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생활 2개월 만에 다시 배낭을 꾸렸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고, 나는 졸지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늘 미약했다. 서핑왕이 되겠다며 발리로 떠났지만 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나란 인간은 재능도 끈기도 쥐뿔도 없다는 것을. 발리 생활 두 달째, 우기가 시작됐다.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치고 불타오르고, 또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치고 불타오르기를 반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옷이 젖는 게 속상해서 발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은 이제 막 건기가 시작됐다고 했다. ‘서핑은 실패했지만 등산에는 소질이 있을지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네팔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짐을 꾸리는데, 갑자기 태국 음식 솜땀이 먹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네팔은 음식이 부실할 테니 중간 경유지인 태국에서 맛있는 거나 실컷 먹고 넘어가자고 계획을 바꿨다. 그렇게 네팔행과 태국행 비행기 티켓을 동시에 끊었다.
팬데믹 이후 처음 들른 태국은 여전히 맛있고 여전히 혼잡하고 여전히 신났다. 방콕을 먹고 치앙마이를 산책하고 빠이에서 춤췄다. 10년 만의 빠이는 예전 그대로였다. 작고 소박한 식당과 아늑한 풍경, 느릿한 시골 사람들, 사원의 기도와 저녁 새의 울음이 함께 들리는 저녁이 좋았다. 걱정이 없는 것이 유일한 걱정일 정도로 단조로운 일상. ‘이대로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면···.’ 생각하며 고양이 영상에 ‘좋아요’를 누른 바로 그날 아침, 사고가 일어났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일출을 보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검정개 한 마리가 차도로 뛰쳐나왔다. 감전된 듯 날뛰는 검둥이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하게 꺾었고, 나는 오토바이와 사이좋게 한 몸이 되어 아스팔트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쪽팔리니까 얼른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바닥을 짚었는데, 두 팔이 힘없이 꺾이며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런 나를 보며 검정개가 하품을 했다. “뻑킹 독! 우라질 뻑킹 독!” 나는 잔뜩 화가 나서 엉엉 울었다.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고 나온 동네 주민이 나를 일으켰고, 그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후송됐다. 검사 결과 쇄골과 갈비뼈, 날개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어깨 인대가 파열되고, 폐에서도 피가 나오는 중이라고 했다. 혈압은 200 밑으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끝인가.’ 주마등 같은 걸 느끼며 엑스레이 사진을 봤는데, 부러진 쇄골이 웃는 모양으로 구부러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의사는 치앙마이의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했다. 빠이에서 치앙마이까지 762개의 고개를 넘어가는 동안 나는 거의 762번 기절했다. 마약성 진통제를 세 방이나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구제 불능의 약쟁이 같은 몰골로 도착한 치앙마이 병원에서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병원비를 알아보니 천만 원이 훌쩍 넘을 거라고 했다. 나는 가난했으므로 귀국을 선택했다. 하필 한국까지 직항으로 운행하는 건 아시아나항공뿐이었다. 국적기의 비싼 티켓 가격 때문인지, (마약성) 진통제의 놀라운 효과 때문인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난생처음 아시아나항공에 올라탔고, 그걸로 나의 여행은 끝이 났다.
한국에 돌아와 종합병원 흉부외과에 입원했다. 폐의 피가 빠지기 전에는 부러진 뼈를 수술할 수 없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뼈가 동그랗게 말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보다 집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왔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오빠 괜찮아?” 동생의 전화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버거킹 좀 사다 줘.” 평소에는 맥도날드밖에 먹지 않는데, 웬일인지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흉부외과 입원실은 노인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용변도 가리지 못했다. 병원 규칙상 가족 면회가 금지된 곳이어서 간호사가 모든 수발을 들었다. 커튼 너머로 환자와 간병인 사이에 자주 다투는 소리가 났다. 병원에 입원하고 이튿날 밤에는 바로 옆 침상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의사와 간호사의 대화를 들어보니 고인의 가족은 하루 뒤에나 도착한다고 했다. 내 앞자리 할아버지는 며칠째 누워만 있어서 등에 욕창이 났다. 밥, 숨, 똥,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풍경이었다. 몇 해 전 할머니의 임종 이후 한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곳에선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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