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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make Movies
일하며 살아간다는 것, 일하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일하는 나이든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에게는 선배가, 동료가,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들이 들려주는 솔직하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인터뷰집이나 대담집을 읽는 것은 즐겁다. 다른 책은 읽기 힘든 정신 상태일 때도 이런 책들은 잘 읽힌다. 인터뷰집이나 대담집이란 말 그대로 대화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대와 주고받는 것이기에 쉽고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배려가 넘친다. 이야기들이 탁구공처럼 오가는 동안 스파크가 튀기도 하고, 서로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도 느껴진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상점에서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완벽한 원피스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황홀한 일이다. 얼마 전에 읽은 《부디 계속해주세요》라는 한일 예술인들의 대화집에서는 배우 문소리와 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문소리는 누구나 아는 유명 배우이면서 얼마 전 <여배우는 오늘도>(2017)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문소리와 대화를 나눈 니시카와 미와는 <유레루>(2006)와 <아주 긴 변명>(2016)이라는 진지하고 개성 있는 영화를 만든 감독인 동시에 작가로, 우선 소설을 써 책으로 낸 뒤 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식으로 일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는 오래되고 진지한 매체다. 돈이 많이 들고 사람도, 장비도,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 기술 없이 아무나 덥석 뛰어들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겨우겨우 영화 한 편을 완성해도 극장에 그 영화를 거는 것부터 흥행과 비평까지, 견뎌야 할 어려움은 끝이 없다. 중년에 접어든 두 영화인은 그 어려움을 고상한 치장 없이 솔직하고 씩씩하게 드러낸다.
배우는 배역에 빠져들 때와 나올 때가 있고, 압박도 있지만 숨도 쉴 수 있죠. 하지만 감독은, 머리에 뒤집어쓴 헬멧 끈이 점점 더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때가 되면 숨이 트일 거라고 생각했더니 영화제작이 끝나도, 작품을 공개할 때까지도 계속 책임에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예요. 게다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지 정당성을 계속 고민해야 하니까 압박이 끊이질 않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구상한 플랜에 따라 일을 하는 것도 사실은 무척 즐겁습니다. 영화 현장에서는 제가 “이렇게 가자” 하고 지시를 내리면 그 지시가 순식간에 절대적 정의로 간주되고 그것을 좌표축으로 하여 모든 것이 움직이지만 CF의 경우는 다릅니다. 클라이언트가 “그건 좀 곤란한데요” “이건 아니죠” “클레임 들어오겠어요”라고 말하면 다시 아이디어를 수정하여 그들의 ‘정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콘티나 편집을 수정하면서 ‘아, 촌스러워!’ ‘이건 아닌데!’ ‘이런 건 너무 흔해!’ 이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합니다. 하지만 나의 정의가 과연 제대로 된 정의일까 하는 자문자답에서 해방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 니시카와 미와, 《부디 계속해주세요》 중에서
<여배우는 오늘도> 속 문소리의 삶처럼 내 삶도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언제나 캄캄한 터널 속이다. 내 일, 아이들 키우는 일, 집안을 꾸려나가는 일, 인간관계를 유지해나가는 일 등이 예고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내린다. 이제야 알겠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할 줄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에게 지목당한 학생처럼 엉겁결에 앞으로 떠밀려 나와 울면서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인 걸까. 그래서 니시카와 미와의 저 고백은 마음에 착 달라붙었다. “나의 정의가 과연 제대로 된 정의일까 하는 자문자답에서 해방되는 순간.” 내게도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일을 한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의 연속이기에.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일들에서 달아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요즘 나는 식사 메뉴 고르는 일조차 남에게 떠넘기고 있다. 아무 생각 없는 무생물처럼 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구 멸망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내게 언젠가 엄마가 해준 말이 있다. “수희야,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결정하고 천천히 행동해.”
엄마 눈에는 내가 너무 조급해 보였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도 아이를 낳고 키우고 살림을 꾸리고 일을 하며 살아왔기에,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옛날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엄마가 해준 그 말을 곱씹는다. 살아가면서 그보다 더 의지할 수 있는 말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데뷔하고 나서 나는 어떤 배우인가 생각을 해보니까 제가 스물여섯 살까지 굉장히 평범하게 살았어요. 영화배우를 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그냥 대학 생활 열심히 하고 연극을 좀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연기를 시작하고 보니까 제가 평범하게 살았던 시간들이 저한테는 굉장히 저의 개성이고 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문소리, 《부디 계속해주세요》 중에서
우리의 삶은 여배우의 삶과 같지는 않겠지만, 한 꺼풀 들추고 보면 인간의 삶은 다 비슷하다는 것을, 비슷하게 지리멸렬하고 괴로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문소리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들려준다. 그리고 치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덕분에 이 여배우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평범하게 살던 시간마저 자신의 개성이고 힘이라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씩씩한 배우이자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나니 이상하게 삶의 에너지가 솟았다. 또 무언가를 쓰고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겼다. 그래,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고유하게 이야기를 만들어가거나 할 때는 역시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펼쳐놓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뿌리 깊이 울리는 작품은 만들 수 없지 않나 싶어요. 왜냐하면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만든 이가 제대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찾았던 것에 ‘이건 내 이야기 같다’ 하고 저 자신도 공감해왔기 때문입니다.
– 니시카와 미와, 《부디 계속해주세요》 중에서
영화를 만들며 나이든 여자들,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여자들, 남들에게 무언가를 팔고 있는 여자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는 여자들, 모든 나이든 여자들. 이 여자들 역시 종종 용기를 잃을 것이고 좌절할 것이고 우왕좌왕할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도 했을 것이고, 그 선택을 책임지고 수습하며 살아가고 있기도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넘어질 때 어떻게 넘어져야 하는지, 언제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어디서부터는 타협하면 안 되는지, 어디서부터는 타협해도 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줄 여자들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질책이나 명령이 아니라, ‘나는 이랬는데…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의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일 때, 우리의 손에도 자신만의 작은 나침반이 쥐어질 것이다.
우리처럼 대범치 못한, 평범한 보통 여자들이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직면하면서도 끝내 만들어낸 것들, 그들이 이뤄낸 것들을 볼 때마다 용기가 솟는다. 작은 나침반을 손에 쥐고 작은 용기를 징검다리 삼아 한 발짝씩 걸어가고 있다.
《부디 계속해주세요》
문소리, 니시카와 미와 외 | 마음산책
<여배우는 오늘도>(2017)
문소리 | 드라마
배우 문소리의 연출작이자 주연작. 영화 속 문소리는 매일 배우, 며느리, 딸, 엄마, 아내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바쁘게 살아간다. 바쁘기만 하면 다행이지, 주변의 여러 가지가 그녀를 둘러싸고 힘껏 괴롭혀댄다. 그녀만의 자력갱생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유심히 봐야 할 것.
글 한수희
일러스트 김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