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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디자이너 이기준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책이 있다. 글과 책 사이에는 사람이 있다. 글을 네모난 책으로 엮고, 잘 맞는 옷을 입혀주는 사람. 문자와 형태 사이를 잇는 북디자이너를 만났다.
다른 인터뷰에서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죠. 북디자인을 말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바흐Bach, 글렌 굴드Glenn Gould, 존 루이스John Lewis, 다니구치 지로たにぐち じろー, 무라카미 하루키むらかみ はるき,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을 좋아해요. 한 가지에 꽂히는 성향이 아니라 이들의 작업을 열심히 파고들지는 않아요. 간간히 듣고 읽고 보며 이런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감사하는 정도죠. 인류가 고안한 최고의 발명품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요. 이른 시간에 머리가 잘 돌아가요. 집이나 작업실처럼 익숙한 공간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전 작업은 카페에서 하는 편이에요. 아침 일찍 문 여는 카페가 드물어 늘 가는 곳만 가게 되는데 너무 익숙해져 필요한 만큼 긴장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돼요.
그렇다면 북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디자이너가 책의 표지만 하는 줄 아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디자이너는 책의 외형에 관한 모든 부분에 관여해요. 일의 흐름은 대략 이래요. 저자의 원고가 파일 형태로 제게 와요. 읽으면서 줄거리, 구조, 문체, 분위기 등을 파악해요. 그러면서 책의 판형(크기), 서체, 글자 크기, 여백의 비율 등을 구상하되 한 쪽에 할당되는 정보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염두에 둬요. 어려운 글을 빼곡히 채우면 독자가 답답해할 것이고, 쉬운 글을 성글게 채우면 읽은 게 없다고 여기게 되겠죠. 제목이 몇 단계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제목 글자의 크기, 앞 단락과의 간격 등이 달라져요. 글의 성격에 따라 읽기 편안하게 할 수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죠. 누구에게나 같은 옷이 어울리지는 않잖아요. 아무튼 책의 기본 구조가 나오면 그에 맞춰 본문 전체를 작업하고 표지를 만들어요. 책에 어울리는 면지(책의 표지와 본문을 연결하는 종이)도 정해야 하고 요새는 인터넷 서점에 보낼 표지 이미지와 sns에서 활용할 이미지를 만들기도 해요
북디자인에 사용되는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책에 사용되는 요소는 굉장히 많아요. 당연히 문자가 핵심이고 동그라미, 네모 등 약물(활자 가운데서 문자, 숫자 이외의 각종 기호, 구두점, 괄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은 물론 선이나 아이콘을 쓰기도 하고 책의 내용에 따라 사진이나 그림을 넣기도 하죠. 약물을 넣는다면 글자와 비슷한 크기로 할지, 더 도드라지게 할지, 색을 넣을지 말지 등 정해야 하는 요소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에요.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고려해야 할 관계가 더욱 복잡해지고요. 그리고 책을 책답게 해주는 주인공인 종이 역시 빼 놓을 수 없죠. 종이의 색이나 질감 자체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기도 해요.
생각보다 복잡하고 꼼꼼함을 요하는 작업이네요.
저는 디자인은 일종의 번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처럼, 이를테면 글이나 음악을 그래픽으로 옮기는 거죠. 원래의 콘텐츠에 디자이너의 레이어가 덧붙는 건데 그 레이어는 투명해야 해요. 불투명해서 원래의 콘텐츠를 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예요. 하지만 레이어 자체가 없으면 안 돼요.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필요 없죠.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에요.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잖아요. 그 차이에서 더 많은 생각이 피어나 또 다른 콘텐츠를 만들어 내요.
‘유유출판사’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책을 디자인했어요. 책들이 전반적으로 서체가 큰 편인데 이유가 있나요?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같은 전자기기 때문에 노안이 빨리 온다고 해요. 유유출판사 대표도 작은 글자는 점점 읽기 힘들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유유에서 펴내는 책은 주로 인문, 역사, 철학 등 공부하는 책들인데, 공부는 평생 하는 거잖아요. 모든 연령대가 오래도록 보기 좋은 책을 만드려고 서체를 크게 쓰는 편이에요. 요즘은 독자들이 한 장에 오래 머물러 있는 걸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책장을 넘기는 재미도 있어야죠.
《고양이의 서재》에서 세로 쓰기 디자인이 인상적이었어요.
요즘은 가로쓰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런데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신문은 세로쓰기를 했거든요. 한자, 일어, 한글은 가로, 세로 양방향으로 쓸 수 있는 문자에요. 지면을 풍경이라고 할 때 가로와 세로 둘 다 쓰면 풍경을 더 다채롭고 풍성하게 조성할 수 있어요. 일본이나 중국에서 나온 잡지를 보면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유기적으로 써서 지면에 활력이 돌거든요. 《고양이의 서재》 할 때는 제목용으로 선택한 폰트가 세로쓰기에 적합하게 디자인된 폰트였어요. 우리가 보통 쓰는 폰트로 세로쓰기를 하면 ‘어’일 때와 ‘아’일 때 모음의 세로 획 위치가 달라서 글자가 흐름선이 어긋나요.
디자인 작업 중 표지에 그림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가능하면 혼자 다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지금까지 일러스트레이터와 작업을 할 때 흡족하게 나온 적이 없어요. 나는 이런 생각으로 요청하지만, 듣는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해 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죠. 저 역시 출판사의 요청대로만 하는 건 직무 유기라고 여기는걸요.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디렉터가 자기 권한으로 끌고 나가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기를 어려워해요. 생긴대로 살아야죠. 저한테 맞지 않는 방법은 안 쓰기로 했어요.
주로 소설보다는 인문 서적을 많이 작업하시는 데 의도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소설 하고 싶어요(웃음).
소설에 일러스트가 많이 들어가잖아요.
그것도 좀 이상해요. 소설의 성격은 다채롭기 이를 데 없는데 전부 같은 옷만 입혀 놓은 것 같아요. 몇해 전에 《핸드메이드 픽션》이라는 소설의 표지를 한 적이 있어요. 첫 시안을 보였을 때 편집자가 그러는 거예요. 이건 소설 표지가 아니라고.‘소설 표지라는 게 따로 있나? 소설 표지는 뭐지?’라는 생각을 했죠. 기나긴 과정 끝에 제 마음에는 들게 나왔지만 더 이상의 작업 의뢰가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웃음).
소설이나 인문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런 것들이에요. 특정 그림을 머릿속에 이미 지니고 있는 것. 책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어떤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몹쓸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보통 자기소개를 하면 ‘무슨 일을 하는 아무개입니다.’ 혹은 ‘어느 회사에 다니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죠. 또는 친구가 결혼한다고 하면 대부분 ‘뭐 하는 사람이야?’ 하고 물어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무의식에 각인된 것 같아요. 자신보다는 조직에 무게가 실려 있어요. ‘소설 표지라면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생각도 그런 맥락에서.
그걸 경계하려고 노력하시는 거죠?
네. 그래서 어떤 그림을 미리 그려두지 않으려고 해요. ‘소설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많이 쓰니까 여기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먼저 찾아야지’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소설 표지는 이런 것이라는 사례를 하나 더 만듦으로써 그 틀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거잖아요. 새로운 소설 표지를 접할 가능성이 더 줄어들겠죠. 다른 게 자주 눈에 띄어야 ‘아, 이렇게도 할 수 있네’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사실 ‘절대로 그림은 쓰지 않겠어’ 하는 다짐도 경계해야 하는 시점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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