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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눈길 닿는 곳마다 작은 것들이 눈에 들었다. 집안 모든 곳이 쓸모를 가진 작은 물건의 천국이었다. 이건 귀엽고, 저건 멋지고, 그건 근사하고…. ‘깨알 같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은 것들을 위한 방. 가느다란 샤프심부터 무언가 담겨 있었을 비닐봉지까지 그녀의 방에선 모두 문구가 된다. “내가 문구라고 부르면 문구인 거지요!” 뭐든 문구로 탈바꿈할 수 있는 그녀는 문구가 취미라 말하지만, 어쩌면 특기인 건 아닐까. 작은 것에게 곁을 내주는 사람, 작은 것의 쓸모를 발견하는 데 특히 능통한 사람, 문구인 김규림을 만났다.
“문구의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에 문구가 아닌 게 없어요.”
“전자 제품이 아무리 발달해도 문구가 설 자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문구인 김규림’을 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제품 기획자, 마케터로 활동해온 김규림입니다. 그리고 《아무튼, 문구》를 쓴 문구인이죠(웃음). 기획자나 마케터처럼, 그 포지션에서 활동하면 어떤 사람이든 불릴 수 있는 명칭보다는 이왕이면 저를 표현할 타이틀을 갖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문구 회사 홈페이지에서 “안녕하세요, 문구인 여러분!”이라는 문장을 보게 됐고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죠. 조금 간지럽기도 하지만, 괜스레 사명감이 드는 명칭이어서 사용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듣는 사람은 문구인이라는 말을 낯설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다들 ‘문구인이 뭐야?’ 하더라고요. 문구인으로 소개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친구들은 지금도 우주인도 아니고 문구인이 뭐냐면서 놀리기도 해요(웃음). 그래도 활자로 쓰면 한자 병기가 가능하니까 텍스트로 소개해야 할 때 주로 사용하고 있어요. 사실 입 밖으로 자기소개를 할 일이 많진 않으니까요.
기습 질문! 가장 최근에 산 문구는?
바로 어제 산 노트요. 1년간 베트남 파견을 마치고 엊그제 귀국했는데, 오랜만에 온 서울이니까 그동안 놓친 문구 트렌드를 다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제가 자주 다니던 문구점부터 훑어봤거든요. 그러다 편집숍 플라잉 타이거Flying Tiger Copenhagen에서 커버가 코듀로이인 노트를 발견했어요. 계절과 잘 맞는 예쁜 노트를 저렴하게 구입해서 온종일 기분이 좋았죠.
‘내가 문구라고 부르면 문구인 거지요’라는 문장이 참 좋았어요. 문구에 정해진 틀이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나 문구인이 될 수 있다는 뜻 같기도 했죠.
예전에 문구라고 불린 것들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뜻하는 말이어서 그 경계가 서예에 국한돼 있었어요. 하지만 요새는 스티커나 그걸 담는 파우치, 심지어 아이패드나 공구도 문구라고 부르잖아요. 저는 뭔가를 기억하거나 창작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다 문구라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서는 책상에 놓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문구처럼 보이죠. 개인적으로는 영감을 주는 모든 것, ‘나도 이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까지 문구로 취급해요. 매일 보는 달력이라든지, 보면 기분 좋아지는 엽서, 그 외에도 영감을 주는 거라면 뭐든지요.
문구는 아니지만 문구처럼 쓰는 물건도 궁금해요.
빈티지 제품을 좋아해서 을지로에 있는 방산시장에 자주 가는데, 이번에 호두과자 봉투 백 장을 2천 원에 사 왔거든요. 그 안에 물건을 담기도 하고, 친구에게 선물할 때 포장지 대용으로 곧잘 사용하고 있어요. 요새는 인테리어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져서 다이소 같은 데만 가도 예쁜 소품이 많아요. 디자인이 예쁜 행주 집게를 종이 집게로 쓰거나 책상에 오브제로 두기도 하죠. 가게에서 받은 포장지나 비닐봉지도 벽에 붙여놓으면 멋진 포스터처럼 보여요. 문구의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에 문구가 아닌 게 없거든요.
다소 개인적인 견해지만 문구 하면 두 가지 취향이 떠올라요. 귀엽고 아기자기하거나 고급스럽고 심플한 종류죠. 보통은 둘 중 하나를 선호하는데, 문구인답게 양쪽을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무튼, 문구》를 쓰면서 제 취향을 깨달았어요. 원고를 쓰기 위해 책상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거든요. 어릴 때부터 귀여운 걸 좋아해서 제 취향은 무조건 아기자기한 쪽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오랫동안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건 가죽과 황동처럼 소재가 좋은 것이거나 클래식이라 불리는 거더라고요. 화려하고 팬시한 제품, 특히 눈코입이 달린 제품은 지금도 열심히 사들이지만, 오래 마음 붙일 단단한 제품도 꾸준히 찾는 걸 보면 역시 제 취향은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 같아요. 어느 한 쪽만 좋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최근에는 문구 제작의 장벽이 낮아졌어요. 소량의 문구를 직접 제작해서 판매하는 사람도 많아졌고요.
저는 스타일 면에서 조악한 제품을 좋아하지 않아요. 훌륭한 제품인데 프린트가 엉망이어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그럼 좀 속상하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나온 훌륭한 제품들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테니 의미가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이렇게 다양한 문구가 쏟아져 나온다면 사람들도 문구를 보는 눈이 점점 높아질 테고, 결국 더 좋은 문구가 나올 거라는 기대도 생겨요. 비전문가의 제품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할 때도 많기 때문에 응원하고 싶어지죠.
취미가 직업이 되는 건 꿈이자 독이라고 하던데, 문구 기획자로 일하는 건 어땠어요?
어릴 때부터 문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문구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하고 보니 디자인은 저랑 잘 맞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더 좋은 문구가 나오도록 도와주고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을 선택하게 됐어요. 물론 아직도 디자이너가 되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작은 실수가 나오면 기획한 저도 마음이 아프지만 함께 일한 디자이너들은 훨씬 크게 괴로워하더라고요. 역시 저는 아이디어를 내고 새로운 걸 기획하는 게 좀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여러 이유로 실현되지 못한 아이디어도 있을 것 같아요.
만들어보고 싶어도 국내엔 제작할 수 있는 업체가 없어서 만들 수 없는 물건도 있었고, 꽤 오래 근무했던 일터인 ‘배민문방구’의 특성상 카피가 무조건 필요한데 넣을 만한 글귀가 없어서 발전시키지 못한 기획도 있었어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아이디어도 수두룩한데 투두리스트to-do list에 가득 적어놓고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죠.
1년간 머문 베트남에서의 문구 생활은 어땠나요?
문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왔지만, 그 깊이를 깨달은 건 이번 해외 파견 때였어요. 베트남에서 첫 주를 보내고 이상하게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땐 일요일이면 하루 마무리로 늘 문구점에 다녀왔어요. 어떤 게 새로 나왔나 훑어보면서 자극을 받곤 했는데, 그걸 못 한다고 생각하니 1년 동안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하나 걱정되더라고요. 게다가 베트남은 문구 불모지라고 불린다는데…. 좌절했죠. 그러다 문득, 베트남에도 학생이 있는데 어떻게 문구가 없겠느냔 생각이 들었어요. 가까운 데 있는 건축 대학, 도매시장 같은 델 무작정 가보니까 지금까지 봐오던 거랑은 스타일이 다른 문구 제품이 꽤나 많이 보였어요. 형광 색상을 전면에 뿌린 제품 같은 거요.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도매시장에 널려 있던 대왕 집게요. 조그마한 게 커지거나 커다란 게 미니어처로 나오면 재밌잖아요. 제 손보다도 큰 사이즈인데, 쓰레기통에 쓰레기봉투 고정할 때 쓴다더라고요. 하나에 오백 원이었는데, 두 개를 사서 책상에 오브제처럼 두고 있어요. 베트남의 문구 시장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럽이나 일본 문구점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어요.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여서 갓 만든 다른 나라 문구를 보는 일도 많았고요. 미국에서 사온 컴포지션 노트에 왜 ‘Made in Vietnam’이 적혀 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갓 만들어진 팔딱팔딱 뛰는 문구들을 보고 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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