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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따듯한 서울의 색들
《색이름 352》
서울이란 단어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삭막한 도시다. 빌딩풍이 스산하게 불고, 제 할 일들을 하느라 주변엔 관심을 두지 않는 풍경. 어떻게든 좀더 따듯하고 다정한 서울이 보고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오이뮤를 발견했다. 서울을 기반으로 2015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활동을 이어왔다. 잊혀 가는 문화적 가치를 재해석한다는 이들의 소개를 곱씹으며 오이뮤라면 서울에서도 온기를 단번에 찾아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오이뮤에서 출간한 《색이름 352》를 떠올리며 서울에 색 입히는 작업을 부탁하면 어떨까 싶었다. 혹여나 억지스러워질까 싶어 온기를 담고 싶다는 요청은 생략했는데, 서울의 따듯한 색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Color. 1
연분홍에 노란색이 더해진 색
요즘 저녁때만 되면 SNS 피드를 뜨겁게 달구는, 분홍빛으로 물든 서울 하늘의 사진들을 보면 하던 일을 덮고 당장이라도 한강 둔치에 앉아 해 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현실은 매일 있다시피 한 업무 마감 때문에 사무실을 벗어나기 어렵다. 결국 한 번도 충동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지만 사무실 창밖으로도 노을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하다. 마주 서 있는 건물의 창문이 서로 빛을 튕겨내며 퍼지는 분홍빛도, 주홍빛도, 보랏빛도 아닌 오묘하게 공기를 물들이는 훈색은 잠시나마 구름 속을 걷는 꿈같은 상상을 하게 한다.
Color. 2
적갈색을 띤 고무로 만든 대야의 색
골목을 걷다 보면 심심찮게 고무대야에 심긴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 고추 등 각종 작물들이 보인다. 아름다운 일상품을 좋아하는 터라 어떤 기물도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기에, 내가 만약 오이를 기를 화분을 고른다면 둥근 곡선을 가진 담백한 백색 도자기 화분이나 세필로 섬세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화분을 고를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걸음을 옮긴 방향에 또다시 고무대야에 심긴 방울토마토가 있다. 보석처럼 탐스럽게 열린 방울토마토를 품고 있는 고무대야는 어떤 멋진 화분보다도 단단하고 안정감 있어 보였다. 도심에서 생활밀착형 작은 농사를 짓기에 고무대야는 드넓은 광야 못지않은 대지를 품고 있었다.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크기가 넉넉지 못한 아름다운 화분에 오이의 뿌리가 채 못 자라는 일이 없도록, 나도 언젠가는 넉넉한 고무대야에 토마토랑 오이랑 완두콩을 심어야지. 그들이 마음껏 뿌리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매일 고무대야 화분을 보살펴야지.
Color. 3
우아한 청색을 띤 달개비의 꽃잎색
색이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산으로, 바다로, 시장으로 나서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로 색이름을 찾는 작업을 했다. 빨강계나 노랑계, 초록계 등은 어렵지 않게 많은 대상을 찾을 수 있었지만 자연물에서 파랑계 색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찰나 길가에 핀 파랗고 작은 들꽃을 발견했다. 이름은 달개비꽃. 닭장에서도 잘 자라는 들풀이라 하여 ‘닭의장풀’이라고도 불리는 꽃이었다.
채소나 과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선명한 파란 꽃잎 사이로 샛노란 수술이 앙증맞고 귀엽다. 박완서 선생님의 저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서울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쫙 깔린달개비꽃의 남색이 얼마나 영롱하다는 걸. 그리고 달개비 이파리에는 얼마나 고운 소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달개비 이파리의 도톰하고 반질반질한 잎살을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긁어내면 노방보다도 얇고 섬세한 잎맥만 남았다. 그 잎맥을 입술에서 떨게하면 소리가 나는데, 나는 겨우 소리만 냈지만 구슬픈 곡조를 붙일 줄 아는 애도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서울애들은 모를 거라는 영롱한 달개비꽃을 나는 안다. 달개비꽃을 발견한 이후로는 도심 곳곳에 피어 있는 달개비꽃이 눈에 들어온다. 버려진 판자 옆에도 피어 있고, 우체통 아래에도 피어 있다. 작고 파랗게 있다.
Color. 4
진한 자주를 띤 붓꽃의 꽃잎색
어느 주말엔 덕수궁 안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예약한 관람 시간이 남아 덕수궁을 산책하던 중 보라색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우아하게 곡선을 이루는 이파리와 힘 있게 서 있는 꽃대 끝에는 짙은 보라색 꽃잎이 바람에 따라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확히 이름을 아는 이 꽃은 붓꽃이다. 붓꽃은 꽃봉오리가 먹을 묻힌 붓 모양이어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 들은 적이 있다. 과연 궁궐에 피어 있어 마땅한 꽃이 아닐 수가 없다. 작은 정자에 올라가 앉으니 맞은편에 피어 있는 붓꽃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가까이서 볼 때와는 다르게 보라색 별천지 같았다. 그 모습이 예뻐서 한참이고 붓꽃의 움직임을 보다 보니 예약한 관람 시간이 되었다. 나는 걸을 때마다 소리를 내며 흩날리는 한복 자락을 상상하며 평소보다 힘 있는 걸음걸이로 미술관이 있는 석조전으로 향했다.
Color. 5
탁한 노랑을 띤 익은 모과의 색
어릴 때는 서울에서도 모과나무를 흔히 본 것 같은데, 최근에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기억에는 가을이 되면 노랗고 울퉁불퉁한 모과 열매가 튼실하게 열렸고, 나무 아래 가만히 서 있으면 바람에 실려 온 모과 향을 맡을 수도 있었다. 아빠는 종종 자동차 문짝 아래 수납공간에 모과 열매 세 개를 넣고 다녔다. 은은하고 달큰한 모과 향을 따라잡을 방향제가 없었다. 모과라는 것을 잊고 산 지 20년은 족히 넘었을까? 어느 날 남성시장 과일가게에서 우연히 모과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모과 세 알을 사서 책상 위에 두어 보기도 하고, 아빠가 그러했듯 자동차 문짝 아래 수납공간에도 놓아보았다. 어릴 때처럼 편견 없이 모과를 즐기게 될 줄 알았는데, 행여나 모과가 썩어서 벌레가 생기면 어떻게 할지, 차를 더럽히면 어떻게 할지, 나중에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시장에서 모과를 보고 반갑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걱정이 더 많이 쌓여버렸다. 처리가 곤란해질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모과가 물러지기 전에 잘라서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어 처리했다. 꿀에 절인 모과를 넣어 차로 만들어 마신 기억도 있는데, 모과 청을 담글 여유가 없기도 했고 귀찮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 기분이 썩 유쾌하지 못했다. 울퉁불퉁한 모과의 모양처럼 걱정만 많은 어른이 되었구나. 서울에서 모과나무를 찾기 힘들어진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 언어에는 ‘누렇다’, ‘불그스레하다’, ‘희끄무레하다’, ‘거무튀튀하다’ 같은 색 형용사가 풍부하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색과 다양한 색채어가 있지만, 우리가 표현하는 색이름은 대체로 단편적이다. 오이뮤는 1991년 발행된 《우리말 색이름 사전》을 재해석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자연물의 이름과 구체적인 색깔을 우리말로 정의하는 책 《색이름 352》를 엮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질문에 답해 보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가요?”
에디터 이주연
글·사진 오이뮤OIMU 신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