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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싫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곳에 살고 있나요?” 나는 종종 나에게 묻는다.
삶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선택을 할 때 ‘더 좋은 것’을 선택하려고 하는 편이다. A가 싫어서 B를 선택한다기보다 B가 더 좋아서 혹은 B가 더 궁금해서 가는 사람. 중요한 선택을 몇 번 경험한 뒤에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아니고, 실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선택한다.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10년 전쯤 회사 일이 힘들어 퇴사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일이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조직장이 나를 괴롭혔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보다 스무 살 정도 나이 많은 친구가 내 하소연을 듣다가 툭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힘들 때 그만두면, 힘들 때마다 포기하는 게 ‘습(습관)’이 되더라. 회사를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회사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생겨서 그만둔다면 그건 너만의 좋은 습이 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습인 것 같더라.” 퇴사를 고민하던 내게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건넸고,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고쳐 들었다. 하지만 이 조언은 이야기 그대로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 잡고 나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회사를 그만두지 않기로 했다. 대신 팀을 옮겼고, 상황은 아주 많이 나아졌다. 시간이 지났고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일이 재밌고,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그리고 이 상태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즐겁게 회사를 다닐 것 같다는 마음이 들던 시기에 나는 퇴사했다. 그때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며칠 안 되는 연차 휴가로는 꿈꿀 수조차 없는 긴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일이란 걸 시작하고 나서 언제나 조금만 힘들면 ‘아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지만, 나는 그때 울며 그만두지 않고 지금 웃으며 그만두었다. 그리고 도피한 것이 아니고, 현실이 버거워서 떠난 것이 아니고,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내 여행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 최초의 좋은 습으로 남았다.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좋게 만든 후,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습관.
장기 여행에서 돌아온 뒤 제주도로 이사했다. 8년 전의 일이다. 서울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제주도가 좋았다. 일할 곳만 있다면 어디서든 살 수 있다. 좋은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가벼운 마음으로 제주에 있는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나는 떨어졌고 반려자는 합격했다. 그리고 우리는 제주도로 이사 왔다. 본격적으로 글 쓰는 일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덕분에 제주도에서 태어나 줄곧 살던 사람들부터 다른 지역에 살다가 제주도로 이주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을 만나면 나는 종종 “왜 제주에 내려오시게 된 거예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내심 드라마틱한 사연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일 때문에 내려왔다가 제주도가 좋아서 더 머물기로 했어요.”, “그냥 잠깐 지내러 왔는데 길어졌네요.”와 같이 대답했다. 비장한 각오같은 건 없었다. 모든 걸 버리고 제주로 내려왔다거나, 뜻한 바가 있어 제주도에 뼈를 묻을 각오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제주도가 좋아서, 혹은 큰 결심 없이 일 때문에 제주도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주에서 잘 지냈다. 반면에 원래 살던 곳에서 적응하지 못해 도망치듯 제주도에 온 사람들은 대체로 제주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비장해질수록 결단은 어렵다. 제주도로 이사를 한 사람들은 대부분 용감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삶의 변화를 비장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왜 제주에 내려오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왜 제주에 와서 사느냐.”는 질문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 그보다 더 자주 받는 질문은 “그래서 제주에 살아 좋냐.”는 것과, “언제까지 제주에서 살 것 같은가.” 하는 질문들이다. 제주에 살아서 좋다. 정말 좋다. 어제도 좋았고, 오늘도 좋았다. 평생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말한다. 음, 하지만 제주에 그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제주가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백하자면, 요즘 나는 종종 부동산 사이트를 열어두고 서울 집값을 알아본다. 서울 근교가 아닌 서울 시내. 기왕이면 서울 시내 중에 사대문 안을 살펴본다. 집값을 알아보고 로드뷰로 근처 환경까지 둘러본다. 내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적당한 집을 고른 뒤 지하철역부터 집까지 걸어보고 근처 골목까지 다녀본다. 한참 걸어보다 인터넷 창을 닫고 나온다. 언젠가 서울에 살아보고 싶다.
나에게 서울에 산다는 것은 걷는 것이다. 걸어서 경복궁 같은 궁궐 정원을 산책하고, 한자리에 오래 있는 소박한 백반집에서 식사를 하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천천히 밤거리를 걷는 것. 동네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양손 무겁게 걷다가 거리의 빵집에서 오늘 먹을 빵을 사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 동네 산책하듯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 걸어서 동물병원에 갈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길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나는 가끔 완벽한 타인이 되어 서울을 자유롭게 걷는 상상을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주에 산다는 것은 어떤 걸까. 여름이면 해변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오름을 오르고, 노을이 아름다운 날엔 서쪽을 향해 달리고, 그러다 만난 바다가 보이는 유명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걸까. 흑돼지를 먹을까, 회를 먹을까 고민하는 걸까. 그런 날도 있지만, 그건 제주를 여행한다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제주에 산다는 것은, 작은 시골 마을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이 마을을 벗어나려면 꼭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카페는 한 곳뿐인데, 거리는 가깝지만 사실상 걷기 좋은 길은 아니어서 한 번도 걸어가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거리에 가로등이 없어서 해가 지면 혼자 산책하기 어렵다. 합리적인 가격의 소박한 백반집은 찾기 어렵다. 영화를 보려고 해도, 극장까지 가려면 한참 차를 타고 가야 고 그나마 볼만한 영화는 제주에선 거의 개봉하지 않는다. 간혹 개봉하더라도 일주일 정도 극장에 걸려 다 금방 내려간다. 아무튼 걸어서 무언가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는 넓지만 좁아 어딜 가나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제주에선 오후 휴가만 내도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고, 사계절을 그 어느 곳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여름 저녁 선명한 노을을 보면 1년 치 피로가 가시는 것도 같다.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빈부의 차이가 서울만큼 크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고민이 덜하다. 사계절 내내 농작물이 자라고 인력은 언제나 부족하며 노동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내 몸만 건강하다면, 나이가 많이 들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런 제주를 나는 좋아한다.
이다음에 어디에 살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곳이 바라던 서울일 수도 있고, 다른 지역일 수도 있고, 혹은 생각지도 못한 외국의 도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내내 제주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지금 제주가 좋고 종종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다행이다.
에디터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