

오중빈 친구랑 놀던 거는 정확한 상대방이 기억나기보다는 습관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사람이 글씨체를 배울 때, 처음부터 예쁘게 배우면 예쁘게 쓰잖아요. 약간 그렇게 누군가와의 비슷한 행동이 저에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가 너무 어릴 때 여행 가면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런 여행은 소용없다는 공식이 있기도 해요.

오소희 우리나라 사람들은 범국민적인 행동 지침이 하나 있어요. ‘본전 찾기’요. 본전보다 안 되면 안 하고, 남으면 하죠. 모든 걸 물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의 남아있는 관습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줄줄 읊어줘야 본전인 거죠. 하지만 순간을 향유하는 게 여행이거든요. 

그 순간을 충분히 향유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 얼마나 기억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리고 그런 경험이 몇 번 겹쳐지면 태도를 형성해요. 망설이지 않고 춤추는 사람이 되는 거고, 망설이지 않고 사랑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게 여행의 힘이에요. 중빈이가 정확한 지명이나 날짜를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무언가를 즐겁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된 거니까요.

보통 장기간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들었어요.

오소희 첫 시작부터 한 달 이상 여행을 했어요. 초창기에는 애기가 너무 어리니까 한 달이나 40일은 안 되게 가곤 했죠. 남미 때는 3개월 있었어요. 그게 가장 길게 갔던 거죠.

잠투정, 밥투정 등 여행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오소희 그런 건 뻔뻔하게 대처하는 힘도 필요해요.

어떤 의미일까요?

오소희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죠. 혼자일 때는 최대한 정갈한 모습만 남에게 보이려 했고, 실제로 통제도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사회가 이해해주고 엄마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이의 돌발적이고 이성으로 커버되지 않는 영역의 것들은 타인이라면 애정을 갖고, 엄마라면 조금 담담히 처리해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우하는 자세랑 비슷해요. 아이의 지능은 성인보다 떨어지잖아요. 평균이라고 말하는 표준보다 떨어지는 게 당연한 만큼 부끄러워하거나 안 보여야겠다 생각하면 힘들어져요. 물론 최대한 피곤하지 않게, 아이의 체력을 배려해서 스케줄을 짜야죠. 너무 무리하지 않게 조금씩 느리게.

조금씩 느리다는 말이 무척 좋네요.

오소희 여행을 할 때 내가 너무 급하면 그냥 머물다 가는 거에 그쳐요. 그런데 조금씩 느리게, 그곳에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저에게 다가와요. 어디서 왔느냐 물어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관계도 맺으면서요. 순간의 깊이감이 생기는 거죠.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려 하고 맞춰 보려고 하는 게 어린아이와 함께하는 여행뿐만 아니라, 모든 순간에 적용된다고 봐요. 아이가 주는 제한적인 것, 그 부분에 여유를 가져야죠. 

대신 아이가 주는 장점도 되게 많아요. 예를 들면 계속해서 친구를 데리고 오거든요(웃음). 친구가 오면 그 엄마도 와요. 그럼 그 엄마하고 저하고 친구도 되고, 현지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죠. 엄마들만의 연결 고리가 있거든요. 애들 둘이 놀면 나란히 앉아서 미소 짓고 바라봐요. 그리고 아이가 있으면 배려를 많이 받아요.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큰 사고가 없었던 게 의외로 아이와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운이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덕분이라고 믿어요.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할 때 사회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실제로 아이에게는 관대한 시선이 필요한데도 성인 관점으로 아이를 대하는 사람들이 많죠.

오소희 노키즈존No-kids zone 같은 게 생기고 있죠. 뭔가를 차단하고 막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일부가 잘못했다고 전체를 차단하는 건 옳지 않고, 일부가 잘못했으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인식 전환이나 교육이 필요할 뿐이에요. 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도, 그렇게 점진적으로 하면서 함께 좋아질 것을 도모해야죠. “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쏙 잘라서 버려 버리자!”는 답안이 될 수 없어요. 무엇보다 아이가 성가신 대상처럼 여겨지게 하는 방안이 사회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보통 어떤 유형의 여행을 즐기시나요?

오소희 보통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 방식의 정반대로 움직이는 편이죠. 가장 저렴한 숙소, 가장 저렴한 식당, 가장 저렴한 이동 방식을 찾으니까요. 지저분함, 불편함 등등이 그 안에 그대로 있었어요. 사실 저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대졸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무학에 가깝다고 표현하면 표현했죠. 인증받은 졸업장은 있지만 제도권이 저한테 준 게 없거든요. 오히려 그간 읽은 책이 저를 형성시켰어요. 근데 밖으로 나가니 정말 큰 배움이 그곳에 있더라고요. 그 자체가 대학이에요. 

‘아, 내가 대학을 졸업했구나.’라고 느낀 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왔을 때였어요. 그래서 더 제3세계만 갔던 것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배고픈데, 이렇게 고생스러운데 무엇이 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살고 싶게 만드는 걸까 궁금하더라고요. 엄마가 밭을 갈다가 애기 젖을 주는 풍경들이 감동적인 교재였기 때문에 그것을 잘 접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죠. 호텔은 로비 문 닫히면 그냥 끝이잖아요. 그런데 싼 게스트 하우스는 대가족도 만날 수 있고 설거지하면서 그 엄마랑 얘기도 나눌 수 있어요. 가장 가까운 데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아이에게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 중빈이가 그곳에서 수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잖아요. 좋은 호텔에 가서 아이를 방에 넣어놓으려면 거기까지 왜 가겠어요. 그런데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그곳 아이들이랑 친구가 되어 어울려 놀 수 있어요. 그런 장점을 보면서 이런 여행의 방식을 택하게 됐죠.

책을 보면서 단순히 여행 에세이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찰기처럼 느껴졌어요. 사람들을 만나는 게 항상 기쁜가요?

오소희 만날 땐 그렇게 만나는 것 같아요. 만남의 빈도가 아주 높거나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거나 하지는 않지만요. 일도 강도 높게 하고서 한참을 쉬거든요. 여행에서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면 집에서 칩거하면서 글을 써요. 지금도 《엄마 내공》으로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 후에는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글을 쓰는 편이에요.

《엄마 내공》으로 강연을 많이 했는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뭐였나요?

오소희 사적인 게 있고 강연과 관련된 질문이 있어요. 사적인 것이라면 ‘중빈이에게 정말로 부처님처럼 대하나요?’가 있는데(웃음), 중빈이가 들으면 큰일 날 질문이죠. 여행기를 담은 강의 내용에 대한 것은 주로 엄마들이 받는 스트레스 얘기예요. 어릴 땐 독박육아가 문제 되죠. 워킹맘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 다음은 교육이고요. 

보통 육아는 많이 힘들어요. 전 세계에서 애 키우는 일이 쉬운 데가 어디 있겠어요. 나라에서 많이 도와주면 좀 낫지만, 젖 먹이고 기저귀 가는 것 자체가 수월한 데는 없잖아요. 그 본질은 피할 수가 없다고 쳐요. 그럼 애가 좀 크면 그게 좀 편해져야 하는데, 한국은 이때부터 시작이잖아요. 아이 받아쓰기 점수 챙기고, 학원 알아보고. 아이의 성적이 자신의 성취가 되어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어요. 예전 엄마들은 가능했어요. 교육 수준도 낮았고 워낙 여성으로 뒷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걸 운명으로 여겼거든요. 지금 엄마들은 절대 그게 안 되죠. 그런데 지금 아이의 성취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대신하고 보람으로 느끼려 한다면, 경쟁을 더 치열하게 만들 뿐이에요. 결과적으로 아이도 불편하고 부모도 불편해지면서 누구도 행복하지 않게 되는 거죠. 거기서 나오는 질문들이 많아요.

‘머리와 마음의 반비례를 경험했다.’라는 글을 보았어요.

오소희 사회주의 국가에 가면 주로 느낀다는 말인데요. 한국사회는 머리를 많이 쓰죠. 아주 어릴 적부터 뇌를 빨리, 잘 쓰는 법을 가르치잖아요. 쉽게 말해서 ‘계산하다’라는 동사를 떠올리면 돼요. 그게 여기의 생존 방식이니까요.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나 한때 사회주의 체제 방식을 채택했던 국가를 가면, 보통은 제3세계죠, 자본주의가 아니니 머리를 안 써요. 계산을 안 하는 거죠. 그런데 머리를 안 쓰면 마음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어느 한쪽이 비등해지면 한쪽이 쇠락하거든요. 저는 하던 대로 계산을 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전혀 계산의 의도 없이 마음을 내어놓는 거예요. 

마음에서 순수하게 나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얼굴이 빨개질 때가 있어요. 수치심이죠. 꼭 필요한 수치심이요. 자신을 정화시키는 수치심이니까요. 그런 감정을 계속 만나요. 아이들과 함께 다니니까 그런 배려 속에서 지내게 되는 거예요. ‘아 맞다, 여기서 이렇게 계산해야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이 마음의 근육을 써야 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요. 그렇게 저의 쇠약해진 근육을 쓰려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중빈이가 아이들이랑 놀다가 헤어질 때,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뭘 주고 싶어하는데, 줄 게 없잖아요. 그러면 돌멩이라도 깨끗이 닦아서 주려고 해요. 그런 순간을 계속 마주하면서, 제가 딱히 선할 준비를 한 게 아닌데 그냥 와르르 무너지죠. 세워놨던 경계와 계산의 벽이 와해돼요.

여행하는 데 적응하느라고 스트레스 받는 건 없었나요?

오중빈 제가 적응은 잘해서(웃음). 오히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남은 일들이 스트레스였던 적은 있어요. 문제집을 다른 애들이 열심히 풀 때, 기본적인 것들이 저와 다르잖아요. 학교 공부도 처음엔 굉장히 어려웠어요.

오소희 여행 가서 얻은 걸 여기서 확인하는 시스템이면 피로감이 적었을 텐데 그게 잘 안 이어지니까요.

중빈 군, 여행하면서 엄마랑 다투기도 했나요?

오중빈 많이 싸웠어요(웃음). 어릴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싸우지 않았어요. 사실 별거는 없어요. 사춘기 싸움은 사실 엄마를 이기려 드는 거잖아요.

오소희 일단 아침에 안 일어나는 거로 많이 싸웠어요. 사춘기 때는 잠이 많아지잖아요. 도통 안 일어나는 거예요. 로마에 머물 때였는데 아침을 날려버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지니까 어서 일어나라고 하고 중빈이는 침대에 있고 싶어했죠. 그때 중빈이가 쓴 글을 봤는데, ‘내 신체는 나의 것이며, 따라서 누구도 명령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끝까지 침대에서 버텼다.’라고 써있는 거예요(웃음). 그제야 그때 싸움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소희 너무 중요한 일이죠. 집 안에 있는 시간보다 집 밖에서 많은 게 일어나요. 특히나 요즘 주거 공간은 사각형 콘크리트잖아요. 계절도 없어요. 소비가 없으면 변화도 없고요. 그런데 집 밖은 매일 바뀌어요. 이곳의 안락함에 길들여져서, 내부에 오래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 그 순간 드는 생각이 ‘아 내가 이걸 잊고 있었구나.’예요. 바람, 풀 냄새, 심지어 차 소리까지도 나의 오감을 깨우는 것을 보면 반갑거든요. 발바닥에 뇌가 있다고 하잖아요. 걸으면서 발바닥으로 많은 것을 느끼죠. 이런 자극은 항상 바깥에서 느끼게 돼요.

여행을 정말 많이 가니까 여행 준비도 자주 할 것 같아요. 갈 때마다 설레나요?

오소희 여행을 갈 때마다 동일한 설렘과 동일한 걱정, 두려움을 느껴요. 돌이켜 보면 언제나 설렜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발리 여행의 경우 조금 달랐죠. 

오중빈 발리를 생각하면 관광지를 많이 떠올리는데 ‘우붓’은 해변가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이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요.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페르마타하티’라는 고아원에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산책을 하다가 알게 된 거라 뭔지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원장님이랑 인사하게 됐어요. 그곳의 아이들과 친구도 되고요. 제가 여행을 가면 꼭 바이올린을 들고 다니는데, 아이들에게 음악도 가르쳐주었어요. 거기에 음악이 없는 게 아니에요. 전통 음악도 있고요. 특히 인도네시아 음악은 화려하잖아요. 그런데 음계 같은 걸 잘 모르더라고요. 음악이 구전으로 내려왔던 거죠. 그래서 제가 알려줄 수 있는 많은 음악적 요소를 전해주었어요. 아이들은 내용을 빨리 습득했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어요. 모든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음 목적지를 정할 때, 자연스럽게 다시 우붓으로 가게 되었어요. 같은 국가를 다시 간 게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어요?

오중빈 그곳에서는 겨울마다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열어요. 호텔에서 초청해주면 특별 공연으로 전통 춤을 추고 오거든요. 그 당시에는 아이들과 새롭게 핸드벨과 캐롤을 연습했어요. 그리고 호텔에서 그 공연을 하게 됐죠. 반응이 무척 좋아서 그 후에 원장님이 다시 와달라고 연락을 주시기도 했어요. 저와 동갑인 친구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음악적 재능이 무척 뛰어났어요. 각자 개인 후원자가 있어서 키보드, 기타 같은 악기를 사주시기도 했죠. 그렇게 아이들이 밴드를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드럼 세트도 샀고요. 고아원에 방을 하나 만들어서 밴드 연습실도 마련했죠. 지금은 방학마다 우붓에 가고 있어요. 저도 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반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전해요. 학교에서 연극을 배우면, 연극을 알려주면서요.

오소희 그런데 아이들이 2차 가공생산물을 정말 잘 만들어요. 나중에 그걸로 또 공연을 하고요. 음악으로 교육적, 문화적 선순환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지금 우리의 세계여행은 멈춰진 상태예요. 가족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생겼으니 그곳에 계속 찾아가는 거죠. 

마지막으로 여행하면서 무수히 많은 인연을 만들었을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요?

오중빈 브라질에 갔을 때, 독특한 호텔이 있었어요. ‘미로’라는 호텔이에요. 들어가면 진짜로 미로인 곳이었죠. 이 호텔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영국에서 오신 ‘밥’ 할아버지였어요. 브라질리언 아내와 결혼하고 정착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랑 정말 잘 놀아주셨어요. 열 살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요, 최근에도 SNS를 통해서 연락이 닿았어요. 

오소희 특이한 분이었어요. 괴짜였고 영리했죠. 예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 영화의 스태프이기도 했대요. 할아버지와 열 살짜리 아이가 똑같은 눈높이로 농담 따먹는 게 흔한 장면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랑 친구가 된 거죠.

작가님은요?

오소희 저는 ‘히로’가 기억에 남아요. 볼리비아에서 버스 파업 때문에 이동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라파즈에서 오래 머물게 되었죠. 뭐라도 해볼 게 있을까 하던 중에 중빈이가 ‘차랑고*’를 배우고 싶다고 한 거예요. 그때 차랑고 선생님으로 히로를 만났죠. 히로는 대학 졸업 후 1년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편도 티켓만 끊고 볼리비아로 와서 유명한 가수가 됐대요. 그런데 가수만으로 먹고살기 힘드니까 악기점도 같이 한 거죠. 아이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동안 나무라지 않고 ‘음악은 네가 잘하고 싶어하고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90퍼센트를 차지한다.’라고 말해주었어요. 그런 태도로 계속해서 아이를 이끌어주니까 부족한 부분이 잘 보완됐어요. 둘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순간이 기억나요. 아마 히로도 동양인 아이와 맺은 우정이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 같아요. 그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집에 왔어요. 부모님과 함께요. 우리 집에서 둘러앉아 연주해주고 노래도 불러주었죠. 

*차랑고 안데스 지방에서 연주되는 5개의 현으로 이루어진 류트 계열의 현악기, 출처 두산백과

엄마 내공
오소희ㅣ북하우스
《엄마 내공》은 오소희 작가가 기나 긴 여행길을 통해 느끼고, 만나고, 보고, 나눈 이야기를 엄마들에게 전하는 내용이다. 엄마들 각자가 품고 있는 무거운 고민에 새로운 방향을 함께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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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Hae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