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신카이 마코토, : 완성된 일기
〈초속 5센티미터〉(2007)를 보고 나면 머릿속은 금방 봄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잠든 어느 밤엔 흐드러진 벚꽃 잎이 가득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벚꽃 무리를 한참 헤집으니 공책 한 권이 잡혔다. 타카키의 일기장이었다. 일본어를 더듬더듬 읽어나가고 있는데 야속하게도 꿈에서 깼다. 연분홍빛 꿈을 붙잡고 싶어 오늘은 그가 되어보기로 했다.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 그 어디 즈음을 오가는 타카키의 문장을 조심히 옮겨 꿈속의 일기를 완성한다. 훌륭한 일러스트를 곁들이고 사춘기적 감성도 한 스푼 담는다. 이건, 꿈속에서 건져 올린 타카키의 그림일기다.
아카리가 멀리 떠났다. 그녀에게 이사 소식을 듣던 순간을 기억한다. 창밖으론 비가 내렸고, 집 안의 공기는 유난히 쌀쌀해서 이불을 덮고도 웅크려야 했던 밤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숨죽여 우는 그녀의 마음이 수화기를 타고 선명하게 전해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학생이라는 공통분모로 서로에게 기대 노래방 대신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고, 친구들의 놀림에도 손을 꼭 잡고 교실을 달려 나가던 아카리와의 어린 날들. 그 모든 기억이 마음속에서 흩어지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고야 만다. 아카리가 떠난 뒤, 그녀에게서 여러 번 편지가 왔다. 반가움과 슬픔, 괴로움, 아쉬움, 그리움 사이의 감정을 헤매며 나는 편지를 쥐고 숨죽여 울곤 했다. 어떨 땐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아렸고, 어떤 날엔 눈물이 날 뿐 아무 기분도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답장을 쓰기 위해 골몰하던 끝이 없는 시간들. 그 시간 동안 나는 눈물 없이 우는 방법을 배웠다. 역 플랫폼 건너편, 뒷골목의 창문, 새벽녘의 거리, 벚나무의 경계, 교차로, 꿈, 급행열차를 기다리는 건널목 근처에서 우는… 그런 방법들을.
3월 4일에 빨간색으로 진한 동그라미를 그린다. 이젠 너무 멀리 있는 아카리와 내가 만나기로 한 날. 일본의 끄트머리 가고시마로 이사를 앞둔 나는, 약속한 이 날이 아니면 앞으로 그녀와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아카리가 있는 곳까지 가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신주쿠역에서 사이쿄선을 타고 오미야역으로, 오미야역에서 우츠노미야선으로 환승하여 오야마역으로, 다시 료모선으로 환승하여 이와후네역으로 가야만 겨우 그녀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중학생이 가기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아카리는 저녁 일곱 시에 대합실에서 기다리겠다며 글자 사이사이 귀여운 그림을 담아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벚꽃 잎을 맞으며 조곤조곤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던 아카리를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곧 재회할 수 있다는 기쁨, 켜켜이 쌓인 그리움의 무게를 털어내고 가벼워지리라는 기대, 며칠을 그 생각만으로 버텨냈다. 수업이 끝나고 15시 54분 열차에 타면 16시 26분에 환승할 수 있고, 그다음 환승이 17시9분에 무사히 이어지면, 18시 23분에 마지막으로 환승해서… 아카리를 만날 수 있었다. 편도 1770엔, 왕복 3540엔. 주머니에 오직 그것만 있으면 되었다.
눈이 내린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눈이 오면 기차가 연착되고 정차해서는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눈과 눈 사이로, 그녀에게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거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끔찍했고, 무서웠고, 무엇보다 슬펐다. 한밤중이 되어 도착한 이와후네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아카리를 봤다. 모든 게 환각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차가운 대합실에 앉아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싱긋 웃으며 식어버린 도시락을 내게 건넸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지만 알 것 같은, 눈물과 비슷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이에 닿으면 알알이 부서질 것처럼 가녀리지만, 절대 부서지지 않을 강인한 맛이었다.
“가고시마에서 발사될 로켓의 속도, 시속 5킬로미터래.”
아카리와 이와후네에서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사했다. 일본의 끝, 가고시마로. 그녀와의 거리는 이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멀기만 하다. 아카리가 없는 가고시마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끔찍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학교에 대한 설렘도, 기대도 없이 유령처럼 꾸벅 고갤 숙이고 자리에 앉았을 때, 내게 말을 걸어온 동급생이 있었다. 그 애와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함께 스쿠터를 타고 하교하곤 했다. 카나에는 서핑을 좋아했다. 파도 위에 서기 위해 그녀가 매일 아침 바다에서 물살을 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다 바닷길을 지나갈 때면 빛나는 햇살 사이로 그 애의 보드 끝자락이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걸 보면 좀,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 애를 보려고 일부러 바닷길로 간 적은 없지만, 보고 나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듯한 평안함이 찾아왔다. 카나에는 매일 손에 쥐는 칫솔처럼 생활이자 일상 같은 친구였다.
가고시마에는 기차가 없다. 나는 스쿠터를 타고 학교에 갔다. 가끔은 걷기도 했다. 걸어 다니기엔 멀었지만, 오래전 아카리를 보러 갔던 여정만큼은 아니었다. 어디도 그보다 멀 순 없었다. 그 길은 춥고 무섭고 끔찍했고 슬펐지만, 끝내 기뻤고 찬란했다. 언젠가부터 더는, 아카리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는다. 우리는 종이에 적는 대신 버튼을 두드리고 전송 버튼을 누르는 일로 손글씨를 대신하게 됐다. 문자 메시지는 아카리에게 빠르게 닿을 수 있었지만 가끔 나는 우리의 속도감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문자를 보내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 마음속이 손쉽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카리와 나는, 아니 적어도 나는 간편하게 전해지는 서로의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랬던 것 같다. 점점 느려졌고, 점차 뜸해졌고, 끝내 멀어졌다.
“천 번의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 마음은 1센티미터도 가까워지지 못했어요.”
아카리를 잃고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나는 그 무게감에 짓눌려 무언가 하나씩 잃어가고 있었다. 웃음, 기쁨, 만족…. 애초에 나에겐 욕구랄 것이 없었다. 따뜻해질 수 없는 시선으로, 무엇도 안을 수 없게 된 품으로 나는 잔인하게도 연인을 곁에 두었다. 더 이상 이기적일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녀와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생각뿐이었다. 오래된 문자 보관함을 들여다보고 있던 어느 밤,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천 번의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 마음은 1센티미터도 가까워지지 못했다.’는 문장은 명백한 이별이었지만, 나는 잠시 공허했을 뿐 그 이상의 마음은 없었다. 정리할 마음조차 없다는 것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아카리를 잃고도 시간은, 야속할 만큼 오차 없이 흘렀다. 오늘에서 내일로, 내일에서 모레로.
나는 사표를 냈다. 더 이상은 일도, 사랑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술을 마셨고, 어쩌면 술만 마셨고, 아주 오래된 문자보관함만 뒤적였고, 울었고, 괴로워했다. 봄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벚꽃 잎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겨우 찾아온, 어쩌면 내가 찾아간 그 봄에서 나는 벚꽃 무리 속에 일기장을 버렸다. 오래된 일기를. 누군가 읽기를 바라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는 두 개의 마음으로.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