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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책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가끔씩 문자만 주고받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같이 걷지 않을래?”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바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왜? 어딜 걷자는 거지?’ 머릿속에 물음표만 한가득인 것도 잠시, 기분 좋은 가을 산책에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싶었다.
그리고 자판을 꾹꾹 눌러 답장을 전송했다. “그래!”
걸어요.
결국은 끝까지 읽지 못하고 중간에 덮어버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읽으며 걷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걸음마를 떼고부터 하루에 단 한번이라도 걷지 않은 적이 없다. 학교나 직장을 가거나 혹은 약속이 있지 않은 날에도 집 안에서 걷는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 있는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면서, 생리현상으로 인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로 잠깐이라도 걷는다. 아파서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한 날이라도 잘 생각해 보면 한번쯤은 침대에서 내려와 걸었을 것이다. 정말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걷는 상상을 하면서 설레곤 한다. 올 봄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라는 ‘벚꽃 엔딩’의 가사를 들으며 설레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봄에는 이렇듯 꽃비 날리는 길을 거닐 생각에, 여름에는 백사장의 하얀 모래를 밟을 생각으로, 가을에는 소복하게 쌓인 거리의 낙엽 위를 고독하게 걸어갈 생각으로, 겨울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에 발도장을 찍을 생각을 하며 우리는 행복해한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소리를, 발도장을 찍는 순간에 나는 뽀드득 하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낭만적인 걷기도 있지만 분명 고통스러운 걸음도 존재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물 한 통을 긷기 위해 수킬로미터를 맨발로 걷는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살기 위해 걸을 뿐이다.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베토벤은 작곡을 하다가 악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곤 했다. 전해지는 것처럼 그의 성격이 괴팍했다면 그 산책이 마냥 한가롭고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떠오르지 않는 악상을 찾으러 떠난 산책이었을 테니까.
이처럼 같은 행위이지만 ‘걷는다’는 행위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차례이다. 이번 가을, 당신의 걷기는 어떠한가? 당신은 왜 걷고 있는가?
10월의 걷기대회
9월에서 10월에 이르는 가을에는 유독 걷기대회가 많이 개최된다. 그만큼 걷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것. 처음 걷기대회에 참가하자는 친구의 제의에 미디어 매체에서나 보던 마라톤대회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취재진이 몰리고 선수들은 진중하고 열정적인 그런 장면. 하지만 실제로 참가했던 걷기대회는 그저 다 같이 걷기 좋은 코스를 가볍게 산책하는 분위기의 행사였고 평소 하던 산책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같이 걷는 동행인이 많다는 사실만이 평소의 산책과 다른 점이었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길가에 피어난 꽃, 구름의 모양 등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관찰하며 걷다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니 10월의 주말에는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간단한 간식과 모자, 손수건, 가벼운 물통 등을 챙겨 걸으러 나가자. 가장 중요한 것은 걷기에 편안한 복장!
체지방측정, 건강상담 등의 부대행사를 운영하기도 하니 관심이 있다면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걷기 좋은 길
주말 오후의 산책길로 이태원을 택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가득한 앤티크 거리, 수입 식료품이 늘어선 거리도 좋지만, 이번에는 가보지 않았던 곳을 걷고 싶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태원 중심가를 벗어나면 또다른 분위기의 동네가 있다. 육군중앙경리단이 있는 곳이라 하여 ‘경리단길’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녹사평역 2번 출구 건너편에 위치한다.
레몬에이드로 유명한 스탠딩커피Standing coffee를 지나면 곧 오른쪽으로 큰 길이 나타나는데 그 곳이 경리단길의 초입. 작은 카페들이 늘어선 거리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성도약국을 중심으로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왼편 길로 빠지지 않고 차도를 따라 계속 해서 걷다보면 폴란드 그릇 판매점부터 모자 전문 샵, 빈티지 샵, 플라워 작업실등 다양한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왼쪽 길은 이태원 2동 주민센터, 연립주택 등이 있는 마을로 이어진다. 허나 오른쪽 길과 왼쪽 길 모두 결국에는 이어져 있으니 어느 길을 택해도 상관은 없다.
오른쪽 길을 따라 언덕길을 넘어가면 남산공원으로 이어지지만 중간에서 병영 슈퍼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의 오른편으로는 작은 텃밭이 있는데 여느 도심 속 텃밭처럼 네모진 모양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의 경계선을 가진 공간이다. 그 위로 보이는 작은 빌라의 베란다에는 텃밭이 내려다 보이는 방향으로 소파 두 개가 놓여 있고 저 멀리에 남산 타워가 보인다.
걷다가 마주친 계단을 올라오는 외국인 가족, 정자 밑에 모여 계신 노인들, 짝다리를 짚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는 어린 아이는 그저 그 동네 주민들의 일상일 뿐이다. 사실 경리단길 하면 아티스트들의 작업실과 카페, 편집샵이 곳곳에 들어선 동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다녀 본 경리단길 골목골목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어릴 적 살던 동네가 떠오르는 그런 곳이었다.
사진 찍는 나를 불러 대문 앞에 예쁜 꽃을 두고 왜 엄한 것을 찍냐고 웃으시던 할머니, 일렬종대로 선생님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으로 뛰어들어가던 아이들, 꽃이 가득한 가판대의 아주머니를 만나고서는 산책을 왔다기보다 한 동네의 삶을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조심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곳에 날마다 메뉴가 바뀌는 작은 식당, 빛이 가득 들어오는 테라스가 있는 맥주집, 쇼윈도우로 엿보이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있는 한 경리단길은 몇 번이고 가야 할 것만 같다. 그러므로 타협안은 주민들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그렇지만 마음만은 즐겁게 걷는 것!
글 이수정
사진 이공, 그림 애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