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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이 가득 꽂힌 벽면, 공연 포스터가 질서없이 붙어 있는 어둑한 공간. 사람들은 또렷한 자리 없이 서거나 앉아서 눈앞을 보고 있다. 기타와 베이스를 무대에 내려 두고 마이크를 매만지던 네 사람이 공연을 시작하겠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부산에서 온 세이수미입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영국으로, 미국으로, 유럽 전역으로, 대만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친구들에게 부산은 곧 집이고 가족이다. 지구 구석구석, 더 멀리 나아가도 떠나길 택하는 대신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는 친구들. 부산은 그런 그들에게 언제나 느긋하게 말한다. “잘 갔다온나.”
서울 공연장에서만 보다가 부산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워요. 꼭 집에 초대받은 기분이에요.
수미 만나서 반가워요. 부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여행 오는 것 같아서 즐거웠어요. 포토그래퍼가 작업실에서 Say Sue Me 철자를 보곤 놀라더라고요. Sue Me, ‘날 고소해라.’(웃음). Sue Me에는 ‘마음대로 해라.’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던데요. 지금부터 마음대로 세이수미를 소개해 볼까요?
병규 마음대로 하라니까 진짜 마음대로 해볼게요.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이수미라고 합니다. 저는 기타 치는 김병규고요. 하고 보니 마음대로라고 할 것도 없네요(웃음).
수미 부산 사람 넷이 모여 음악 하고 있어요. 저는 보컬 최수미입니다.
성완 부산의 딸과 아들, 세이수미입니다. 저는 드럼 치는 임성완이에요.
재영 음…. (병규를 가리키며) 세, (재영과 성완을 가리키며) 이, (수미를 가리키며) 수미. 병규 형님이 세 명분을 하고 계시고, 저랑 성완 씨는 두 명이고, 수미는 누나 이름이니까…. 저는 ‘이’ 중 하나를 맡고 있는 베이시스트 김재영입니다.
재영 씨 소개, 굉장히 새로운데요(웃음). 방금 부산에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서울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은 굳이 서울 출신이란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은 지역으로 소개하게 되는 걸까요?
병규 꼭 지역성을 나타내려는 건 아닌데, 어쨌거나 저희가 서울 팀은 아니니까요. 서울엔 모든 게 다 있어서 곧잘 기준이 되는 것 같아요. 저흰 그 기준에 속하지 않으니까 부산에서 왔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거고요.
성완 뭐든 소개할 때 수식할 게 있으면 편하잖아요. 저희 스스로 부산에서 왔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매체에서도 저희를 소개할 때 ‘부산’을 자주 활용하는 것 같아요. 서울에 워낙 많은 게 몰려 있고, 그건 공연이나 뮤지션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서울이 아닌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지역으로 이야기하면 좀 특별한 느낌이기도 해요. 근데 생각해 보면, 외국 밴드에겐 ‘어디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게 당연한 일이어서 그렇게까지 새삼스러운 일 같지는 않아요. 거긴 워낙 많은 도시가 있고 도시마다 활동하는 뮤지션도 다양하니까요.
재영 맞아요. 저도 부산 밴드라고 소개하는 게 특별한 일 같지는 않아요. 반대로 서울 밴드가 부산에서 공연하면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공연하는 곳이 기준이 된다는 생각도 드네요. 세이수미 초창기 때 “서울에 (공연하러) 안 와도 되는 문화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죠. 그때에 비해 지금 부산 공연 문화는 어때요?
수미 활동 시작했을 때랑 비교하면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여전히 저희는 서울로 당연하게 공연하러 가고 있거든요. 사실 서울에 안 가도 되는 분위기…라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 같아요. 다만 서울에 집중되고 그쪽에 의존하는 경향이 좀 덜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해요. 가장 큰 이유는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어서지만, 사실 어디든 불러주는 데가 있으면 저희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호 주제어가 ‘부산’이에요. 식상한 질문이지만, 네 분은 부산이라고 하면 어떤 게 떠올라요? 성완 이 대답 역시 식상하지만, 바다죠. 여기서 5분만 걸어가면 광안리 바다가 펼쳐지는데 매일 보는데도 좋아요. 서울 사람들은 동해 보러 많이들 가시는데요. (고개를 저으며) 남해 바다는 또 달라요. 부산 바다는 남해랑 동해 경계에 있는데 그게 매력적이거든요. 아, 그리고 부산엔 산도 많아요. 산이랑 바다에 둘러싸인 도시여서 고바위가 많죠. 생활하기엔 불편한데 부산에 여행 오시는 분들은 그런 지형을 많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고바위요?
병규 경사진 언덕을 고바위라고 하는데, 사투리인가? 서울에선 안 쓰나요? 잘 모르겠네요. 표준어처럼 굳어져서 사용하는 말이에요.
수미 일본어인가? (검색해 본다.) 전북 사투리로 언덕배기래요. 근데 일본어에서 온 것도 맞대요.
병규 부산이 일본 말의 잔재가 가장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미 저는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일본어를 정말 많이 들어요. 대화의 5퍼센트 정도는 일본 말이죠. 할머니는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배우셨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사용하시더라고요.
저희 부모님도 다꽝이나 다마네기 같은 단어는 자주 사용하세요.
수미 저희 할머닌 다꽝만 아시고 단무지는 모르실걸요(웃음)?
부산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부산에 사는 사람한테 ‘부산 하면 뭐가 떠올라요?’ 했을 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것이 당연한 거 같기도 해요.
수미 사실 집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가족들 얼굴 생각나고요. 바다도 항상 여기 있는 거니까 특별하지 않지만, 타지 사람이 온다면 소개해 주고 싶은 곳이죠. 돼지국밥도 저한텐 평범한 식단인데 막상 누군가에게 소개해야 한다면 꼭 이야기하게 되는 먹거리 중 하나고요.
병규 다들 수미랑 비슷할 것 같아요. 산이랑 바다가 같이 있는 곳이 전 세계에 부산이 유일할 정도로 드물다고 하던데, 이런 정보는 저희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이어서 뭘 소개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네 분 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만큼 나만의 공간이나 장소도 있을 것 같아요. 어느 인터뷰에서 병규 씨가 ‘토함산 레코드’ 이야기하신 게 꽤 인상 깊었어요.
병규 아, 토함산 레코드(웃음).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 반송이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거기가 말 그대로 좀 험한 동네였어요. 그 당시 기타 배우면서 음악 듣던 시절이라 하굣길에 자주 들르던 레코드 숍인데요. 한두 평이 채 안 되는 곳이었는데 매일 학교 끝나면 들렀다 집에 가는 게 저만의 루트였어요. 그때만 해도 CD보다는 카세트테이프 위주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죠. 매일 들르다 보니까 가게 아주머니랑도 친했고, 저한텐 일상적인 공간이었죠.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 동네에 가지 않아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없어졌겠죠? 근데 이제 토함산 레코드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오프라인 레코드 숍을 보긴 힘들어요. 교보문고에 있는 핫트랙스처럼 큰 데가 아니면 다 사라지고 없죠.
수미 저는… 금정산이요. 부산은 어느 동네엘 가도 산의 접근성이 굉장히 좋아요. 이 작업실이 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역 이름도 ‘금련산역’이고요. 그 옆으로 조금만 더 가면 황령산이 있고, 서면도 황령산으로 연결돼 있어요. 저는 오랫동안 범어사가 있는 금정산 아래 살았어요. 금정산 산책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하죠. 요즘도 왕복 한 시간 코스로 즐겨 걷고 있어요.
재영 저도 금정산 얘기하려고 했는데(웃음). 둘이 같은 동네 살거든요. 한번은 산책 겸 산에 올랐는데, 내려가는 길에 수미 누나를 만났어요. 원래 둘이 다른 코스로 다니거든요. 누난 좀더 예쁘고 아기자기한 길이고 저는 약간 삭막하고 꼬불꼬불한 코스인데, 최근에 누나 코스로 몇 번 다녔더니 마주치기도 하더라고요.
성완 저는 특별하게 애정을 가진 공간은 없지만 전포동 좋아해요. 거기 카페가 많아서 지금은 전포 카페거리라는 이름도 붙었는데요. 이름 붙기 전부터 자주 가던 곳이라 그 동네가 번화가가 되는 걸 지켜보기도 했어요. 제 작업실 겸 학원이 거기 있어서 친숙한 동네기도 하고요.
수미 지금 부산에서 가장 핫한 동네예요. 전포동에서 카페 투어 하시는 분도 많고, 관광객도 많이 몰리는 곳이죠. 캐리어 끌고 다니는 분도 자주 보여요.
세이수미는 ‘작설원’이라는 곳에서 차랑 맥주를 마시다가 “심심하면 밴드나 하자.”면서 결성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작설원도 부산에 있는 공간인 거죠?
수미 네, 남포동에 있는 찻집이에요. 정확히 언제 오픈했는지 모르겠지만 80년대 후반 즈음 생긴 걸로 알고 있어요. 옛날엔 부산에서 시내 나간다고 하면 남포동이었거든요. 원장님 혼자 오랫동안 운영하고 계신데요. 지난주에도 다녀왔는데, 제가 다니던 초창기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테이블이 있고, 캄캄하고….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져요.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오래된 컴퓨터로 직접 선곡할 수도 있고요. 작설원에서 결성됐다는 소개 글을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굉장히 많은 게 생략된 글이에요. 작설원에서는 공식적으로 맥주를 팔지도 않고, 단골이나 원장님 아는 사람이 왔을 때만 마실 수 있거든요(웃음). 소개 글만 읽으면 저희 멤버들이 작설원을 자주 다니는 것 같지만…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넷이 함께 작설원에 간 적은 없어요(웃음).
그때 “수미 말하는 목소리가 괜찮으니 보컬을 해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수미 그건 맞아요(웃음).
병규 그 이야기를 한 건 전데요. 그 당시엔 저희 둘이 친하질 않았거든요.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는 잘 모르지만 목소리가 좋아서 그랬던 거 같아요. “수미 씨가 보컬을 해보는 게 어떨까, 목소리도 좋던데.” 하고요.
작설원에서의 멤버는 이 구성이 아니었죠? 수미, 병규 씨는 원년 멤버지만 성완, 재영 씨는 밴드가 활동하던 중에 합류하신 걸로 알아요.
재영 그렇죠. 그 전엔 세이수미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했죠. 처음 본 건 2014년, 15년 즈음이었어요. ‘베이스먼트’라는 부산 펍에서 처음 봤죠. 그때 ‘아, 뭔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함께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세이수미가 공연한다고 하면 외국인이 많이 왔던 기억도 나요.
세이수미 공연이라 외국인이 많았던 건가요?
재영 원래도 부산엔 외국인 관객이 많은 편인데, 세이수미가 공연하면 유독 더 많았어요.
수미 부산에 있는 외국인들 다 모였죠(웃음). 이상하게 외국인들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계속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해서 외국 관객을 만날 일이 더 많았을지도 몰라요. 큰 공연장보다는 자유롭잖아요. 너무 옛날 얘길 하는 거 같지만(웃음) 재영이가 세이수미를 처음 봤다는 2014년 즈음이 막 수입 맥주 들어오던 시절이었는데요. 같이 맥주 마시면서 외국인 관객들이랑 노는 느낌으로 공연하곤 했어요.
요즘 부산의 공연 문화는 어때요?
수미 한창 외국인이 많이 오던 그 시절과 비교하면…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요.
병규 일단 공연할 만한 공간이 많이 사라졌어요. 재영이가 말한 베이스먼트는 부산대학교 앞에 있던 펍인데요. 음, 서울에서 비슷한 곳을 찾자면….
수미 ‘스트레인지 프룻’?
병규 거기도 베이스먼트에 비하면 공연장에 가까운 공간인데, 여하튼 베이스먼트는 좀더 펍 역할을 많이 하는 곳이에요. 술에 집중하는 거죠. 이제 부산엔 그런 공간도 거의 없어요. 부산대 앞에 라이브 클럽이 제법 있었는데 이제 운영하는 곳이 손에 꼽거든요. 펍 형식의 공연장은 광안리에 한 곳 정도? 경성대 근처에 그나마 평일에도 활발하게 공연이 열리는 ‘오방가르드’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도 제 살 깎아 먹어가며 유지하는 공간이에요. 사명감을 가지고.
부산에서 공연하기가 힘들어졌겠네요.
병규 신기하게도 부산에 기반을 둔 뮤지션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거든요. 장르적으로도 다양해졌고 연령대도 확실히 어려졌고요. 음악 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이 생기는데, 역설적이게도 공연할 공간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거예요. 오방가르드마저 없어진다면 부산에선 정말 공연할 곳이 한 군데도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죠. 그렇다고 공연장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요. 제가 많이 사라졌다고 하는 공간은 주도적으로 공연을 만들어 내고 운영해 나가는 곳들이에요. 부산은 서울과 달라서 뮤지션이 자체적으로 공연을 기획하고 꾸리는 데 한계가 많거든요. 그래서 클럽이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이제 기획 공연을 만드는 곳은 거의 없고 ‘공연하고 싶으면 와서 해라.’ 느낌의 공간뿐인 거죠. 그런 데는 뮤지션이 이상하게 잘 모이지 않아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상생하는 공간을 좋아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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