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Curation | 사뿐히, 움직임

“처음으로 2년을 살게 된 집이에요. 원래의 나로 돌아온 거 같아요.” 김미재 디렉터는 아침이면 아끼는 다기를 꺼내, 차를 내려 마시고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며 주말엔 가족과 동네 산책을 한다. 나를 놓치고 달려온 시간의 터널을 지나 내 자리를 찾게 해준 집. 이름은 그로우스다.

그로우스

형태: 복층 빌라
거주: 2년 1개월
나이: 20년 정도

생활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 같아요. 인터뷰 전에 공간을 먼저 둘러보고 싶어요. 

이 빌라엔 건축가, 유튜버, 개인 브랜드 대표 등 재미있는 분들이 많이 살아요. 20년 전에 지어졌는데 리모델링을 한 번도 안 했대요. 평수가 넓은 편은 아니지만 층고가 높고 2층으로 나뉜 구조가 마음에 들었어요. 타일 같은 디테일이 흔치 않고, 층마다 테라스가 있어요. 여기가 거실과 주방인데요, 보통의 집에 비해 싱크대가 협소한 편이고 식기장이 넓죠? 요리를 자주 하진 않지만 집기 수집을 좋아해서 저에게 적절한 구조예요. 거실에 빛이 잘 들어와서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나 ‘티컬렉티브’ 촬영도 자주 하고, 빈티지 수집품 판매 사진도 찍어요. 남자친구와 차를 마시고 아들과 강아지랑 놀기도 하죠. 아들은 친정인 파주와 이곳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있어요. 아래층에는 드레스룸, 남자친구 방, 침실이 있어요. 혼자 있을 때는 주로 침실에 박혀 지내요. 

 

이 집에 머문 지 2년이 갓 지났다고요. 

네, 성인이 되고 이렇게 오래 산 집은 처음이에요. 청담동에 디자인 스튜디오 ‘아트먼트뎁’ 사무실과 티컬렉티브 카페를 두고 있었을 땐 삼성동 작은 오피스텔에 혼자 살았어요. 카페에서 메뉴를 개발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하니까 마음에 드는 건 전부 매장에 갖다 놓았고, 집은 텅 비어 있었어요. 주중에는 집에서 거의 물만 마셨어요.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여행 가방을 꺼내 놓았고요. 여기로 이사 오고 카페를 정리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내 손으로 차를 우려 마셨어요. 늘 카페에서 직원들이 내려주는 티를 먹거나, 그것조차 일이라고 느껴질 땐 “난 종이컵에 마실게.” 하면서 대충 먹곤 했죠. 티컬렉티브를 만든 이유가 차 마시는 시간을 좋아해서였는데 바쁜 생활이 이어지며 그 마음을 좀 잊고 살았던 거죠. 코로나19로 숨을 돌리면서 아끼는 다기를 직접 써보고 책 읽을 시간이 생겼어요. 걱정이 많이 줄었고, 내면적으로 재정비가 되었어요.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티컬렉티브의 첫 시작이 오프라인이라서, 카페를 닫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일을 강남에서 시작했고 클라이언트 회사도 강남에 많아서 벗어날 생각도 못 했죠.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져 어렵게 결정했어요. 청담동 월세가 정말 비쌌거든요. 한남동은 전혀 모르는 지역이었는데 남자친구 영향으로 와봤다가 집을 구했고, 일하기 좋은 곳으로 사무실도 옮겼어요. 삶의 터전을 바꾸니까 티컬렉티브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계획했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도약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카페를 닫으면서 앞으로 ‘잘하는 것만 하자.’고 마음먹었거든요. 열심히 매달릴 땐 몰랐는데 쉬면서 ‘디자이너인 내가 카페 운영부터 직원 관리까지 자신 없는 분야를 직접 하려고 애쓰면서 스트레스가 컸구나.’ 깨달았죠. 여러 브랜드의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함께 만들어 왔고, 다양한 브랜드의 상품을 사용해 봤지만 내 브랜드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어요. 새로운 제품군을 준비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네요. 티 브랜드에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답게 만드는 게 큰 숙제였어요. 감사하게도 제작, 운영을 맡아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를 만나 제가 잘 할 수 있는 기획과 개발,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어요. 

 

정말 바쁠 거 같은데 차분한 말투와 행동을 보며 ‘어쩜 저렇게 여유로울까?’ 감탄하곤 했어요. 

바쁘게 일한 모습을 많이 드러내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17년 동안 개인 브랜드부터 대기업까지 브랜드 프로젝트만 230개를 했어요. 내 브랜드를 만들고, 카페도 운영했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대부분 시간 일에 파묻혀 지냈어요. 그런 저를 보신 친정 부모님이 아들을 맡아서 키워주셨죠. 아이랑 같이 못 있으니 더 일을 많이 했어요. 아이한테 전화가 오면 “엄마 일하고 있어.”라고 답하는 건 괜찮은데, “퇴근해서 집에 있어.”라고 말하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일을 마쳤으면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나는 왜 집에 있지?’ 죄책감이 들면서 더 일에 매달린 거 같아요. 덕분에 이젠 어떤 일이 들어와도 눈 깜짝 안 하는 내공이 생겼어요. 몸으로 부딪치고 실패도 해보면서 나만의 방식을 찾았고요. 누구나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하는 때가 있는 거 같아요. 몰입의 시간을 지나 지금은 나에게 편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어요. 아이와 지내는 주말은 오롯이 아이에게 집중하고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만나니 주말을 기대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귀해요. 지금이 제 인생의 가장 편한 시기예요.

코로나19가 진정되면서 다시 출근하는 생활을 할 텐데요, 전처럼 무리하지 않는 거죠? 

남자친구가 디제이라서 12시쯤 집에 와요. 저희는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사람들이라 인사하고 각자의 방에서 따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해요. 보통 새벽 2시에 잠들고 아침 열시쯤 일어나요. 2층 거실로 올라와 차를 마시고, 메일 확인하고, 직원들 연락에 답하면서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을 두 시간쯤 가지죠. 12시에서 1시쯤 출근해 집중해서 일하고 야근은 안 하려고 노력해요. 예전에는 8시 전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늘 저녁 먹고 일을 더 하곤 했는데, 제가 늦으니까 직원들도 계속 야근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물건들이 있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생기니 퇴근이 빨라졌어요. 집으로 와 혼자 저녁을 먹고 일주일에 세 번 운동하는 게 주중의 루틴이에요. 개발 중인 차를 천천히 음미해 보고, 목욕하면서 배스솔트 테스트도 하고, 곁들이면 좋을 차도 고민해 보죠. 

 

집을 채우는 가구나 집기들이 예사롭지 않아요. 

제가 텍스타일 디자인을 공부했고, 텍스처에 민감해서 다기와 유리, 돌, 목재를 선택할 때도 정말 얇거나 아주 두껍거나 질감이 매트한 걸 선호해요. 언밸런스한 아름다움을 좋아해서 작고 아담한 물건을 쪼르륵 놓기보단 가정집에서 잘 안 쓸 것 같은 사이즈들도 자주 구매하죠. 벽에 부착된 램프도 놋 아이런이라는 메탈 소재인데 제가 가지고 있는 다기랑 잘 어울리죠? 의도한 건 아닌데 색이 화려하거나 요소가 많아서 ‘나 의자예요. 소파예요.’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디자인은 피하는 편이에요. 식탁은 중고 가게에서 20만 원을 주고 산 건데 5년째 잘 쓰고 있고, 패브릭 의자도 포터리반에서 10만 원 초반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한 거예요. 

 

아름다운 물건만큼 사물들의 조화로움도 중요할 거 같아요. 

맞아요. 브랜드 공간을 만들어주거나 카페를 꾸리던 습관이 있어서 하나씩 안 사고 수북이 쌓을 수 있게 사곤 해요. 새 제품과 빈티지 제품을 반반씩 섞어서 공간에 두는 걸 좋아하고요. 한곳에서 여러 종류를 사거나 같은 시기에 산 물건이 아닌데, 수납할 때 텍스처별로 정렬하면 정돈된 효과가 있어요. 저는 눈이 편안한 걸 좋아해서 주로 입는 옷이나 좋아하는 작품, 사용하는 가구와 소품에 원색이 드문 편인데 이탈리안 스타일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화려하고 과감한 색을 좋아해요. 거실의 카펫와 오디오 램프가 큼직하고 용감한 스타일이잖아요. 둘의 색이 섞이면서 더 재미난 공간이 된 거 같아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편한 시기라고 했어요. 공간이 편안하지 않으면 안락한 시간을 갖기 힘들잖아요. 행복한 터전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는 뭐였어요? 

좋아하는 가구와 소품들이 아름다운 빛을 받으며 공간에 스며들 때 행복을 느껴요. 빛이 잘 드는 집에 살면서 더 행복해졌거든요. 조도에 민감해서 조명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도쿄랑 런던에서 10년 지내다 서울에 왔을 때 화려한 형광등을 견디기 힘들어서 오피스텔에 촛불 켜고 지냈어요. 전체 조명을 바꾸기 힘들 땐 램프를 유용하게 써요. 테이블 램프는 공간의 제약이 많지 않아서 내 취향을 드러내기 좋아요. 빛에 민감해서 나라별 조도의 차이도 느껴요. 런던은 흐린 날씨가 많지만 우리나라와 빛의 양이 달라서 사진의 분위기가 달라요. 티컬렉티브 홈케어 제품을 프랑스에서 촬영했는데요, 소량 제작이고 상품군도 열 개 내외라서 모두 말렸어요. 강행할 수 있던 건 우리 제품을 아름답게 담을 수 있는 빛의 색을 믿었기 때문이에요. 상업 공간을 만들 때도 빛의 양을 중요하게 생각해 디머를 꼭 달아요.

나를 품어주는 집에 이름을 붙여볼 시간이에요. 어떤 이름이 떠올라요? 

음… 그로우스Growth요. 이 집에 살면서 저와 남자친구, 아들, 강아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의 한 부분을 함께하며 서로를 보듬어주는 게 느껴져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이 어느 때보다 생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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