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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 밤코

글과 그림이 넘실대는 그의 그림책이 좋다. 누운 벼를 그리면서 글자도 같이 누이고 마는 재치와 해학에 감탄한다. 촘촘한 상황을 느슨하게 풀려면 얼마나 유연해야 할까. 궁금증을 안고 이곳에 왔다. 세 개의 말간 얼굴 사이를 만화책과 그림책, 낡거나 빛바랜 조형물, 내키는 대로 그려놓은 흔적들이 에워싸고 있다. 가족은 좋아하는 것을 힘껏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더 잘하려 애쓰며 서로를 비추고 산다.

넘실대는 그림과

흔들리는 글자

반가워요. 이곳에서 작가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네요.

맞아요. 집에서 작업하고 아이 돌보고 밥도 먹어요. 일과 육아가 다 얽혀 있는 공간이에요. 주방 옆 책상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소파 앞 거실 책상에서는 그림을 그려요. 저희 가족은 거실 책상에서 일과의 대부분을 보내요. 그림을 그리다 밥때 되면 치우고 밥을 먹거나 게임도 하거든요. 저희 가족이 워낙 붙어 지내는 걸 좋아하니까 공간을 분리해도 큰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저희는 티브이 새 대를 두고 같은 공간에서 취향대로 영화를 봐요. 소음이 좀 있더라도 이게 더 좋다고 느껴요. 어떤 집에 가도 이런 형태의 삶을 살 거 같아요.

 

‘밤코’라는 필명이 작가님과 정말 잘 어울려요. 누가 지어준 거예요?

지저분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제가 비염이 심해요. 킁킁댄다고 언니들이 늘 놀렸어요. 그게 콤플렉스였는데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밤처럼 귀여운 코인데 왜 슬퍼하냐고.” 남편이 지어준 애칭이에요. 제 본명은 김은선인데 워낙 평범해서 제 성격이나 작업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예전 더미북에는 본명을 썼는데 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잘 기억해 주는 거 같아요.

 

거실에 책과 작품, 이것저것 물건이 많은 편이에요. 오래되고 버려진 물건을 좋아하는 편이죠?

남편과 제가 워낙 만화책을 좋아해요. 그림책도 많고 제가 주워온 것들이 수두룩해요(웃음). 버려진 것 중에 제 눈에 예뻐 보이는 것들을 가져와요. 오래된 것의 색감을 좋아하거든요. 완전한 블랙, 갈색, 노랑이 아니잖아요. 검은색인데 한쪽은 갈색, 노란색인데 노리끼리하고 누리끼리한 색, 그 안에 많은 색이 들어 있는 게 예쁘더라고요. 매끈한 것보다 거칠고 오래된 질감을 좋아하고요. 그것들을 모아서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게 취미예요. 책장 구석에 있는 인형이랑 거실의 오래된 액자 틀 같은 거예요. 대학원 때 친구와 옥상이 있는 집에서 작업실 겸 산 적이 있는데, 둘이 쓰레기를 너무 모아서 이사 나갈 때 1톤 트럭으로 두 번을 버린 기억이 있어요(웃음).

 

최근에 주운 물건은 뭐예요?

배드민턴 공 세 개를 주워 왔어요.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 농구를 하러 가는데 윤우랑 제가 따라나서서 체육관 2층 관람석에서 잘 놀아요. 거기에 버려진 셔틀콕이 많더라고요. 세 개 주워 와서 동그란 여백에 표정을 그려 넣었어요. 얼마 전에는 날지를 못해서 도로를 뛰어다니는 새를 집에 데려오기도 했어요. 너무 안쓰러워서 ‘얘를 어떡하지?’ 지켜보니 화단 틈에 들어가서 안 나오더라고요. 보통 못 나는 새는 고양이가 먹는다고 알고 있어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집으로 데려와 상자에 뒀다가 답답해 보여서 베란다에 풀어줬어요. 그러다 1시간 정도 지났나? 똥을 엄청나게 싸고 죽었어요. 생각보다 충격이 컸어요. 그때 남편과 얘기했어요. 자연에 살던 애들을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함부로 데려오는 건 아니구나.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물에 애정이 많은 편인가 봐요. 집에서 물고기와 거북이도 키우시고요.

저희 부부가 동물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요. 얼마 전에는 아파트 1층에 어른 고양이가 보였어요. 근데 며칠을 한자리에 있더라고요. 어른 고양이가 며칠씩 있을 리 없거든요. 밥을 주면서 유심히 보니, 뒤에 아기 고양이가 보였어요. 아기를 지키려고 늘 그 자리에 있던 거예요. 참치 캔을 주다가 건식 사료를 날마다 줬는데 잘 못 먹더라고요.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고 살펴보니 구내염이 심해져서 밥을 못 먹는 거였어요. 치료해주고 싶어서 동물병원에 고양이의 상황을 여쭤봤더니 수유 중이라 항생제 처방을 해줄 수 없대요. 사람이랑 정말 똑같지 않아요? 엄마의 삶이 얼마나 애달픈가, 생각했어요. 돌아다니지도 않고 애를 지키는데 몸은 너무 아프고, 사료는 못 먹고.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어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너무 궁금해요. 그즈음 키우는 물고기가 새끼를 낳고 3일 만에 죽은 일도 있어요. 아… 여자의 삶이란! 아이를 낳는 건 기쁨이기도 한데 나를 깎는 희생인 건 사람도 동물도 같잖아요.

이야기가 많은 집이네요. 그림책의 소재도 겪은 일에서 시작하는 편인가요? 그림책마다 소개에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던데요.

맞아요. 저는 제 이야기에서 출발해요. 《사랑은 123》은 아이를 낳으면서 쌓은 이야기라서 아이와 남편에 대한 소개를 썼고, 《근데 그 얘기 들었어?》는 남편이 소재를 줬기에 그에 관한 이야기, 《모모모모모》는 부모님에게 소재를 얻어서 부모님 소개까지 썼어요. 세 책 모두 가족, 관계에서 출발한 이야기예요. 《모모모모모》는 논픽션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가족의 이야기예요. 아빠를 위해서 쓴 책인데 내용에는 그걸 담지는 않았어요. 누군가는 알아봐 주면 좋겠어서 책의 소개 글에 넌지시 썼죠. 책을 읽고 소개 글을 보니 더 좋았다는 후기를 보면 참 기뻐요.

 

저도 《모모모모모》 소개글을 읽고 이 책이 주는 메시지가 결코 단순하지 않구나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네 자녀를 기르셨다고요.

네. 전라남도 담양이 제 고향이에요. 부모님은 그곳에서 쌀농사를 지으셨어요. 몇 년 전 고향에 내려왔는데 귀농을 해서 고급 주택을 잘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생겼더라고요. ‘시골에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어요. 그들은 농사지으려고 왔다기보다 자연을 만끽하러 온 거잖아요. 잘못된 건 아니지만 나의 시골은 저 모습이 아닌데, 싶어서 서글프더라고요. 아빠가 농사짓던 그 땅이 도시의 땅이 되어버린 거 같아 슬펐어요. 아빠가 땅을 임대하고 1년에 200만 원을 받았대요. 근데 쌀농사 해도 1년에 200만 원 번다는 거예요. 노동없이 얻는 돈과 땀 흘려서 버는 돈이 같다는 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농사는 정말 중요한 일이고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시장 경제에서는 그 노고와 가치를 몰라줘요. 그렇다면 아빠가 해온 일의 가치를 딸인 내가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아빠를 생각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써 내려간 책이에요.

 

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지만, 다른 건 다 지우자고 생각했어요. 내가 최초에 목격한 땅에는 쌀이 있었지, 거기에서 시작해 보자, 하면서 하얀 종이에 ‘모모모모모’를 적어봤어요. 다음 장면으로 모내기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그 과정을 몸으로 겪은 거니까 지식이 아닌 삶으로 접근하는 거죠. 근데 ‘모내기’라고 쓰면 재미없잖아요. 머리로 구상하고 뒤집어 보면서 완성했어요. 내 얘기를 담고 싶은 마음도 깨알처럼 넣었어요. 오리 넷에 오리 아빠, 잠자리 다섯 마리, 참새 아빠와 참새 네 마리, 이렇게요.

 

글을 먼저 쓰고 그림을 그렸어요?

글이 먼저 왔어요. 그다음 머리로 그려봐요.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머리로 페이지를 계속 그려요. ‘아 이거다. 내 안에서 정리가 된 거 같아.’ 하면 더미북에 쓱쓱쓱쓱 그리는 편이에요. 그때부터는 글과 그림 왔다 갔다 하면서 작업해요. 제가 글 작가는 아니라서 완벽하게 글을 잘 써낼 순 없어요. 완벽한 글을 쓸 수 없으면 재미있는 걸 해보려고 해요. 재미를 발견하는 게 저한테 있는 가장 큰 장점이거든요. ‘이게 뭐야? 이런 게 있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지점을 보여주고 싶어요. 보는 사람에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되면 좋겠어요.

 

모모모모모》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궁금해요.

벼가 누워서 “뚀뚀뚀뚀뚀” 되는 장면이요. “벼벼벼벼벼”를 쓰고 그렸는데 이맘때쯤 꼭 태풍이 오거든요. 바람이 휙 불면서 벼가 누워요. 그럼 벼라는 글씨도 같이 눕겠네? 하고 눕혀보니 “뚀뚀뚀뚀뚀”가 되더라고요. 글이 이 상황이랑 잘 맞고 그림이랑 딱 붙은 거예요. 이럴 때 엄청난 쾌감을 느껴요. ‘아, 나란 녀석 천재구나.’ 하면서요(웃음). 이 장면에서 농부 아저씨의 표정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해요. 아저씨는 노동에 빠져 있느라 계속 눈동자가 없었어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여기서 아저씨 눈동자가 생기고 벼가 눕고 글씨도 눕는 거죠.

©《모모모모모》

제 아이도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글씨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소리도 재미있으니까 제가 읽어줘도 꼭 따라 읽어봐요. 작가님은 상황에 맞는 단어를 선택하고 글자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한 편 같아요.

시골에서 자라서 그림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글이 이미지로 읽혔어요. 한글도 그림이잖아요. 이미지를 다르게 보는 건 제 안에서 타고난 부분인가 봐요. 언어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이미지를 좋아했어요. 제 성격도 직관적인 편인데요, 더미를 만들 때도 이렇게 늘려볼까 저렇게 파고들어 볼까 고민하지 않으려 해요.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고 만든 책이 저한텐 만족도가 더 높았어요. 깊게 파고들면서 작업하는 책도 있는데 2년째 고민하고 있어요. 그건 그거대로 오래 고민하고 제가 쉽게 잘할 수 있는 부분은 밀고 나가는 거죠. 그렇게 하다 보면 못하는 것도 잘하게 되겠죠?

 

유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 같아요. 책을 보고 유쾌한 성격일 거라 상상했어요.

맞아요. 저는 좀 웃기는 사람이에요. 근데 낯을 많이 가려요. 새로운 사람을 못 대할 정도로 낯을 가리던 때도 있었어요. 친구들이 “나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웃긴데 왜 사람들은 잘 모를까?” 하면서 안타까워했어요.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이랑 정말 친했어요.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애들이 손뼉 치고 좋아했어요. 근데 교실 문을 딱 여는 순간 싹 바뀌는 아이였어요. 밝고 웃긴데 어떤 면은 안으로 숨는 복잡한 성격이에요. 낯가리는 성격은 아이 낳고 많이 나아졌어요.

 

밝고 재미있는 모습을 그림책 안에서 많이 풀고 있는 거네요.

그래서 저는 직업 만족도가 만 퍼센트예요. 게임디자이너인 남편이 부러워해요. 회사 다니면서 그림 그리니까 이 행복을 잘 몰라요(웃음).

 

《모모모모모》는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한 《사랑은 123》, 《근데 그 얘기 들었어?》와는 표현 방식이 달라 보여요.

두 책은 그림책 이론서로 공부해 독학으로 만들었어요. 남편이 혼자 가정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돈을 주고 그림책을 배우진 못했거든요. 혼자 작업하니까 잘 가는 게 맞나 답답했는데 다행히 첫 책이 계약되었어요. 그 책이 주는 돈을 더 값지게 써보고 싶어서 계약금으로 그림책 만들기 수업을 받았어요. 많은 기관 중에 저에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그림책 향’을 선택했어요. 《모모모모모》는 수업 때 진행한 과제물 중 하나였어요. 수업 스타일이 제가 생각하는 방식, 작업을 풀어가는 법과 잘 맞아서 출판까지 하고 좋은 인연이 되었어요.

 

간결하게 표현하는 게 더 어려울 거 같아요.

맞아요. 저는 콜라주 형식으로 작업하던 사람이라 덜어내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그림을 꽉꽉 채워 그리면 ‘나 열심히 했네? 아 뿌듯하다.’ 하는 만족감이 있어요. 하지만 덜어내는 그림은 열심히 그린 여러 그림 중에 딱 한 장 나오는 거예요. 엄청 많이 그리고 고민한 제 노력의 90퍼센트는 책 안에 안 들어가는 거죠. 쓱쓱 그린 거 같지만 그 한 장을 얻으려고 버려지는 게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버리는 게 많으니까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지?’ 방황하는 때가 와요. 지금 작업하는 더미도 덜어내고 가볍게 그리는 그림인데 더 애를 먹거든요. 

 

채우는 그림이 더 편한 거네요?

그렇지만 두 가지 작업 다 재미있어요. 저는 일로도 그림을 그리고 놀이로도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림책으로 덜어낸 그림을 그렸으면 놀이로 꽉꽉 채운 그림을 그리면 돼요. 누가 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쓰레기 주워가면서 뭘 그리고 만드니까요.

 

그림책 만드는 일만으로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텐데 취미로도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저는 이걸 해야 그림책을 그릴 수 있어요. 사람이 앉았다 일어나면 ‘끙’ 해야 하잖아요. 저한텐 ‘끙’이 놀이로 그리는 그림이에요. ‘차’가 그림책이고. ‘끙 차 끙 차’를 반복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림책은 제가 좋아하는 것만 고집할 순 없잖아요. 대중이 좋아할 만해야 하고 평가도 받아야만 하죠. 놀면서 그리는 그림은 제가 즐거워서 하기 때문에 너무 재미있어요. 그 에너지를 그림책 작업하는 데 가져오는 거예요. 서로 주고받으면 더 즐겁게 할 수 있어요. 이게 제 방식이에요. 가끔 취미로 그린 제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작품도 팔고요. 아이패드로 장난식으로 낙서도 하고 만화도 그려요. 일을 마치고 너무 피곤할 때도 그리고 싶은 게 있으면 꼭 그리고 자요. 머릿속에 있는데 꺼내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억이 안 나고 흐려지더라고요.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쉬운 편이었나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림 그리면 잘 그린다고 칭찬을 받으니까 ‘시골에서 내가 그림은 1등이야.’ 하고 뿌듯해했죠. 중학교 1학년 때는 ‘나의 성장 과정 그려보기’란 주제에 꽃으로 콜라주를 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가져도 되냐고 물으신 적도 있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림을 못 그리게 했어요. “가난하면 안 돼. 그림 그려서 어떻게 살 거야? 공부해야지.” 하면서 딸 넷을 시골 일 하나도 안 시키고 키우셨어요. 딸 넷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부모님의 강력한 목표였거든요. 언니들은 다 공부를 하는데 저는 안 해서 등짝 많이 맞고 자랐어요(웃음). 그래서 숨어서 그렸어요. 중학교 때부터 만화책 몰래 보고 수학 교재 펴놓고 그 위에서 그림 그리다 엄마 올 거 같으면 탁 덮었죠. 창문에 종이 대고 창문에 비치는 걸로 인물화도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서 풍경화도 그렸어요. 고등학교 때 짝사랑 하는 남자와 저를 주제로 만화를 그리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죠. 배우지 못했지만 항상 그림은 그렸어요.

 

부모님이 반대했는데 미술 대학은 어떻게 갔어요?

제가 너무 공부를 안 하니까 엄마가 나중에 제 입시를 포기하셨어요(웃음). 그런데 고3이 되니까 대학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1년을 미친 사람처럼 공부했어요. 엄마도 ‘얘는 자기가 원할 때 하는 아이구나.’ 깨달았대요. 원할 때는 앞뒤 보지 않고 정말 최선을 다하지만 누가 시키는 건 죽어도 안 되는 거예요. 미술로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입시 미술을 안 배워서 수능 성적만 보는 학교에 갔어요. 그때는 그림 잘 그리면 패션디자이너가 되는 줄 알고 섬유디자인과에 갔어요. 그런데 옷 만드는 건 재미없더라고요. 그래서 미대로 편입했어요. 편입은 3학년에서 시작해서 바로 실전, 작품을 만들어야 했죠. 재료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남편은 “네가 입시 미술을 안 해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하더라고요. ‘수채화는 이렇게 써, 연필은 이렇게 잡고 하는 거야.’같은 기본을 모르니 더 자유로울 수 있대요. 입시 미술은 안 배웠지만 혼자서 옛날 방석 잘라서 핀 만들고 이것저것 만들기는 많이 했죠. 그게 다 예술이라는 걸 스스로 배우고 터득했어요. 좋아하는 에너지를 어떻게 쓰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하고 싶은 건 뭐가 되었든 집요하게 하는 편이에요. 이것저것 좋아하는 걸 싹 모아서 그림책에 넣고 싶어요.

그림책을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은 건 언제예요?

저는 시골에서 자라 그림책을 많이 접하지 못했고 그림책 세대도 아니에요. 대학교 3학년 때 서점에서 《나는 기다립니다》라는 책을 우연히 봤어요. 너무 좋고 감동적인데 장르를 몰랐어요. ‘나는 만화도 좋아하고 영화도 그림도 좋아하는데 이 모든 게 여기 다 들어가 있네, 대단하다.’ 생각하면서 장르 미상으로 이 책을 샀어요. 마침 같은 해에 교수님이 안식년을 가지면서 일러스트레이터 선배님이 아트북 수업을 했어요. 그림책을 처음 만들어봤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때까지도 좋아하는 장르로 그림책을 보는 입장이었고 설치미술 작가가 꿈이었어요. 전시를 하면 사람을 만나고 내 작품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낯을 정말 많이 가려서 말문이 턱 막히더라고요. 성격상 너무 힘드니까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좋아하는 장르인 그림책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그즈음 결혼을 했고 육아를 시작했어요.

 

육아를 하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은 거예요?

네. 계속 그렸어요. 아이를 돌보면서도 내가 지금 일을 안 하는 상태, 경력 단절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항상 ‘그림을 그리는 사람, 뭔가를 할 사람’이라고 여겼죠. 그림으로 잘되고 싶은 열망이 강하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첫 책 나오기 전 더미가 두 권이 더 있어요. 떠오른 아이디어로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게 힘들었어요. 완결에 목표를 두자, 책 한 권을 완결해 보는 건 어떤 기쁨일까,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제가 마음에 들어야 남도 괜찮은 거잖아요. 그 두 권은 연습 더미예요. 세 번째 더미가 비로소 책으로 나왔어요.

 

그게 《사랑은 123》이죠?

맞아요. 두 책을 더미북으로 만들었을 때 정말 안 풀렸는데, 생각해 보니 내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런 거 같았어요. 물론 작가가 모두 자신의 얘기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조금은 느끼는 것이 있는 데서 출발할 때 잘 풀리더라고요. 이 책은 윤우가 숫자를 워낙 좋아해서 숫자로 이야기를 만들어볼까, 해서 시작되었어요. 숫자를 그려 보고 이미지를 형성해 보고 이야기를 끌어내 봤어요. 숫자와 영어가 닮았잖아요. 이런 방식은 윤우랑 항상 놀이하던 방식이에요. 이것저것 고민해 보다 맞아떨어지는 걸 재미있게 풀고 싶었어요.

 

책을 보고 ‘맞아, 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신기하고 신비해.’라는 생각을 다시금 했어요.

아이를 낳고 진짜 사랑을 알게 됐어요. 연애할 땐 남녀 간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사랑해도 줬으면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마련이더라고요. ‘이것 봐라? 내가 밥 샀는데 너는 커피 안 사니? 내가 설거지했는데 너 화장실 청소 안 하니?’ 그런데 아이에게는 달라요.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안 줘도 돼. 너는 아무것도 안 줘도 나는 너에게 100퍼센트 다 줄 수 있어.’ 그 마음을 느끼면서 ‘이게 진짜 사랑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남편과 아이, 저라는 가족이 더 단단해졌어요. 이 책에는 항상 떠 있는 별을 그려 넣었어요. 시골에 살면서 사계절 하늘 위에 항상 붙어 있는 별 북두칠성, 북극성, 카시오페이아를 보곤 했거든요. 우리 가족이 저에게 그런 존재예요. 이 책은 제 행복을 위해 만든 책이에요.

《근데 그 얘기 들었어?》의 아이디어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남편이 준 거라고요?

저는 말장난을 엄청 좋아해요. 말을 바꿔 말하는 걸 재미있어하거든요. 근데 남편은 제가 ‘아’라고 말해도 ‘엥’이라고 듣더라고요.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소문이 생기는 거야.” 거기서 이 책은 시작됐어요. 가볍게 출발해서 해주고 싶은 말과 재미를 같이 담았어요.

 

여섯 살 제 딸은 이 책을 “친구들이 말을 부풀려서 개미가 속상한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부풀리는 걸까 물으니까 “무서워서, 잘 모르니까 겁나는 거야.”라고 하던데요?

교훈을 주려고 만든 책은 아닌데 아이가 스스로 그런 걸 느끼는 게 신기해요. 소문에 대하여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라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요. 이 책에는 숨은 메시지가 몇 개 있어요.

 

저는 괴소문의 주인공이던 개미도 결국 다른 소문에 관심 갖는 걸 발견했어요. 음… 또 뭐가 있을까요?

그 부분 현실적이죠? 또 나머지 동물들은 그림자가 있는데 괴소문의 형체에는 그림자를 일부러 안 넣은 거? 가짜니까요. 마지막에 곰돌이만 새로운 소문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찾으셨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친구만 변화를 겪어요. 나머지 친구들은 머쓱해 하긴 하는데 변화가 없고, 진짜 사과하는 아이만 달라질 수 있는 거죠.

 

책 곳곳에 담긴 작가님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네요. 그림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림책을 너무 좋아해서 시작했고 평생 업으로 삼고 싶다고 해놓고선 깊게 생각하지 못했구나, 반성이 돼요. 그림책을 만들게 된 건 사실 먼 미래를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거, 내 책 하나 만들어보자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첫 책도 두 번째, 세 번째 그림책도 제 경험, 제가 애정하는 것에서 출발했어요. ‘혹시 너도 그러니? 너도 공감했다면 기뻐.’ 공감을 끌어내고 싶어요. 예술은 사실 사는 데 꼭 필요한 일은 아닐 수 있어요. 먹고사는 데 지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예술 없이는 인생이 풍요롭지 않잖아요.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니까요. 제 책을 통해서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걸 생각하거나 잠깐 멈춰서 다른 방향으로 볼 수 있는 틈을 주고 싶어요. 제가 만든 더미북 중에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있어요. ‘나를 통해서 네 생각을 찾아봐.’ 이게 제가 그림책에서 담고 싶은 궁극적인 메시지예요. 윤우도 늘 제 옆에서 그림을 그리거든요. 윤우도 엄마를 통해서 자기 생각을 찾아가는 거겠죠.

선한 마음은 좋은 이야기를 낳는다

윤우도 책을 만들어요?

윤우는 유튜브와 게임을 즐겨하는 요즘 아이예요. 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만드는 건 좋아해요. 저는 그게 더 멋진 거 같아요. 남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내 생각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저희 집에는 아이디어 박스가 두 개 있어요. 이건 제 박스고 옆에 건 윤우 박스예요. 제가 팝업북에 관심이 많아서 한글로 팝업북 더미를 만들고 “윤우야 엄마 이거 만들었어. 대단하지 않니?” 자랑해요. 그러면 윤우도 옆에서 숫자로 구성된 팝업북을 만들어요. 《사랑은 123》을 보고 《사랑은 1234》라는 팝업북을 만드는 식이죠. 하루는 어린이집에 갔더니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어머니 윤우 개명했나요? 자기 이름은 ‘소모’라고 하던데요?” 필명을 스스로 지어서 책에 적더라고요. 엄마가 생각하는 방식을 알려주지 않아도 배우나 봐요. 저도 윤우가 느끼는 방식을 이해하게 되고요.

 

윤우를 낳고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어요.

정말 많이 변했어요. 저는 예민한 편이라 내가 원하지 않는데 너무 가까이 오는 것들, 나에 대해 많이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 선을 두는 사람이었어요. 윤우 낳고 그 경계가 무너졌어요. 관대해졌어요. 인내하게 됐고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도움 주고 도움받고, 민폐 끼치고 민폐 받으며 사는 거더라고요. 예전의 저는 남에게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인간을 키워내면서 ‘아, 내가 먼저 부탁하면 저 사람도 나에게 부탁할 수 있는 건데, 내가 저 사람에게 부탁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구나.’ 하는 걸 알았어요. 아이도 사실 저에게 민폐 끼치며 사는 거잖아요. 다 이렇게 너저분하게 사는 거라는 걸 알았어요. 예민한 성향의 아이를 키우고 바라보고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법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를 알게 되었어요.

 

육아를 통해 진짜 나를 만난 건가요?

네. 나를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요. 육아서를 읽으며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성격인 걸 알았어요. 저는 제 어린 시절을 고증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아빠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엄마는 돌아가셨고 언니들도 다 어렸으니까요. 밥을 잘 먹었는지 똥을 잘 쌌는지, 나의 어린 시절을 얘기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더라고요. 어린 시절이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순간은 명확하게 떠올라요. 늦은 오후 5~6시 무렵에 울고 있는 제 모습이요. 어른이 돼서도 해가 지는 무렵에 공포감이 밀려왔어요. 부모님이 일 가셔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지,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윤우 재울 때도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많이 울었어요. 그러면서 사랑을 많이 받는 아이가 되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제가 윤우를 엄청 사랑하고 키우듯이 나의 어린 시절에도 사랑을 줘보자,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처럼 행동해보자, 했어요. 예민해서 힘들어하는 윤우를 안아줄 때는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아요. 물론 아이가 오래 울 때는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억누르기 위해 베란다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올 때도 있죠. 그래도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윤우가 많이 예민한 성향인가 봐요.

아기 때부터 잠을 정말 안 잤어요. 눕히면 깨고 눕히면 깼어요. 두 돌까지 배 위에서 재웠네요.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도 큰 편이에요. 촉감이나 후각 같은 감각이 모두 예민해서 반팔에서 긴 팔로 넘어갈 때 2시간을 울어요. 긴 팔에서 반팔 넘어갈 때 또 2시간을 울 거예요.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너무 예민하다고 선생님에게 전화가 오곤 했어요. 많은 아이를 돌보시는데 까다로운 아이라 힘드셨겠죠. 저는 제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윤우를 통해서 내가 이런 아이였겠지 추측해요. 남편은 전혀 예민한 성격이 아니거든요. 저는 예민했지만 시골집의 막내로 자라서 그 까다로움을 표현할 수 없고 예민하게 울어봐야 이해해 줄 사람 없는 상황에서 컸어요. 반면 윤우는 사랑받으며 청각, 미각, 시각, 감각적인 예민함을 다 드러내며 컸어요. 어린이집에서는 까다롭고 산만한 아이라 초등학교에 잘 적응할까 걱정하셨어요. 근데 저는 별로 걱정이 안 되더라고요. 예민한 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예민함은 섬세함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저와 남편은 그걸 받아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며 키우고 있어요. 윤우는 주변의 작은 변화를 금방 알아봐요. 엄마가 집을 조금 다르게 꾸민 날, 아빠가 새 옷을 입은 날, 조금 머리를 다듬고 온 날의 변화를 알아채고 멋지다고 얘기해 줘요. 까다로운 감각이 살아가는 데 도움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믿어요.

 

윤우가 초등학교 1학년이죠? 부모로서 교육이나 배움에 관한 생각이 깊어지는 시기인 거 같아요.

저는 ‘자신이 원하는 건 분명 생긴다’고 믿어요. 물론 방임은 안 되지만 엄마 아빠가 생활 속에서 보여주는 게 돈 주고 배우지 못하는 거라는 걸 알아요. 일할 때 항상 같이 다니고 전시도 함께 보러 가요. 엄마가 원하는 걸 스스로 찾는 과정을 윤우가 봤잖아요. “이거 해. 저거 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갈 거라는 걸 믿어요. 요즘 윤우는 마인크래프트를 너무 좋아해요. 온라인판 레고 같은 콘텐츠인데 아이가 너무 좋아하니까 가방 사주고 인형 사주고 게임도 같이해요. 저희는 아빠가 게임을 만들잖아요. “이건 게임이야, 안 돼.” 하지 않아요. 오래 해도 크게 걱정되지 않고요. 셋이 동시 접속해서 함께 해요. 윤우는 재킹이라고 마술하는 아저씨 영상도 좋아해요. 영감을 얻으면 “엄마 나 지금 착시 효과 만들 거야. 인형을 잡은 거처럼 해볼게. 사진을 찍어줘.” 하면서 구체적으로 요구해요. 윤우는 로봇이나 자동차에 관심이 없고 표현이 잘 안 되는 놀이, 종잡을 수 없는 걸 하고 놀아요. 스스로 만들어낸 놀이를 많이 해요. 요즘은 스톱 모션으로 애니메이션도 만들더라고요. 게임도 직접 만들고. 제가 봐도 잘하고 재미있어요.

가족이 정말 꼭 붙어서 생활하나 봐요.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윤우와 아빠는 엄마 바로 옆에서 놀고 있잖아요. 서로 꼭 닮은 팀 같아요. 일명 밤코팀?

(웃음). 저희 정말 친구 같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아이와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건 사실 남편의 역할이 커요. 저희는 백수일 때 결혼해서 시댁에서 같이 포트폴리오 만들고 월세가 싼 단칸방에서 생활했어요. 남편이 꾸준히 벌어주니까 제가 밥벌이를 못 하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 환경에서도 남편은 “너는 잘해. 너무 재밌어. 넌 잘할 거야.” 응원해 줬어요. 부모님이나 언니들은 “그게 되겠니? 아직도 노니?” 했을 때도 “너 그만해. 이제 일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물론 제가 회사에 맞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아서일 수도 있지만 혼자 짊어지는 게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예전에 남편이 쓰리잡까지 뛰다가 쓰러진 적이 있어요. 윤우를 한창 키울 때였는데 잠을 못 자고 일했거든요. 그런 모습을 아니까 제가 더 열심히 하게 돼요. 내가 이제 가정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남편 일 그만하게 해야 하는데, 싶어서 더 악착같이 했어요. 저희는 서로 많이 의지하고 동료애가 강해요. 제가 책도 나오고 잘되니까 남편이 너무 행복해해요. 그러면서 매일 “내 공 잊으면 안 돼. 내 지분 기억해.”라고 말하죠(웃음).

 

그런 응원을 받아서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라는 정체성이 확고해졌나봐요.

맞아요. 남편이 저를 더 키웠다고 생각해요. 저는 자존감이 정말 낮은 사람이어서 멋진 작가를 만나면 작아졌어요. 멋지게 작업하고 좋은 옷 입고 훌륭한 곳에 사는 사람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생각했거든요. 제 속을 뼛속까지 바꾸긴 힘들지만 남편 덕분에 많이 극복했어요. ‘너는 잘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거든요(웃음).이젠 윤우까지 두 명이 그 말을 해줄 거 같아요.윤우도 엄마 멋지다고 해요. 그래서 저라는 사람의 꽃이 활짝 피고 있어요. 제 첫 번째 가족에게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받진 못했지만 희생을 이해하는 걸 배웠어요. 내 새끼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열심히 노력하시고 희생하셨죠. 지금의 가족에게는 믿어주고 사랑하는 걸 배웠어요.

 

가족이 함께 붙어 지내면 일은 언제 해요?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낮에 일을 했는데 코로나19로 패턴이 많이 바뀌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은 온라인 수업을 하고 집에 대부분 있잖아요. 남편도 재택근무를 하고요. 낮 동안은 제가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남편은 집에서 일해요. 윤우가 잠들면 저는 그제야 일을 시작하죠. 윤우는 잘 안 자려고 하는 아이라 12시쯤 자는데요. 그때부터 새벽 5시까지 바짝 일을 해요. 윤우가 일어나면 남편이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저는 좀 늦게 일어나는 게 요즘 우리의 일과예요. 저는 아침에 집중도가 높은 편이라 아침에 일하고 밤에 잠들며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는데 지금은 모든 게 다 뒤집어졌죠. 그래도 의지로 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크게 낙담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해요. 이제 새벽 시간이 유일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에요. 지치고 피곤하지만 ‘짠 내’ 나는 상황에서 애쓰는 것도 나름대로 뿌듯해요.

요즘 관심 있는 건 뭐예요?

우리 그림책에 빠져 있어요. 그림책을 공부할 초기에는 외국 작가들의 그림책을 보고 많이 감탄했는데, 한국 작가들도 너무 다양하고 좋은 그림책이 많아요. 한글만 줄 수 있는 말맛이라든가, 한글의 리듬, 우리 정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많고요. 

 

앞으로 밤코 작가님의 책을 더 기대하게 될 거 같아요. 지금 준비 중인 그림책이 있나요?

세 권을 교차로 준비하고 있어요. 한 권은 걱정에 관한 이야기예요. 저는 곱슬머리인데 남편은 엄청난 직모예요. 머리카락이 옆으로 뻗친다고 걱정하는 걸 보면서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구나.” 하면서 써 내려간 이야기예요. ‘이렇게 걱정할 거면 차라리 머리카락을 없애면 어떨까?’ 하며 없애봤고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다.’ 하는 걸 알게 돼요. 머리카락이 소재인데 가족 관계 얘기로도 읽혀요.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이런 말을 했잖아요.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볼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요. 저도 가족이 많아서 그 마음 이해해요. 근데 많아도 걱정인데 없으면 쓸쓸하거든요. 일상의 풍경, 내 눈에 들어오는 지점에서 사소한 걸 캐치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요. 하나의 서사를 풀다 또 다른 메시지를 발견하는 걸 좋아해요. 그림책 안에 한 가지 생각만 넣지 않고 다른 시선을 담을 수 있는 여백을 두는 편이죠. 이 책은 물감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해 봤어요. 눈뜨면 스케치북 열어서 물감 찍고 수정하고를 반복하고 있어요. 그림책 향에서 나올 예정이에요.

 

다른 책은요?

미래엔 공모전에서 상 받은 책인데요. 요즘 사람들이 핸드폰만 보잖아요. 늑대들이 너무 쉽게 사냥할 수 있는 시대예요. 풍경을 안 보다가 잡아먹히는 사람, 운전하다가 핸드폰 해서 저세상 가는 사람 등 핸드폰만 보다 일어나는 스토리예요.

 

어떤 어른으로, 가족으로 살고 싶어요?

그림책을 만드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저는 무슨 일을 하든 선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 게다가 그림책은 어린이가 읽잖아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애쓰면서 저로 인해 주변이 즐겁고 재미있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작고 소외된 것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윤우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아이와 함께 아파트의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가끔 산책 중에 만난 고양이들을 챙기고, 어려운 나라의 친구를 후원하고, 집에 있는 작은 동물을 함께 살펴요. 윤우가 아직 큰 관심은 없어요. 하지만 꾸준히 함께하다 보면 알게 되리라 믿어요.

밤코 가족이 애정하는 두 권의 그림책

밤코’s pick

이상한 집

글·그림 스티븐 프라이어 | 시공주니어

“《이상한 집》은 순전히 표지에 끌려 구매한 책인데, 아이와 함께 하고 있는 마인크래프트와 이미지가 닮았더라고요. 우리는 계속 현대를 살아가고 있고 고전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작가가 동시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그림책에 묻어난 것 같아 너무 좋았죠. ‘와, 새롭다! 2020년의 그림책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이야기도 정말 유쾌해요. 식스센스급 반전도 기가 막히고요.”

윤우’s pick

에르베 튈레의 감성 놀이책 – 소리를 만들어봐
글·그림 에르베 튈레 | 루크북스

“윤우는 독서를 좋아하는 어린이는 아니어서 이야기를 읽는 방식의 책보다 책과 함께 소통하는 책들을 즐기죠. 그중에 에르베 튈레의 감성 놀이책은 각각 색이 다른 동그라미들에 다른 소리를 부여하고 동그라미를 누르며 아이가 직접 소리를 내는 형식이에요. 책 한 권을 보며 오감을 모두 쓰는 거예요.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책을 다 보고 아이만의 도형과 소리를 만들어 보고 리듬을 그리면서 생각을 확장해 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윤우에게 “이 책이 왜 좋아?”라고 물어보니 “재밌어서!”라고 말해요. 더 긴 말이 필요 없는 거겠죠?”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정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