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의 실패

Failure of POST-IT

포스트잇에 별다른 감정은 없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단지 포스트잇이 대표적인 실패의 산물이라서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뿐이다. 나는 아직도 실패가 무서운데, 처절히 실패한 두 사람의 인생을 담은 아름다운 영화 두 편을 보면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이달의 주제는 ‘문구’다. 대체 문구에 관한 책과 영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머리를 쥐어뜯었으나 찾아보니 꽤 많았다. 하지만 ‘문구’ 하면 바로 떠올릴 만한 책과 영화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할 테니까. 

더 머리를 쥐어뜯다 보니 갑자기 포스트잇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포스트잇의 실패’ 이야기다. 포스트잇도 문구 아닌가.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포스트잇’이 아니라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잡지사에 입사해 처음 쓴 기사는 실패에 관한 기사였다.애초에 나는 실패에도 의미가 있고 실패한다고 다 죽는 게 아니라는, 뭐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 걸 쓰고 싶던 이유는 나 자신이야말로 실패가 너무나 두려운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자료 조사를 해보니 세상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사례들이 있었는데, 그중 백미는 역시나 포스트잇이었다. 잘못 만든 접착제를 버리지 않고 메모지 뒷면에 붙였더니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문구가 되었다는, 그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 그때의 내게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실패가 성공으로 돌변하는 이야기. 결말에는 언제나 성공이 있는 이야기. 실패가 실패가 아닌 이야기.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실패에서 시작해 실패로 끝나는, 그저 실패이기만 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저 실패일 뿐인 이야기를 찾는다. 그런 이야기를 찾으면 어쩐지 실패가 덜 두려워질 것 같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 <에덴: 로스트 인 뮤직>(2014)을 얼마 전에 봤다. 재미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이, 꾹 참고 보다 보면 맨밥에서도 단맛이 나는 것처럼 담백하고 깔끔하고 깊은 맛이 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 영화는 한 청년의 젊은 날을 담고 있다. 테크노 음악의 시대에 개러지 음악(테크노의 한종류)에 푹 빠진 폴은 친구와 DJ 듀오를 결성한다. 초짜 DJ였던 그들은 점점 메인 스트림으로 진출해 나간다. 매일 밤 클럽에서 음악을 틀고,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떼창을 부른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좋고, 뭐든 잘 풀릴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건 폴 주변의 친구들도 다들 마찬가지다. 주머니는 가볍지만 꿈과 야심은 결코 가볍지 않다. 친구의 자취방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담배를 피우고 잡지를 읽고 꿈을 이야기하고 음악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만화를 그리고 눈이 맞은 상대와 연애를 하는 젊은 날.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간 1997년은 테크노와 레이브와 하우스와 일렉트로닉의 시대였다(그 넷의 차이가 정확히 뭔지 아직도잘 모르겠다). 친구와 나는 어느 날 홍대에 있는 무슨 클럽을 찾으러 갔다가 결국 찾지 못했는데,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느 건물 앞에 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자유로운 차림새에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그들 주위의 강력한 자기장. 우리는 그 사람들이 나온 건물의 지하로 들어갔다. 그곳이 클럽이었다. 진짜 클럽. 그게 시작이었다. 케미컬 브라더스, 팻보이 슬림, 나인 인치 네일스, 다프트 펑크,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 몬도 그로소, 프로디지. 우리 시대의 영웅들. 우리는 그 강렬함에, 그 어둠에, 그 차가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젊은이라면 어떤 것에든 열정을 쏟을 곳이 있어야 했는데, 운동권 시대가 거의 완전히 막을 내리고 대학에 입학한 우리에게는 딱히 열정을 쏟을 만한 데가 없었다. 공부라니, 공부에 열정을 쏟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밤마다 클럽에 갔다. 구질구질한 과거와의 연을 끊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그 기계적인 음악이, 그 무심한 몸짓이, 그 쿨한 열정이 필요했다. 그곳에는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나는 남몰래 그들을 부러워했다. 젊어서 무표정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남들에게 웃음을 팔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그러나 폴은 제대로 성공하기도 전에 실패의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한다. 일을 해도 돈은 벌리지 않고, 은행에서는 신용카드까지 중지시키고, 매번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야만 겨우 버틸 수 있다. 현실에서 달아나기 위해 그는 점점 더 마약에 빠져든다. 그는 도저히 이 삶을 견딜 수가 없다. 쓰레기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실패자가 된 자신을 어떻게 해야좋을지 알 수가 없다.

결국 폴은 빚을 갚기 위해 청춘을 바친 디제잉을 그만두고 술도, 마약도 끊는다. 그리고 회사에 취직해 일하면서 글쓰기 워크숍을 듣기 시작한다. 그의 집에는 시릴이 죽기 전 자화상을 그렸던 화이트보드가 하나 걸려 있다. 폴은 시릴의 자화상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커피, 주스, 바나나’라고 적는다. 이제 그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실패한 뒤의 가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사람이 되었다.

DJ가 되기를 꿈꾸었고 꿈을 이루었다가 마약에 빠지고 돈 문제에 시달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름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결국 빚더미에 오른 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는 인생. 이 영화는 사실 감독의 친오빠인 스벤 한센의 이야기다. 그는 심지어 여동생과 함께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돌이키는 것조차 힘들 부분을 남들에게 보여줄 용기를 내게 되는 걸까. 이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이유는, 그것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 모든 이들의 젊은 시절은 최소 몇 억 가지의 버전이 있겠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줄기는 대개 비슷하지 않을까. 실패, 아주 처참한 실패.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결말을 얻지는 못한다. 폴과 같은 시기에 데뷔한 다프트 펑크는 탁월했고, 그래서 그들은 지금껏 살아남았다. 하지만 폴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 DJ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성공한 만화가가 될 수도 있었을 폴의 친구 시릴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젊음의 무서움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폴과 그의 친구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무언가 엄청난것을 뚫고 지나온 느낌인데, 그것이 크게 자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무엇을 뚫고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청춘의 느낌이겠지. <에덴: 로스트 인 뮤직>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은 실패한 인생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뭐야, 이거 뭐야, 대체 뭐 하자는 거야, 하면서 보다 보면 어느새 푹 빠져드는 신기한 매력의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마츠코라는 여자의 일생을 담고 있다. 엉망진창,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가는 한 청년이 죽은 고모의 방을 정리해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는다. 집안과 연을 끊고 살던 고모의 집은 온갖 쓰레기와 낙서로 가득하고, 이웃은 고모가 미친 여자였다고 말한다. 청년은 문득 고모의 인생이 궁금해진다.

고모, 마츠코는 중학교 교사였다. 노래도 잘하고 인기도 많던 젊고 예쁜 교사. 하지만 수학여행 때의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츠코는 계속해서 이상한 선택을 해버린다.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려던 아이디어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고, 결국 마츠코 자신이 절도범이 되어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까지 나오는 신세가 된다.

사실 마츠코는 아픈 여동생만을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 어떻게든 아버지의 관심을 끌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어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표정, 눈을 치켜뜨고 가운데로 모은 뒤 입술을 뒤집는 괴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그 표정을 더는 좋아해주지 않자 마츠코는 당황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그 괴상한 표정을 지어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만다.

집을 나온 마츠코는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착취하고, 폭력을 가하고, 함부로 대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는다. 결국 마츠코는 먹고살기 위해 호스티스가 되었다가 버블 호황기가 막을 내리자 해고당하고, 지금껏 열심히 모은 돈을 갈취한 기둥서방을 죽인 죄로 감옥까지 가게 된다.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던 마츠코. 애인도 가족도 없는 외톨이 마츠코. 남자를 만나면 일까지 그만둬버리는 마츠코. 자신을 때리고 배신하는 남자들에게라도 사랑받고 싶던 마츠코. 맞아도 혼자인 것보다는 낫다는 마츠코.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말하는 마츠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상대를 옥죄는 마츠코. 이 사람과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마츠코. 혼자 있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지옥이라면 함께 있는 지옥을 택하려는 마츠코.

나만 잘하면 다 나를 사랑해주리라 믿었는데 그렇지 않은 이 상황을 마츠코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결국 상처받은 마츠코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끝없이 먹고 마시며 살이 찌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사람들과 말조차 섞지 않으며 매일 강가에 나가 앉아 우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마츠코가 다시 살아보려 할 때, 그런 마음이 겨우 들었을 때, 그의 일생은 어이없이 끝나버린다.

이 두 편의 영화를 실패에 대한 보고서로 읽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해서 실패했는지를,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실패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폴은 마약을 너무 많이 하고 너무 많이 도취한 상태로 지냈다.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을 살았다. 하지만 뭐, 다프트 펑크라고 달랐겠는가. 그저 폴의 재능과 운이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마츠코는 자기 안의 빈 곳을 타인이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랑에 자신을 던졌다. 그 사랑의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마츠코의 인생은 계속해서 꼬여갔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사려 깊은 감독들은 이 사람들의 인생을 한낱 실패담만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실패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기어이 찾아내고,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인간의 가치란 건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뭘 해줬냐는 거겠지.”


마츠코의 일생은 이 한마디로 수렴된다. 철저히 불행하던 그의 일생은 타인에게 끝없이 자신을 바치려는 일생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실패도 성공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일생일 뿐이었다. 폴의 젊은 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에 헌신하던 그 나날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셨는지. 비록 그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지만,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던 경험은 폴의 영혼에 어떤 리듬을 새겼을지. 

자, 이제 문구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자. 나는 스무 살부터 일기를 썼다. 테크노를 듣고, 클럽에 가고, 사랑받지 못하면서 사랑을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고, 거절당하고, 탈락하고, 상처받고, 울부짖던 그 시절에 나는 일기를 썼다. 어떤 일이 있었다, 무엇을 했다는 식의 일기가 아니라 일기를 쓰는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을 휘갈기듯 썼다.

요즘도 나는 일기를 쓴다. 더 이상 클럽에 가지도 않고 사랑받지 못할 대상을 사랑하지도 않고 상처받을 일은 그때의 백분의 일도 안 되지만, 그래도 나는 일기를 쓴다. 작은 노트에 좋아하는 펜으로 일기를 쓸 때, 지금 막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 휘갈길 때, 오로지 현재만을 생각할 때, 나는 영원히 젊은 기분이다. 대책 없고 대가를 따지지 않고 무모한, 실패 따위는 괘념치 않는, 그런 기분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나카시마 테츠야 | 코미디, 뮤지컬

<에덴: 로스트 인 뮤직>(2014) 미아 한센 러브 |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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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김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