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In Space

공간에 묻어난 음악

나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뭔가를 꾸준히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나라는 인간이다. 그렇다. 나는 이런 나를 요즘 들어서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속칭 ‘일 중독자’다. 휴가를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휴양지로 휴가를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휴가를 가서도 나는 끊임없이 먹고, 돌아다닌다. 하루 5식은 기본, 할 게 널려 있는 대도시 체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지 않았나. “멍 때리는 것도 재능”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철저하게 재능 부족이다. 나는 멍 때리면 불안해진다. 일로 불안을 겨우 해소하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동하면서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다. 글쎄. 정확히 비교해보진 않았지만 내 방에서 각 잡고 음악 감상하는 시간보다 더 많을 듯싶다.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음악들도 대개 걷거나, 뭔가를 바라보는 와중에 들은 경우가 많다. 이유는 이렇다. 집에서 음악을 플레이할 경우 최대한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오랫동안 뇌리에 새겨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거기에 풍경이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음악은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홀로 듣더라도 잊을 수 없는 공간에서 울려 퍼질 때 한층 특별해지는 법이다. 내가 네 가지 장소에 대한 콘셉트를 ‘이동’과 ‘풍경’으로 잡은 가장 큰 이유다.

홍대

故 신해철, [정글 스토리](1996)

홍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학번이다. 학점은 제대한 이후 3학년 1학기 빼면 다 엉망진창이었다. 학점은 어떻게든 대충 따고, 대신 음악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영어 과외를 하면서 학자금을 벌었다. 만화방 아르바이트도 오래 했다. 만화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인데 이 역시 돈이 필요해서였다. 대학 시절의 나는 정말이지 가난했다. 누군가와 고생 배틀하자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이유를 설득하고 싶을 뿐이다. 맞다. 나는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책을 사기 위해, 게임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미친 듯이 일한다. 멍 때리지 못하는 것도 다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학교로 가는 길은 제법 즐거웠다. 함께 웃기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호쾌하게 술 사주는 선배도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문을 지나가자마자 보이는 짧은 언덕길을 잊을 수 없다. 이 길을 걸으면서 오늘 하루에 대한 괜한 기대감 속에 음악을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남는다 싶으면 바로 옆에 위치한 운동장 계단에 앉아 계속 음악을 들었다. 자본이 충분하지 않기에 일주일에 살 수 있는 CD라고 해봐야 1장, 많으면 2장 정도였다. 이걸 듣고 또 들었다. 지금도 이 때 접한 앨범은 트랙 리스트까지 다 읊을 수 있다. 인이 박혀버렸기 때문이다. 故 신해철이 남긴 걸작 [정글 스토리](1996)가 대표적이다.

01. Main Theme From Jungle Story – Part 1 02. 내 마음은 황무지(Original Song’s Performed By 산울림)

03. 절망에 관하여 04. Main Theme From Jungle Story – Part 2 05. 백수가 06. 아주 가끔은

07. Jungle Strut 08. 70년대에 바침

09. 그저 걷고 있는거지(Main Theme From Jungle Story – Part 3)

한강 변

허클베리핀, [오로라피플](2018)

산책을 좋아하지만, 뛰지는 않는다. 뛰는 건 무릎이 아파 40대 이후로 그만뒀다. 대신 조금 빨리 걷는다. 아주 약간 숨이 차오를 정도의 속도로 10분 이상씩 서너 번 반복해서. 자연스레 음악이 함께할 수 밖에 없다. 걸을 때는 약간 비트가 있는 음악을 고르고, 잠시 한강을 바라보며 쉴 때는 느리고 유장한 느낌의 음악을 선택한다. 산책하면서 잠깐씩 멈춰 설 때가 잦다. 인상적인 음악이 흐르면 곡 제목을 체크하고, 스마트폰 메모장에 옮겨적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내 리스트에 포함된 음악은 그야말로 ‘무진장’이다. 제안 하나 하고 싶다. 그대여,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한강 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본 적 있는가. 그 시간에 음악과 함께해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번도 없다면 꼭 해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내가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한 순간들, 여러분에게도 아주 가끔은 찾아올 것이다. 나에겐 한강을 배경으로 음악 들으며 노을을 바라볼 때가 그렇다. 살아서 음악 듣는 자의 기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누구에게나 평생 가져가는 습관 하나 정도는 있는 법이다. 한데 거기에는 반드시 필수 요소 하나가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름 아닌 ‘소확행’이다. 소확행 획득이 가능하지 않은 평생 습관이란 없다. 나에겐 한강 변과 함께하는 음악 감상이 곧 소확행이다. 이번 주말에도 좋아하는 허클베리핀의 [오로라피플](2018)을 한강과 노을을 바라보며 들어야겠다. 내가 꼽는 2018년 최고 앨범 중 하나이기도 하다.

01. 항해 02. 누구인가 03. 너의 아침은 어때

04. 영롱 05. Darpe 06. 라디오(Radio)

07. 길 08. 오로라(Aurora) 09. 오로라피플(Aurora people)

10. 남해

대중교통

U2,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2000)

운전면허가 없다. 딸 생각도 없을뿐더러, 운전이 무섭다. 남이 해주는 운전도 무섭지만 내가 하는 것 보다는 좀 낫다. 내가 느끼기에 서울에서 자가 운전하면 평균 수명이 최소 5년은 줄어들 것 같다. 스트레스는 장수의 적이다. 나는 운전으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택시 잡을 때도비슷하다. 기사가 F1 레이서에 빙의라도 된 것처럼 질주하면 곧장 좀 천천히 가달라고 제동을 건다. 예외는 없다. 이런 식으로 죽기는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는 없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잡고, 급할 때는 택시를 부른다. 집을 나서자마자 귀에 꽂은 이어폰을 통해 계속해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 택시에서도 음악을 듣냐고? 물론이다. 나는 택시 기사가 하는 정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어떤 기사는 팩트도 다 틀리는데 자기가 옳다고 박박 우긴다. 최선의 대응은 역시 이어폰을 꽂는 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너 피스Inner Peace라고 <쿵푸팬더>의 사부인 ‘시푸’도 말하지 않았나. 택시, 지하철, 버스 가릴 것없이 시끄러운 세상이다. 이런 나에게 이너 피스를 선물해주는 존재, 이게 바로 음악의 힘 아니겠는가. 살다 보면 소통보다는 차단이 간절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내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언젠가는 진정한 이너 피스에 도달할 수 있겠지”, 간절히 소망하면서. <Peace on Earth>가 수록된 U2의 2000년 작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가 배경음악으로 적당할 듯싶다.

01. Beautiful Day 02.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

03. Elevation 04. Walk On 05. Kite

06. In A Little While 07. Wild Honey 08. Peace On Earth 09. When I Look At The World

10. New York 11. Grace

퍼플 레코드

R.E.M., [Monster](1994)

정말이지 기뻤다. 5%인지 10%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사장님은 20장을 사면 그 뒤부터 회원 할인이 된다고 하셨다. 마침내 도장 20개가 채워지는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아, 나는 이곳에서 평생 음반을 구입하겠구나.” 대학 시절 내내, 사회인이 돼서도 퍼플 레코드에서 앨범을 샀다.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언젠가 사장님은 내가 무려 15% 할인을 받는, VVIP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VIP가 아니고, VVIP다. 확언할 순 없지만 내 평생 VVIP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앞으로도 여기가 유일할 것이다. 이제 내가 사랑하던 퍼플 레코드는 없다. 줄어드는 판매량 속에 고민하던 사장님은 몇 년 전인가 오프라인 매장을 접었다. 온라인상에는 물론 존재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끔씩 홍대 앞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퍼플 레코드가 있던 자리를 괜히 쳐다본다. 2만원 정도가 모이면 곧장 퍼플 레코드로 달려가서 30분을 넘게 고민했다. 사고 싶은 건 수십 장인데 나에게 허락된 건 단 1장뿐. 손을 벌벌 떨면서 겨우 1장을 골랐다. 미국 록 밴드 R.E.M.의 [Monster](1994)를 구입했을 때도 엄청나게 갈등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샀던 앨범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이리라.

01. What’s The Frequency, Kenneth 02. Crush With Eyeliner

03. King Of Comedy 04. I Don’t Sleep, I Dream

05. Star 69 06. Strange Currencies 07. Tongue

08. Bang And Blame 09. I Took Your Name 10. Let Me In 11. Circus Envy 12.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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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작가)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