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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승일, 영화감독·뮤지션 이랑 : 잘 들고 있어요
친한 친구 김승일과 이랑이 만나 시나리오를 쓰면 엉뚱한데 귀엽고, 웃긴데 계속 보고 싶은 게 나오지 않을까? 처음 생각은 그랬다. 마감 일에 딱 맞춰 도착한 시나리오를 읽고 나는 단 한마디로 감상을 정리 했다. “아, 재밌다….” 이건 영화든 동화든 하여튼 만들어져야 한다.
시나리오 | 김승일, 이랑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은 별자리 스티커를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던 랑이가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방에 들어온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이랑 : 할아버지 저 내일 어디 좀 다녀올게요.
승일 : 유주랑 놀러가니 랑아?
이랑 : 저 소말리아에 가요. 거기 가면 배고픈 애들이 많대요. 오늘 학교에서 카레에 든 당근을 빼고 먹다가 선생님한테 혼이 났어요. 그렇게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고, 소말리아에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애들이 많다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소말리아에 있는 애들도 당근을 싫어할 것 같아요.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 괜찮죠?
승일 : 허어….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방으로 들어가 주섬주섬 화구를 챙기기 시작한다. 아침이 된다. 랑이는 가방에 당근을 잔뜩 넣고 있다.
승일 : 랑아, 소말리아는 너무 멀어서 거기 가면 할아버지가 랑이가 보고 싶을 것 같애. 그래서 할아버지가 랑이를 그림으로 그리려고 한단다. 그림이 다 완성되면 소말리아에 가는 걸로 하자. 좋지?
이랑 : 언제 완성되는데요?
승일 : 저쪽에서 놀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빨리 그릴게. 알았지?
이랑 : 그럼 가방은 메고 있어도 돼요?
승일 : 금방 끝나니까 마음대로 하려무나.
봄이다. 할아버지가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해가 지기 시작한다. 다시 해가 뜨고 할아버지가 그림을 계속 그린다. 비가 내린다. 할아버지가 우산을 쓰고 그림을 계속 그린다. 랑이도 우산을 쓰고 있다. 다시 화창한 날씨다.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린다. 해가 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계속 그린다. 그림이 마르면 그 위에 다시 그리고, 그림이 또 마르면 그 위에 다시 그린다. 그림이 점점 두꺼워지기 시작한다. 그림이 너무 뚱뚱해져서 이젤에서 떨어진다.
이랑 : 그럼 이제 가방은 내려놔도 돼요?
승일 : 응 가방은 이제 내려놓고, 필요하면 유주도 와서 잡아달라고 하자.
이랑 : 그럼 유주가 여기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사이)
이랑 : 유주야!
공원을 천천히 걷고 있던 유주가 랑이에게 다가온다.
이랑 : 유주야, 나랑 같이 그림을 잡아줄래? 우리 할아버지가 그림 반대편에서 나를 그리고 있어. 왜냐하면 나는 소말리아에 가야 하는데, 내가 소말리아에 가면 할아버지는 내가 보고 싶을 거래.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내가 소말리아에 가 있는 동안 그림을 보고 있을 거래. 할아버지, 할아버지! 내 말 맞죠?
승일 : 할아버지가 옛날에 대학로 화가였단다.
이랑 : 할아버지! 유주가 그림을 같이 잡아주면 유주한테 선물 주세요.
승일 : 그건 좀 곤란한데….
이랑 : 그럼 유주도 그려주세요, 그건 할 수 있죠?
승일 : 그래 유주도 그려줄게.
이랑 : 좋지? 유주야, 신나지?
유주 : 뭐라고?
계절이 바뀐다. 그림은 어린아이 둘이 들 수 없을 만큼 두꺼워지고, 할아버지는 뻘뻘 땀을 흘리고 있다.
이랑 : 할아버지, 할아버지! 너무 무거워요!
승일 : 그럼 어쩌지?
이랑 : 언제 다 그려요? 왜 계속 그려요? 저 소말리아 언제 가요?
승일 : 응? 뭐라고? 잘 안 들려.
이랑 : 아, 무거운데!
유주 : 무거우면 내가 더 받쳐줄게.
이랑 : 아니야,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다람쥐가 공원을 달리고 있다.
이랑 : 다돌아!! 나랑 같이 그림을 잡아줄래? 우리 할아버지가 그림 반대편에서 나를 그리고 있어. 왜냐하면 나는 소말리아에 가야 하는데, 내가 소말리아에 가면 할아버지는 내가 보고 싶을 거래.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내가 소말리아에 가 있는 동안 그림을 보고 있을 거래. 할아버지, 할아버지! 내 말 맞죠?
승일 : 응? 그래, 다돌이도 그려줄게. 할아버지 조수가 되어주렴.
이랑 : 조수가 뭐예요?
승일 : 도와주는 애들을 조수라고 한단다.
이랑 : 그럼 조수를 도와주는 애들은 뭐라고 해요?
승일 : 응? 뭐라고? 잘 안 들려. 거기 잘 받치고 있어라!
이랑 :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럼 다돌이도 그려주는 거죠!! 다돌아, 신나지?
유주 : 근데 랑아.
이랑 : 응? 왜 유주야.
유주 : 나 엄마가 약간 보고 싶어.
이랑 : 나도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할아버지 거기 있어요? 잘 있어요? 제 가방 잘 지키고 있어요?
눈이 내린다. 할아버지가 그린 조나단이 화면에 비친다. 랑이와 친구들은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에 있다. 까마귀 친구들 이 같이 그림을 붙잡아주고 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랑이 옆으로 걸어간다.
이랑 : 할아버지, 할아버지!
미야자키 하야오 : 응 그래 왜 그러니?
이랑 : 아니요, 할아버지 말고요, 우리 할아버지요.
미야자키 하야오 : 그렇구나.
이랑 : 아 잠깐만요, 할아버지 가지 마세요. 할아버지 저랑 같이 그림을 잡고 있을래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림 반대편에서 저를 그리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소말리아에 가야 하는데, 제가 소말리아에 가면 우리 할아버지가 제가 보고 싶을 거래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저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제가 소말리아에 가 있는 동안 그림을 보고 있을 거래요.
미야자키 하야오 : 오 그렇구나. 그럼 잠깐 도와줘볼까?
이랑 : 침치미니 침치미니 침침체리~ 우리는 굴뚝 청소원이지요~ 저는 이 노래가 제일 좋아요.
미야자키 하야오 : 참 좋구나.
랑이와 동물 친구들이 다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랑 :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 생일이 됐어요!!
유주와 동물 친구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랑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할아버지의 그림이 화면에 비친다. 선물 상자다. 파리 에펠탑이다. 자유의 여신상이다. 앙크로와트 신전이다. 별자리가 뚜렷한 밤하늘이다. 랑이와 동물 친구들은 파키스탄 히말라야 산 아래에 있다. 설원이 펼쳐진 곳이다. 펭귄들이 함께 그림 옆에서 침치미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랑 : 할아버지는 잘 있을까?
유주 : 침치미니 침치미니 침침체리~
이랑 : 유주야 너 엄마 안 보고 싶어?
유주 : 응? 그렇게 말하니 보고 싶은 것 같아.
이랑 : 유주야 너 그런데 키가 되게 컸다. 나도 키가 조금 커졌는데, 할아버지 그림 속의 나는 지금 나보다 키가 작을까? 내 가방 속에 있는 당근은 할아버지가 먹었을까? 나도 이제 당근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내가 당근을 먹을 수 있는 키가 큰 아이가 된 걸 알까?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길고 두꺼운 그림 앞에 목도리를 맨 채로 서 있다. 그림에는 동물 친구들과 키가 훌쩍 큰 랑이가 그려져 있다. 배경은 소말리아다
승일 : 랑아!
(사이)
승일 : (입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소리친다) 랑아! 거기 있니? 할아버지가 그림 다 그렸다! 보고 싶어 랑이야! 맞은편에서 계속 이젤을 당기고 있지? 고맙구나 할아버지를 도와줘서. 할아버지도 너희들을 그리워하며 잘 있단다. 얼마나 키가 컸을까? 상상하면서 그림도 잘 그렸어. 얘들아 잘 지내고 있지?
(사이)
이랑 : 디리야. 너 카레 좋아해?
파티마 디리 : 응 나는 양파랑 고기랑 울금이 든 카레가 좋아.
이랑 : 카레에 든 당근은?
파티마 디리 : 당근?
이랑 : 나는 카레에 든 당근이 너무 싫어서 항상 당근을 빼고 먹었거든.
파티마 디리 : 당근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대. 그런데 나도 당근이 싫어. 그래서 빼고 먹다가 선생님한테 혼이 났어.
이랑 : 나랑 똑같네. 신난다!
파티마 디리 : 그런데 이 길고 두껍고 알록달록한 건 뭐야? 왜 들고 있어?
이랑 : 이건 그림이야. 이 그림 반대편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그리고 있어.
파티마 디리 : 너도 할아버지가 있어?
이랑 : 응, 있어! 우리 둘 다 당근을 싫어하고 우리 둘 다 할아버지가 있네? 신난다! 우리 할아버지한테 알려주고 싶다!
파티마 디리 : 할아버지! 저는 파티마라고 해요! 랑이 소말리아 친구예요! 거기 계세요?
이랑 : 할아버지, 할아버지! 잘 있어요? 이제 그림은 다 그렸어요? 저는 친구가 많이 생겼어요! 할아버지한테 제 친구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
– The End
시인
영화감독·뮤지션
시나리오 <잘 들고 있어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갑작스레 요청한 작업이라 어려운 점이 많았죠?
이랑(이하 ‘이랑’) – 20일은 불가능한 기간이었어요.
김승일(이하 ‘승일’) – 기간이 짧았어요. 랑이가 많이 바빠요. 저 는 안 바쁘지만.
제목은 어떻게 지었어요?
승일 – 이랑 노래 중에 ‘잘 듣고 있어요’라는 명곡이 있는데 제 가 다 쓰고 나서 ‘잘 들고 있어요~’ 하고 노랠 부르다가 그렇 게 됐어요. 이랑 앨범에 수록된 건 아니고 3집에 수록될 노래예요.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시나리오는 음악이나 문학과는 달리 장소, 대사, 인물 등 구체적인 설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 금 다를 것 같아요.
승일 – 만나서 회의부터 했어요. 공책을 펼치고 이랑이 ‘뭘 할 까’라고 썼죠.
(공책을 가지고 오는 이랑)
이랑 – 무슨 얘길 할까 하다가 완전히 처음부터 구상하기엔 시 간이 촉박해서 전에 승일이랑 했던 이야기에서 출발하기로 했어요. 예전에 승일이가 동화로 만들고 싶다고 한 시가 있거 든요.
승일 – 제 첫 시집 《에듀케이션》에 <두꺼운 그림>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점점 더 두꺼워지는 그림과 이젤에서 그 그 림이 고꾸라지는 내용이 나와요. 아주 옛날에 그 시를 두고 동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둘이 얘기한 적이 있어요. 거기에 소 말리아에 관한 사적인 비화를 덧붙인 거죠.
비화도 공개할 수 있나요?
승일 – 랑이 말버릇 중에, 누가 힘들다고 하면 “야! 소말리아 애들이 더 힘들어!”라고 하는 게 있거든요. 언젠가 제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친구한테 뒷담화를 했는데, 이랑이 최근에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랑 – 내가 어깨도 주물러주고 얼마나 잘해줬는데, 뒷담화를 해?
승일 – 그건 그거고, 소말리아 애들 얘길 한 건 또 그거지(웃음). 소말리아가 우리 세대에겐 되게 중요한 얘기였거든요. 우리 어릴 땐 학교에서 소말리아 기아에 관련된 영상을 자주 보여 줬어요.
소말리아란 배경과 당근의 연관성도 궁금해요.
이랑 – 제가 당근을 싫어해요. 특히 익힌 당근이요. 어릴 때 카 레에서 당근만 골라내니까 엄마가 그거 다 안 먹으면 식탁에 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야단친 적이 있거든요. 텅 빈 거실에서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억지로 먹은 기억이 나요. 울면서 치욕스러운 기분으로 삼켰는데, 그런 경험이 모티프 가 됐어요.
작업 방식이 궁금해요. 두 분이 마주 보고 앉아서 썼을 것도 같고, 이메일이나 메시지로 했을 것도 같아요.
이랑 – 저희는 공동 작업실을 쓰고 있는데, 승일이와 제 책상이 마주 보는 형태거든요. 마주 본 상태에서 각자의 컴퓨터로 구 글 문서를 사용해서 작성했어요.
승일 – 구글 문서에 같이 쓰는 거 엄청 재밌었어요. 하나의 문 서에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플랫 폼인데, 제가 쓰는 것과 랑이가 쓰는 게 실시간으로 각자 모 니터에 보이고 상대방이 드래그하는 것까지 다 알 수 있거든 요. 제 대사를 쓸 때도 랑이가 어디를 수정하는지, 무슨 말을 덧붙이는지 보여서 그걸 보면서 신나게 작업했어요.
이랑 – 저는 공동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인데, 최근에 채팅으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편하고 재밌다고 느꼈어요. 채팅으로는 한 명씩 대사를 주고받는 식으로 작업했지만 이번엔 채팅이 아니라 구글 문서니까 좀더 자유롭게 쓸 수 있었어요. 지문을 쓰다가 대사를 쓰기도 하고 상대방이 쓰고 있는 대사에 끼어 들기도 하고요.
‘승일’ 역은 김승일이, ‘이랑’ 역은 이랑이 쓴 게 아닌 거네요?
승일 – 대부분 각자 썼는데, 그러면서도 서로의 대사에 개입하 거나 덧붙이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보면 이견이 생기지 않나요?
즉흥적으로 대사를 작성했다면 결말도 즉흥적으로 완성했나요?
승일 – 결말은 소말리아에 가는 걸로 회의하면서 정한 상태였어요. 이랑 두 개의 결말을 놓고 고민했어요. 그림이 점점 더 두꺼워 지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할아버지 뒤로 손녀가 도착하여 만나는 것과 둘이 만나지 못한 채 소말리아로 가는 것.
시나리오를 다 읽고 슬픈 기분이 들었어요. 승일은 이랑을 소 말리아에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림을 그린 건데 결국 그림 때 문에 만나지 못하게 되잖아요. 이거, 새드엔딩인가요?
이랑 – 새드와 해피가 다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네 인생인 거 죠. 랑이는 가고 싶던 소말리아에 갔으니 행복할 테고, 할아 버지도 하고 싶은 그림을 그렸으니 행복했을 거예요.
승일 – 전 이 결말을 보고 배우 김혜자를 생각했어요. 그분이 어느 인터뷰에서 ‘저도 나이가 들어서 이제 곧 죽는단 걸 아 니까, 행복해요.’라고 한 걸 봤는데 할아버지는 그 마음을 알 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할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들었 으니 너무 욕심내면 안 된단 걸 안 거죠. 이랑이랑 헤어질 때 가 된 거잖아요. 떠나보낼 땐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해요.
이랑 – 떠나보내기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떠나보낸 거죠.
승일 –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영화 <러브레터>(1995) 생각도 났 어요. ‘잘 들고 있어요’가 ‘오겡끼데스까’인 거죠(웃음).
새드엔딩 어떻게 생각해요?
승일 – 나이 들수록 사람들이 새드앤딩을 못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가벼운 것만 찾게 되고.
이랑 – 저는 요즘 집에 가면 넷플릭스를 보는데,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마블 시리즈만 봐요.
승일 –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땐 슬픈 걸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랑 – 특히 예술영화요. 넷플릭스 추천 영화로 <아들의 방> (2001)이 종종 뜨는데 저는 못 보겠더라고요.
승일 – 약간 슬퍼도 동물이 나오면 좀 괜찮거든요. 그래서 이 시나리오에도 동물을 넣은 거예요.
이랑 – 그래도 동물이 나오는 영화는 찍으면 안 돼.
승일 – 그러니까 이건 인형으로 해야지.
이랑 – 애니메이션으로 해야 해.
승일 – 오, 애니메이션이 좋은 것 같아. 미야자키 하야오가 나 오잖아, 디즈니도.
이랑 – 맞아 맞아(웃음).
등장인물이 전부 실제 인물인 걸로 알아요.
이랑 – 맞아요. 동물들도 전부 친구들과 함께 살거나 살던 동물 이름이에요. 표표는 연희동에 있는 책방, 유어마인드 이로 씨 네 고양이이기도 하고요.
승일 – ‘파티마 디리’만 허구예요. 소말리아 여성 중 가장 유명 한 두 사람의 이름을 섞어 만든 거예요.
이랑 – 혹시 성과 이름이 아니라 이름과 이름을 섞었을지도 몰라.
승일 – 아니, 그건 내가 잘 했어.
이랑 – 그래? 잘했네.
미야자키 하야오 나오는 부분도 인상 깊었어요.
승일 –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거 언제까지 써야 되지?’ 싶어서 그냥 넣어본 건데 랑이가 안 빼더라고요.
이랑 – 하야오 앞에서 디즈니 OST를 부르는 게 약간 놀리는 것 같아서 저는 좋았어요.
승일 – 당장 찍을 영화가 아니니까 자유롭게 썼어요. 쓰는 걸 즐기면서요.
랑이와 동물 친구들이 <메리 포핀스>(1964)의 테마곡을 부르 잖아요. 왜 하필 그 곡이에요?
이랑 – 제가 <메리 포핀스>를 엄청 좋아해요. 디즈니 애니메이 션은 2D나 실사가 좋고, 3D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하야오는 김승일이, <메리 포핀스>는 이랑이 등장시킨 거네요.
승일, 이랑 – 맞아요.
<잘 들고 있어요>의 장르는 무엇인가요?
이랑 – 애니메이션이요.
승일 – 처음부터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처럼 해봐야겠다고 생 각했어요. 같이 본 영화 중에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2006)이란 작품이 있는데요. 오래전이지만, 둘 다 엄청 재미 있게 본 거라 참고를 좀 했어요.
이랑 – 충격적으로 재밌었어요.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환 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그 장면들을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썼죠.
승일 – <더 폴>은 투자를 받지 않고 감독의 사비로 영화를 찍은 걸로 알아요.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예쁜 풍경을 담았다는데 그게 이상할 만큼 아름다워요.
이랑 –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데 CG처럼 엄청나게 환상 적이죠.
승일 – 돈이 많다면 <잘 들고 있어요>도 전 세계를 로케이션하 면서 만들고 싶어요.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요
무제한 예산으로 제작할 수 있다면 어떤 지점에 가장 힘을 주 고 싶어요?
이랑 – 무제한이요? 애니메이터부터 고민해야겠네요. 좋은 인 재와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애니메이션도 하고, 멋진 배경을 만들어서 인형극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월레스와 그로밋>(1989)처럼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도 싶어 요. 무제한 예산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잖아요. 애니메이션 한 편, 2D 한 편, 실사 한 편, 클레이 애니메이션 한 편, 인형극 한 편, 뮤지컬 한 편, 공포 한 편….
승일 – 그걸 다 여러 감독한테 맡기자! 아, 예산이 무제한이면 실사판에서 손녀 역할의 아이와 1년에 한 번씩 촬영하고 싶 어요. 키가 조금씩 커져야 하니까요.
이랑 – <보이후드>(2014)처럼?
승일 – 응. 예산이 무제한이면 뭐든 할 수 있잖아.
잠깐, 공포요? 어떻게 하면 장르를 공포로 만들 수 있을까요?
승일 – 노래만 바꿔도 공포일걸요. 할아버지가 랑이 그림을 그 리는데 배경음악으로 따단, 따단 하고 <죠스>(1975) OST가 울려 퍼지는 거죠. 유주한테 “너 엄마 안 보고 싶어?” 하는 순간 띠로리~ 하고 ‘토카타와 푸가Toccata und Fuge BWV. 565’가 흐르는 거고요.
이랑 – 유주가 처음 등장할 때 랑이가 엄청 무서운 목소리로 “유주야!” 하면, 유주가 “헉! 꺅!” 비명을 지르는 거죠. 고양 이 표표가 등장할 땐 고양이의 째지는 울음소리 “끼야아아아 아아악!”을 넣고요. (일동 웃음)
승일 – 팀 버튼한테 맡길까?
웃느라 인터뷰를 못 하겠어요. 사운드만 바꿔도 영화 장르가 바뀐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영화에서 사운드 트랙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이랑 – 저는 영화를 전공해서 학생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었는 데, 가끔 편집하다 보면 후반부에 막히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이제 마법을 부릴 시간이다.” 하고 주문처럼 이 야기하곤 했어요. 음악만 넣으면 안 붙던 장면도 잘 붙게 되 거든요(웃음). 단편영화제에 가면 이런 식의 마법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스토리상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음악이 나 오면서 갑자기 스태프 롤이 올라가요. 그런 작품이 진짜 많아요. 음악은 진행이 잘 안 될 때 사용하면 좋은 소스가 돼요. 마법인 거죠.
<잘 들고 있어요>를 실사로 만든다면 어떤 배우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랑 – 이렇게 동화적인 얘기는 사람이 나오면 이상해지잖아 요. 그림이거나 인형이어야 좋을 것 같아요.
승일 – 인물 나오는 건 저도 싫은데, 요새 오지명 씨가 좋더라 고요. 은퇴하셨지만 마지막으로 출연해달라며 섭외하고 싶 어요. “어! 야, 야, 거기~ 잠깐만 서 봐~”(일동 웃음)
시나리오를 쓰는 건 시나 노랫말을 쓰는 것과는 확실히 다를 것 같아요.
승일 – 시는 혼자 쓰는 건데 <잘 들고 있어요>는 함께 썼다는 게 가장 큰 차이죠.
이랑 – 승일이가 쓰는 걸 본 순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야겠 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각본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서 시나리 오는 스태프와 공유해야 하는 설명서라는 걸 잘 알거든요. 장 면에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해야 하죠. 가령 시나리오에 컵이 등장한다면 영화에 컵이 진짜 나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 정적인 묘사는 거의 들어 있지 않은 게 시나리오의 특징인데, 승일이가 시처럼 쓰길래 이건 협업이니까 그냥 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설명서 역할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대본이라 생 각한 거죠. 나중에 정리만 시나리오 형식으로, 그렇게 보이게 끔 다듬었어요.
승일 -저도 극작과를 나와서 희곡 대본은 써봤는데 이건 희곡 쓰듯 쓰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업도 일종의 컬래버레이션인 셈이잖아요. 최근 낭독회 에 뮤지션이 함께한다거나 시인이 영화 GV를 하는 등 예술 과 예술의 만남이 많아졌어요. 이런 흐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세요?
이랑 – 예술이 매력 산업으로 흐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더 고 민해서 더 재미있게 할 사람들과 함께하면 좋겠어요. 경계를 정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 제일 핫한, 제일 매력 있는 사람을 별다른 고민 없이 초대하는 건 인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요.
승일 – 행사의 아이덴티티를 주최 측에서 좀더 고민하는 자세 가 필요하죠.
이랑 – 그런데도 저희가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거절하지 않는 건 우리도 당장 벌어야 하니까 그런 거예요. 지금 매력 있다고 여 기저기 참여하다 보면 생명력이 확 짧아진다고 생각해요.
좋은 이야기네요. 다시 <잘 들고 있어요>로 돌아와서, 포스터를 상상해볼까요?
승일 – 할아버지가 완성한 그림.
이랑 – 나도 똑같이 생각했어. 승일 역시! 찌찌뽕!
<잘 들고 있어요>는 어떤 사람이 보면 좋아할까요? 이른바 이 영화의 타깃!
이랑 – 소비는 소비자한테 맡기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물 론 상업영화라면 타깃이 필요할 테지만, 이 시나리오는 그러 지 않아도 된다고 봐요.
승일 – 저는 랑이가 보면 좋겠어요. 저는 뭘 만들든 제가 보여 주고 싶은 사람 한 명만 정해서 만들거든요. 제 시를 볼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글이 잘 안 써지는데, 이걸 좋아해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를 떠올리면서 선물한다고 생각하면 훨씬 편하게 쓸 수 있어요.
이랑 – 승일이 말처럼 친구가 먼저 좋아해주면 좋은 거고, 그게 확산되어서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주면 더 좋은 거죠.
승일 – 《에듀케이션》에 실린 시이자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 <나의 자랑 이랑>이 그런 경우죠. 이랑한테 주려고 쓴 시 인데 다들 그것만 좋아하더라고요. 다른 시는 다른 사람들 보 라고 쓴 시인데 반응이…. (일동 웃음)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홍보 문구를 주고받았다. 인터뷰를 하면서 진솔한 얘기에 눈물 흘린 적은 있지만, 우스워서 눈물 을 멈추지 못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음 맞는 두 친구가 내 는 시너지 효과를 생각한다. 재능 있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사들은 한 편의 영화가 되고, 하나의 동화가 되어 사람들에 게 미소를 전한다. 나는 <잘 들고 있어요>에서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만났다. 그러니까 이건, 이들 말대로 인생이 담긴 시나 리오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김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