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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하는 삶에 대하여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자신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도, 아무리 건강해도 각자 나름의 사연과 고충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이너프 포 라이프Enough for Life’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들은 이름에 담긴 묵직한 가치를 조용히 삶으로 전한다.
우리의
첫만남
십여 년 전 배낭여행으로 2박 3일 동안 치앙마이에 간 적이 있다. 짧은 일정이라 치앙마이를 제대로 느낄 수도 없었고, 기억에서도 금세 희미해졌다. 태국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나는 두 번째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치앙마이를 제대로 느껴보리라 다짐하며 태국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5박 6일의 일정을 짜느라 분주했다. 그러다 우연히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일본 영화 <수영장>의 촬영지가 치앙마이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 가보면 좋겠다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도해보았지만 영 찾기가 힘들었다.
지금에야 많이 알려진 장소지만, 3년 전 그때는 그곳에 다녀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검색어를 바꿔가며 계속 찾다가 드디어 한 블로그를 발견했다. 바로 ‘Enough for Life’라는 이름의 블로그였다.
블로그의 주인은 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두 아이와 함께 치앙마이에 살고 있는 ‘사과씨’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자였다. 태국인 남편을 만난 것도 신기하고 블로그에 담긴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내려갔다. 건축가인 남편이 가족을 위해 지은 집에서 사과씨는 채 소를 직접 길러 가족들을 위해 요리한다.
그녀는 집 앞에서 꽃을 따다가 잼을 만들고, 천사 같은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엄마를 돕는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 선물로 4백 개가 넘는 아이스크림을 차에 가득 싣고 보육원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준다. 그런 남편의 생일 선물을 기쁘게 받는 아내. 작은 일상을 담백하게 적어 내려간 이야기들이었는데도 무언가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상을 사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느덧 우리는 서로의 블로그를 통해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고, 언제가 될지 모를 만남을 약속했다. 시간이 지나 기다리던 치앙마이 여행이 다가왔고, 연락을 주고받던 사과씨와 남편, 그리고 두 사람을 쏙 닮은 귀여운 두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째 아이는 퍼피앙, 둘째 아이는 피앙퍼라는 귀여운 발음의 이름은 태국어로 ‘Enough for Life’라는 뜻이었다. 슬로건처럼 블로그에 적혀있던 문장은 사실 아이들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
‘퍼피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태국인들은 누구나 현재 태국의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 Bhumibol Adulyadej 왕의 연설을 떠올린다. 그가 즉위하고 반복적으로 설파했던 퍼피앙 정신은 ‘자족하는 삶’을 뜻하는 말이다. 자족하는 삶이라는 것은 태국의 종교와 문화, 기본 원리에 기초한 경제철학을 의미한다. 절제와 배려, 사회적 책무를 미덕으로 여기고, 삶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며, 지성과 인내심을 통해 진정으로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74년 12월 4일 연설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경제개발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태국 국민의 전 계층이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경제 기반이 강화된 이후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다음 단계의 경제개발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호랑이(경제 강국)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삶이란,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도울 수 있을 정도로 경제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마을과 지역이 소외됨 없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물러서서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드립니다. 절제와 평화를 우리의 목표로 세우고 함께 노력합시다. 태국은 지나치게 번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중용의 가치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다면, 태국은 위대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국가가 경제성장을 목표로 두고 더 잘사는 나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시기에 태국의 국왕은 뒤로 돌아가서 주변을 돌볼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모두 가난해지자’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국왕은 누구보다도 태국 사회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태국은 대표적인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경제개발에만 급급하다 보면 도시와 지방의 불균형이 나올 수밖에 없는 미래를 우려한 것이다. 개발에 앞서 다양한 산업을 개발하고 확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소외계층과 지방도시에서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만들어 경제적인 안정성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국왕이 강조한 포피앙 정신은 개인적인 삶의 만족이었다.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탐하거나, 지나친 사치와 낭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것을 강조했다.
“완벽한 자급자족은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마을 전체가 완벽한 자급자족을 해내려면 마치 석기시대로 돌아간 듯한 삶을 살지도 모릅니다. 자족하는 삶이란, 충분히 누리지만 지나치게 수준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사치와 낭비에 빠지지 않으며,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퍼피앙)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1998년 12월 4일, 푸미폰 아둔야뎃
사과씨 부부는 국왕이 전한 이 정신을 마음 깊이 새겼으리라. 그래서 아이들의 이름을 퍼피앙과 피앙퍼라고 지었고, 후에 태어난 셋째 아이에게 ‘Enough Good’이란 뜻의 퍼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구절에 담긴 묵직한 가치를 조용히 삶으로 전하기 위한 일이었다.
Enough For Life의 시작
치앙마이에서의 첫 만남이었지만 사과씨와 나는 취향이 비슷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낯을 많이 가리던 아이들도 헤어질 때 눈물을 터뜨릴 정도로 하루 사이에 정이 들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소품과 잼 같은 것을 만들어 치앙마이에서 작은 규모로 판매해볼까 고민을 하고 있었고, 추진력이 좋은 나는 아예 브랜드화하면 어떻겠냐며 외국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길로 방콕에 돌아가 Enough for Life의 로고를 만들어 그녀에게 보냈다. 플리마켓에서 소소하게 판매를 하는 정도로 생각했었던 것이 일이 커져 결국엔 Enough for Life라는 상표를 달고 홈메이드 잼과 패브릭 상품들, 도자기 제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치앙마이 시내에서 떨어진 람쁭사원Wat Rampoeng앞에 그녀의 친구가 아티스트 빌리지를 짓고 있으며, 그곳의 입주를 제안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완공되지 않은 사진을 보았을 뿐이었는데 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꾸미지 않은 외벽이 그대로 드러난 건물의 모습과 오래된 나무로 된 창문들이 한눈에도 무척 예쁜 공간이 될 것 같았다. 얼른 그곳에 입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했는데, 사실은 내가 치앙마이의 지리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곳에 입주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곳이 시내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안 찾아올 것이라며 우려를 많이 했었다고 했다.
드디어 몇 개월간의 준비 끝에 완공이 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반캉왓Ban Kangwat(사원 앞의 집)으로 지어졌다. 입구에서 잘 보이는 곳에 Enough for Life라는 간판이 달렸다. 그녀의 남편인 누짱Nujang은 오래된 창문을 이용해 솜씨 좋게 좌식테이블과 카운터를 만들었고, 그녀는 집에서 직접 만든 유기농 잼과 패브릭 제품, 그리고 수집해둔 작은 소품과 오래된 물건을 가게에 진열했다. 퍼피앙 가족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가게였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자카샵 2층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람빵Rampang에서 공수한 티크목Teak 가구들과 빈티지한 타일, 바스락거리는 이불, 지푸라기로 만든 슬리퍼 등 여느 호텔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교통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반캉왓 그 자체로 충분한 여행이 될 수 있었다. 아침에 게스트하우스 테라스 문을 열면 눈앞에 초록색 마을이 펼쳐지고, 법랑 도시락에 정성껏 준비한 아침 식사가 배달된다. 숙소 맞은 편엔 북 카페가, 오른쪽에는 60 바트짜리 태국식 소면인 카놈찐 가게가 있으며 마을 안쪽에는 작은 소품을 팔고 도자기를 굽는 가게들이 있다. 우려와 달리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약 2년의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주었고 좋아해주었다. 때때로 소박했던 그녀의 삶이 너무 피곤해진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가게를 하는 일이 너무 즐거워. 보물찾기하듯이 예쁜 물건을 발견하는 일도, 그것들을 선반에 진열하며 사람들을 기다리는 일도 행복해. 게스트하우스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라고 말하는 언니를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걸음
Enough for Life는 반캉왓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겨울 무렵부터 열심히 공사를 하던 것이 어느덧 완성 직전의 단계에 들어섰다. 뾰족한 세모 모양의 건물이다. 역시 1층은 자카샵, 2층은 게스트하우스로 꾸며졌다. 방 하나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 보니 예약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새로운 공간이 생겨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작은 공간이지만 건물 뒤편으로 수영장도 만들었다. 빽빽한 대나무 기둥과 2층 건물 사이에 위치해 개인 공간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게스트하우스의 왼쪽 건물에는 서울 망원동에 있는 ‘금붕어 식당’이 옮겨오기로 했다. 오너 셰프인 석가영 씨가 혼자서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이다. 한쪽에는 내가 방콕에서 운영하던 ‘데이오프데이’ 카페가 옮겨가기로 했다. 방콕 카페의 문을 닫고 치앙마이로 옮겨 가기까지 혹시 내가 그 공간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그녀의 말에 힘을 얻어서 입주를 결정했고, 그런 제안을 해준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공간을 준비하면서 영감을 받은 사진들을 서로 주고받고, 페인트 색은 어떻게 할까, 바는 어떻게 만들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기쁨이 더해갔다. 어느 날은 원예시장에 가서 마을 내에 심을 여러 가지 나무와 화초들을 골라왔는데, 다음날 보니 내가 태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릴라와디 꽃나무가 수영장 한 켠에 심어져 있었다. 언젠가 이 나무가 쑥쑥 자라서 수영장 물 위로 릴라와디 꽃이 떨어지는 풍경을 상상해보니 행복한 웃음이 났다. 반캉왓보다도 더 깊숙한 호젓한 시골 길에 자리 잡은 공간이지만 아주 맛있는 쌀국수집도 있고, 건강한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소박한 식당도 있다. 많은 가게들이 간판을 달지 않고, 문을 열 때만 입간판을 툭 내어놓는 곳이 많지만, 골목을 찬찬히 살피며 걷다 보면 곳곳에 숨겨진 우연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마을을 찾아올 사람들이 머무는 시간 동안이라도 만족스러운 삶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 이의 것을 탐내기보다는 내가 가진 것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빡빡하고 고단했던 마음들을 내려놓고 충분히 머무르며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에디터 정혜미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