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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은 집보다 더 ‘나’를 투영하는 공간인지 모른다. 타인과 타협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으로 꾸리며 내 시간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둥지. 북촌 끝자락, 오래된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서윤정 작가는 나를 닮은 공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일의 시작을 알리는 커피잔, 쪽잠을 자는 소파, 작업실 창으로 보이는 식물, 일이 안 풀릴 때 들춰보는 책과 옛 작업까지 켜켜이 쌓여있다. 내가 누구인지 흔들리다가도 이곳에 오면 자신을 지키게 된다는 그의 울타리. 기분 좋음은 또 다른 좋은 걸 만들어낸다.
인터뷰 전에 공간을 먼저 둘러보고 싶어요. 늘 집을 소개해 왔는데, 작업실은 처음이에요.
이곳은 1960년대에 지어졌대요. 조각가 김정숙 선생님의 자택이었다가 작업실도 증축해서 썼던 걸로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자택으로 쓴 공간은 적산 가옥과 한옥이 섞인 형태이고, 새로 지은 곳은 양옥이에요. 원래 자택과 작업실 사이에 문이 있었는데, 저는 가벽을 세워 두 공간을 나눠서 쇼룸과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이전 작업실은 한남동에 있는 작고 허름한 곳이었어요. 우연히 성곡미술관 근처에 왔다가 부동산에 가봤어요. 사장님께서 동네 구경을 시켜주시더니 뷰가 좋은 집이 있다며 이곳을 보여주셨어요. 집이 너무 예쁜 거예요. 마당도 있고요. 어머니가 부동산과 집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여기가 좋겠다며 권유했어요. 사실 작업실로 아주 이상적인 공간은 아닌데 전원생활의 로망이 있어서 결정하게 되었어요. 보수 공사를 하느라 1년 정도 공간을 다듬었고 2008년 3월쯤부터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작년 <May I?>전시를 보러 여기에 와봤어요.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이 있는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오니 튤립과 수국이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이 보이더라고요. 넋을 잃고 내부에 들어섰는데, 한옥과 형형색색의 페인팅이 잘 어우러져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요.
정원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처음 왔을 때 아주 오래된 감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공사하기 전부터 와서 감나무 주변으로 수국, 장미, 아스파라거스, 겹벚꽃나무, 체리나무, 복숭아나무, 작약, 튤립 등을 심었어요. 아버지가 식물을 좋아하고, 온 가족이 정원 가꾸는 데 진심이어서 밤낮으로 와서 물 주고, 식물 심고, 주말마다 원예 쇼핑하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어요. 열심히는 했는데 조경에 대한 이해가 없고 하나하나 배우면서 하다 보니까 좀 정글처럼 보이긴 해요(웃음).
내 공간에서 전시를 열어보니 어땠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쇼룸을 상시 오픈해 두긴 했어요. 관광객들이 오시거나 아주 가끔 SNS로 궁금해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작년에는 코로나19도 있고, 제가 아기를 낳으면서 매일 오픈할 수가 없어서 닫아놓고 있다가 <May I?>전시하면서 다시 열었죠. 함께 기획한 Speakeasy Somthing 이리아 대표는 고등학교 후배예요. 같은 화실 다니며 친하게 지내다가 미국으로 가면서 연락이 끊겼는데, ‘서윤정회사’ 시작하고 다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어요. 몇 년 전 리아의 판화 전시에 갔다가 지나가는 말로 같이 전시하자는 얘기를 나눴어요. 친구가 제 작품과 공간을 마음에 들어 했고, 저도 리아가 가진 빈티지 포스터들이 좋아서 전시를 기획하게 된 거예요. 우리가 좋으니까 편하게 하자고 했는데 공간에 그림을 다 걸고 보니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쇼룸을 찾아오신 분들은 제 작업보다 공간에 관심이 더 많으신 거 같아요. 제 그림들이 크지 않거든요. 공간이 가진 힘이 세서 제 작업이 묻히는가 싶어 조금 서운하거나 속상할 때도 있었어요. 생각해 보면 대학원 때는 제 키보다 큰 작업들도 했는데, 여기 와서는 큰 페인팅을 거의 못 했어요. 학교 스튜디오는 넓었고, 지금 제 작업 공간은 작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작은 작업 위주로 하게 된 거 같아요. 또 서윤정회사를 만들면서는 회화 작업 외에 오브제 만드는 작업도 겸하다 보니 하나에 오래 집중하기보다 여러 개를 할 수 있도록 핸들링하기 편한 걸 선택하게 된 것도 있어요. 앞으로는 좀더 큰 작업을 해보려고 해요.
얼마 전에 <사물의 풍경>전시도 끝난 거죠? 작년, 여러 작가들과 모여서 다양한 장소에서 전시를 진행한 걸로 알아요.
<사물의 풍경>은 현대인에게 일상의 감각을 제안하는 주제로 저를 포함해 밍예스 프로젝트, 연진영 작가와 같이 했던 전시예요. 저는 선과선분 김민선 작가와 협업으로 만든 화병과 패브릭 몇 점을 전시했어요. 순수 미술과 디자인 사이 모호한 경계에 있는 작가들과의 전시라 물성은 달라도 조화로웠어요.
서윤정회사는 어떻게 만들게 된 거예요?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2006년 말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대학원 때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지?’ 하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미술은 비 실용 학문이잖아요. 진짜 유명한 작가가 돼서 미술관에 작품이 걸리거나 그림을 팔지 않는 이상 내가 하는 일은 우아한 취미 생활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하며 실용성을 고민하게 된 거죠. 답을 내리지 못한 채 한국에 와서 집 근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얻었어요. 회화 작업은 계속했지만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림이 창고에 쌓여만 가니까요. 처음 이 집을 고칠 땐 양옥은 회화 작업실로 쓰고 옆 동은 다른 사람에게 세를 놓을까 했는데, 완성되니까 아깝더라고요. 쇼룸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면서 쓸모 있는 페인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어요. 우선 내가 좋아하는 물건 몇 가지를 만들어 보자고 가볍게 시작했어요. 집에서 일상을 보낼 때 나한테 필요한데 구하기 힘든 걸 만들어 보기로 한 거죠.
이 공간 덕분에 서윤정회사가 만들어진 거네요. 고민하던 시간을 지나 작업실이 완성되고 여기서 그림을 그렸을 때 기분, 기억나요?
제일 처음에 여기 와서 한 작업이 서윤정회사에 선보일 토트백을 만드는 일이었어요. 토트백에 그림을 그렸는데 상쾌하다고 해야 하나,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이전 작업실은 빛이 안 들어와서 엄청 어두웠는데 여기는 온통 하얗고 밝잖아요. 쨍한 색깔로 페인팅을 했는데 속이 시원했어요. 제가 만든 공간이니까 여기 오는 게 너무 행복해서 오늘은 뭘 해볼까 기대하면서 오는 날이 많았어요. 즐겁게 작업하다가 시간이 돼서 집에 가야 하면 다음 날 아침에 빨리 가고 싶고 그랬죠.
저는 재미있는 공간에서 재미있는 시간이 만들어진다고 믿어요. 작업 테이블 앞에 정원이 바로 보여요. 식물의 작은 움직임이나 변화를 관찰하고 해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작업실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나요?
작업실에서 지내는 루틴이 있어요. 걷는 걸 좋아해서 아침에 버스 타고 국립현대미술관쯤에 내려요. 요 아래 편의점까지 걸어와 그날 먹을 걸 사서 올라와요. 들어오면 정원을 먼저 살피죠. 식물에 물을 주고 새로 핀 꽃을 보거나 변화를 구경하다가 안으로 들어와서 커피를 마시고 작업을 시작해요. 작업이 잘되는 날은 시간이 엄청 빨리 가요. 그때는 주로 밤까지 작업을 하지만 잘 안 풀리는 날엔 비슷한 작업을 하는 친구들을 초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거나 혼자 나가서 전시를 보고 주변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요.
애정을 쏟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특히 애착이 가는 자리가 있어요?
작업하는 책상이랑 지금 인터뷰하는 자리를 가장 좋아해요. 작업 책상이 있는 곳이 빛이 가장 잘 들어오고, 여기는 조금 어두운 편이에요. 여기서 낮잠도 자고 책도 읽어요. 쇼룸은 제가 늘 쓰는 공간은 아니다 보니 오래 머무는 공간에 애착이 더 많이 가나 봐요. 쇼룸 쪽에 메인 주방이 있어서 친구들과 음식을 같이 해 먹기도 했는데, 저기서 작업을 하진 않아요. 사람들이 오면 쇼룸은 항상 정리돼 있고 꾸며져 있어 예쁘다고 하는데 저는 실제로 사용하는 공간이 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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