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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하겠습니다.” 인사를 보내며 문을 열었다. 사방을 꽉 채운 책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이곳은 온통 붉은 비밀의 공간,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처럼 보였다. 어디에 앉으면 좋을까 두리번대자 아무 데나 앉으라 입을 떼는 정혜윤 작가. 우리는 화려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관해 긴긴 이야기를 나눴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이 세상이 왜 슬픈지 궁금했다. 책을 덮고 나선 내 호기심이 둔감함의 산물이란 걸 알았고, 대화를 나눈 뒤엔 슬픈 세상에 살고 있음을 절감했다. 마음에 온통 ‘슬픔’뿐이던 첫 독서와 ‘기쁨’이란 감정에 함빡 젖은 두 번째 독서. 세 번째 독서를 앞두고 내가 만나게 될 단어를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울 ‘사랑’ 아닐까.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어요. 라디오 피디에게 말이란 무엇인가요?
라디오 피디는 남의 말을 듣는 직업이에요. 들은 말을 전하는 직업이죠. 라디오 피디는 음악과 시사 분야로 나뉘는데, 저는 주로 시사 피디를 해왔어요.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피디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뭘까요? “누군가 ‘그거’에 대해 말해줄 사람 없어?”예요. 가령, 제가 고래의 멸종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면, 고래의 멸종 위기에 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을 찾을 거고, 순천만 갈대숲에 대해 기획했다면 거기에 대해 누군가 말해줘야 해요. 제가 찾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기쁠 거예요. 라디오 피디는 누군가 어떤 말을 하고 있음을, 자기 관심사와 목소릴 가지고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이에요. 누군가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기뻐하는 직업이죠.
오늘 대화가 더욱 기대되네요. 최근에 출간한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읽으며 이번 주제어인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바로 직전에 쓴《앞으로 올 사랑》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책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데카메론Decameron》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책이에요. 《데카메론》은 흑사병 시대를 배경으로, 열 사람이 열흘 동안 말한 100가지 이야기를 담은 모음집인데요. 흑사병의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이야기들이고, 흑사병 시대에 꼭 하고 싶던 이야기를 담은 책이죠. 이 책을 토대로 저도 코로나19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쓴 책이 《앞으로 올 사랑》이거든요. 《데카메론》의 목차가 첫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차례로 흘러가는 형식인데 저 역시 이 열 가지 주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썼어요. 첫째 날 주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예요. 처음부터 참 어려운 주제지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안다면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누면서 살고 싶은지도 알 수 있거든요. 《앞으로 올 사랑》에서 좀 독특한 챕터가 있어요. 넷째 날 ‘불행한 사랑 이야기’와 다섯째 날 ‘행복한 사랑 이야기’에서만 단어들을 소제목처럼 적었거든요. 행복, 우울, 순응, 동기부여… 여러 단어를 담았죠. 대체 이 단어들은 뭘까요? 넷째 날에 담은 단어는 지금 우리가 많이 쓰는 단어들이에요. 현재 많이 하는 말이라는 거죠. 다섯째 날은 미래의 단어들이에요. 우리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산다면 앞으로 입 밖에 뱉게 될 가능성이 높은 단어들이죠.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우리 실존이 단어 위에 구축된다고 생각해서예요.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된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음, 월요일에는 미용실에 가고, 화요일엔 친구를 만나고, 수요일엔 파스타를 먹고, 목요일엔 청소하고… 맥락 없이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는 특정한 단어를 살아내요. 취준생은 취업이란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될 테고, 집안에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면 질병이란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되겠죠. 만약 사랑이 깨진 사람이라면 상실, 혹은 외로움이란 단어 위에 비밀스럽게 삶이 구축될 거고, 지금 무척 약해져 있는 상태라면 나약함 위에 삶이 불안하게 쌓여가겠죠? 특히 넷째 날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입에서 나오고, 따뜻하고,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거.” 이게 뭐 같아요?
…숨?
맞아요. 호흡. 근데 그런 게 하나 더 있어요. 입에서 나오고, 따듯하고,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거. 바로 ‘살아 있는 말’이에요. 살아 있는 말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해요. 그럼 죽어 있는 말은 뭘까요? 그건 아무 내용도,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빈말이에요.
시작부터 생각이 많아지네요. 말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거군요.
사람들은 인생을 두 가지 관점으로 봐요. 하나는 탄생을 ‘고통’으로 보는 거예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시각이죠. 또 다른 관점은 인생을 ‘선물’로 보는 거예요. 삶은 소중하다고 보는 거죠. 사람은 누구나 둘 중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어요. 물론 상황에 따라왔다 갔다 하기도 하겠죠. 저는 인생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근데, 삶은 선물이고 소중한 것이며 내가 태어난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있어요. 선물이라고 생각한 삶의 선물 상자가 텅 빈 상자거든요. 스스로 채워야 하는 빈 상자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일정 정도 성장할 때까지 주입식으로 박스 안에 이것저것 채워 넣게 돼요. 이 말, 저 말을 듣고, 따라 하고, 흉내 내고, 이 말이 옳은 것도 같고, 저 말이 옳은 것도 같고… 헷갈리죠. 그래도 말은 하며 살아야 하기에 실제 아는 것보다 더 아는 척하고, 모르는 것도 아는 듯이 말하게 돼요. 그래서 가식 역시 우리의 운명인 거예요. 텅 빈 채로 사람도 만나고 대화도 해야 하고, 심지어 창조성까지 보여줘야 하니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오랫동안 시달리게 돼요. 과연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싶고요. 근데 문제가 하나 더 있어요. 이렇게 살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남의 말만 따라 하면서 살고 싶지가 않은 거죠. 저도 제 삶이란 걸 가지고, 제 목소리란 걸 가지고 싶으니까 내 말이 나와 남에게 모두 의미가 있으면 좋겠는 거예요. 제 삶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요. 그래서 내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소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네 삶을 살아라.’라는 말이 그토록 힘을 얻는 거예요. 인간은요, 삶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고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슬퍼하는 존재예요.
어쩐지 좀 슬퍼지네요. 살아 있는 말과 죽어 있는 말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어요?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진심인가에 달려 있어요.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에 나부터 얼마나 진지한 관심이 있는가에 달린 거죠. 그런데 신기한 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말할 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말할 때 점점 더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 밖으로 나간다.’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물어요. “자아 밖으로 나갈 수가 있나요?” 물론이에요. 별이 무수히 빛나는 아름다운 창공을 바라보면서 ‘별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별을 바라보는 내가 예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아름다움은 우리를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가거든요. 우리는 먹고 자고 일하고 사랑하고 가끔은 자아 밖으로 나가요. 저는 라디오 피디로 지내면서, 사람이 제일 빛날 때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거나 유명해졌을 때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때는 오히려 빛을 잃죠. 시선이란 덫에서 자유롭지 않으니까요. 사람이 제일 빛날 때는 이제 막 뭔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예요. 이제 막 돌고래나 두루미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한 번이라도 그들을 더 보러 가려고 하겠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더 알고 싶어지고,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어지니까요. 사랑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력과 생기를 뿜어내요. 저에게도 말에 대한 고민은 많아요. 관심도 없는 것을 열렬히 말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마치 의견이 있는 것처럼 말했을 땐 자기 전에 괴로워지기도 해요. ‘오늘도 망쳤어!’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의미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깨달음이 와요.
하지만 의미 있는 말만 하고 사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음, 좀더 얘기해 볼게요. 라디오 피디는 장점이 많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점도 있어요. 한 달 전 뉴스에 뭐가 나왔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날 중요하다고 온갖 언론이 1면에 다룬 내용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지금 ‘덧없음’이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요. 열정을 발판 삼아 성실하게 일했다 해도 누구나 덧없음이란 문제에 부딪히게 돼요. ‘벌써 시월이야?’, ‘뭘 했다고?’, ‘올해도 다 갔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들고 한숨을 쉬게 되는 거죠. 세상은 우리의 차이를 서럽도록 강조하지만, 시간과의 관계에서 덧없음은 모두가 공통으로 맞닥뜨리게 돼요. 덧없음의 반대쪽엔 ‘영원’이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우리에게는 ‘영원히 좋은 것’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행복한 사람은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새의 비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들이 영원히 어디선가 날고 있기를 바라죠. 이것을 말과의 관점에서 보자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서문에 이런 문장을 썼거든요. “인간이 한 명이라도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좋은 이야기.” 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요? 우리의 많은 것이 그냥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 중 뭔가는 살아남아요. 우리는 가능한 여러 모습 중 가장 좋은 것이 영원히 살아남도록 해야 하겠죠. 저는 사람들이 가진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화가 영원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끝까지 여행하기를 바라요.
프롤로그는 <자기 자신을 말하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상으로 기획하면서 시작돼요.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꼽아보고, 그 단어를 제외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프로그램이었죠. 나를 말한다는 것에 대해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사실 프롤로그가 이 책 전체 주제나 다름없어요. ‘나 자신을 제대로 말하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제안하는 건데요. 우리는 흔히 미래가 불안하다고 이야기해요. 내일 일은 모르니까요. 그런데 미래를 알 수 없어도, 우리 모두 아는 것이 한 가지는 있어요. 그게 뭘까요? 미래에도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라는 거죠. 우리는 내일도, 내년에도 뭔가를 말하고 있을 거예요. 말하기는 우리 인류의 영혼의 형태예요. 우리 인류는 말을 하면서, 특히 자기를 표현하면서 힘과 생기를 얻는 종족이에요. 그래서 우린 늘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는데요. 정작 나에게 중요한 뭔가를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고, 어렵게 느껴지죠. 제대로 말하기는 훈련이 필요해요.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전에 상상도 못 해본 엄청난 걸 얻을 수 있어요.
그게 뭐예요?
바로 ‘자유’예요. 말을 제대로 해낸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이야기 자체가 우리를 데리고 가요. ‘그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죠. 그런데 제가 앞서 단어 위에 삶이 구축된다고 했죠? 그 생각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프롤로그에서 <자기 자신을 말하기>를 가상으로 기획한 거고요. 이 프로그램은 집에서 혼자 해볼 수도 있어요. 이 프로그램의 규칙은 이래요. 자기 자신을 말하되 특정한 단어를 말하면 안 돼요. 그런데 그 ‘말하면 안 되는’ 특정한 단어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예요. 그 단어 없이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 단어를 빼고 나를 말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군가 나에 대해 말할 때 그 단어를 뺀다면 나를 잘 모르는 거다, 싶은 그런 단어죠. 그 특정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어요. 이게 자신의 고유성이에요. 그렇게 우리가 알고 싶어 하던 나 자신의 고유함이요. 저는 이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이 스스로 해보면 좋겠어요.
왜 나를 단어로 표현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가요?
앞서 말했듯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말하면서 생기를 얻어요. 우리는 온갖 형태로, 언제나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죠. 몇 년 전부터 ‘너 자신의 삶을 살아라.’, ‘너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라.’같은 말이 많이 들리고 있는데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진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일 거예요. 자기 삶을 산다는 건 아주 어려운 문제예요. 사회는 끝없이 우리의 존재와 고유성을 지워요. 우울증 환자 몇 명, 취준생 몇 명, 실업자 몇 명, 1인 가구 몇 명… 우리는 숫자로 묶이고 있죠. 세상이 우리의 고유함을 지울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함을 알고 기억해야만 해요. 특히 지금 같은 코로나19 시대엔 더욱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지금 우리 일상의 많은 것이 흔들리고 있어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죠. 비행기를 타거나 여행을 가는 건 물론이고, 10시 이후에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어려워졌어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거죠. 이런 일들은 우리 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쳐요. 불안, 우울, 강박, 예민함, 히스테리… 이 모든 것이 정신한 구석에 나타나게 돼요. 발을 딛고 있던 세계의 토대가 흔들리고요. 이럴 때일수록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지금, 우리가 딛고 설 땅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요. 얼마 전에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었는데요. 거기 “여러분은 지금 단단한 대지 위를 걷고 있습니다.”라는 표지판이 있더라고요. 안정감을 주는 문장이었어요. 발밑이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고, 단단해지는 느낌이었죠. 우리에게는 딛고 설 단단한 대지가 필요해요. 그 단단한 대지 같은 단어가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제안이에요. 내가 딛고 서서 앞으로 나아갈 그런 단어요.
나를 표현할 단어로 ‘책’, ‘이야기’, ‘시와 운명’을 꼽으셨죠.
보르헤스는 한 사람의 삶은 대략 열 개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고 말해요. 우리는 평생 열 개 정도의 단어를 살아낸다는 거죠. 그의 단어는 거울, 미로, 시간, 불멸, 시… 등인데요. 이 중 시간은 우리 모두의 단어일 거예요. 우리는 모두 시간 속의 존재니까요. 저는, 말씀하신 대로 첫 단어는 책을 꼽았고 두 번째로 이야기, 그리고 시와 운명을 뽑았어요. 제게는 책이 정말 중요한 삶의 재료거든요. 책은 흰 종이 위에 인쇄된 검은 글씨일 뿐이지만, 우리는 책을 읽으며 검은 글씨 이상의 것을 봐요.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을 한 무더기의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을 펼치는 사람은 그 안에 재미있거나 좋은 것이 있기를 기대하잖아요.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저자가 쓴 말에 영향을 받고, 노트에 적어놓고 기억하려고 하죠. 이게 진짜 신비로운 거예요. 우리 삶 안에는 생계 걱정도 있고 온갖 근심이 있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더 나아지려고 하는 의지도 있다는 거죠. 두 번째 단어인 ‘이야기’는 저의 단어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단어예요. 우리의 삶은 결국 이야기가 돼요. 우리가 늘 하는 일은, 자기 경험을 언어로, 말로, 이야기로 바꾸는 거예요. 첫째 단어인 책과 둘째 단어인 이야기도 연관이 있는데요. 책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저희는 인생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삶엔 약간의 좋은 일과 수많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요. 우리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삶에도 아무 이야기가 없을 거예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야기도 없다는 거죠. 책은 상실, 비애, 배신, 후회, 고독, 실패, 비참함… 이 모든 것을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예요. 이렇게 비참한 재료로 좋은 결론을 낸다는 것, 이게 모든 책의 꿈일 거예요. 저는요, 우리가 자신에게 일어난 많은 일을 재료로 이야기를 만드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자기 삶에 일어난 일로 좋은 결말을 내길 원해요. 그리고 우린 모두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죠. 제가 힘을 잃을 때마다 늘 하는 마법의 주문과 질문이 몇 개 있거든요. 그중 하나는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인가?’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가?’예요. 이와 더불어,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전하고 있는 이야기이다.’와 ‘오늘 한 이야기가 내일도 살아남길 원하는가?’라는 문장은 늘 마음에 품고 지내지요. 지금 우리는 슬프게도 이야기가 소멸하는 시대를 살아가요. 거대한 이야기가 우리를 어둡게 감싸려고 하죠. 바이러스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이런 거대한 이야기가 한바탕 휩쓸고 있지만, 그러는 중에도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봄날의 새순 같은 작은 이야기들은 피어나고 있을 거예요. 많은 걸 포기해도 봄이 오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이야기라는 단어가 중요한 거예요.
책과 이야기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주신 것 같은데 시와 운명이란 키워드는 아직 궁금한 게 많아요.
사람들이 제일 알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겠죠. “가만히 앉아서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삶의 의미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슴 아픈 단어들을 만나게 돼요. 죽음이나 질병, 상실, 외로움… 이런 나쁜 단어와 더불어 어떤 좋은 단어가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건 참 애가 타는 일이죠. 미래를 생각하면 좀 무서워요. 그러나 미래를 모른다는 건 어찌 보면 신비로움일 수도 있어요. 내가 예상도 못 한 좋은 일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단어와 좋은 이야기가 찾아왔을 때,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해요. “어떤 이야기가 잊히지 않고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것, 그걸 운명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운명이라 부를 것인가.”라는 말이 있어요. 그게 제가 말하는 운명이죠. 그런 운명을 알려주는 모든 게 저는 ‘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키워드가 운명만 있는 게 아니라 시와 운명인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시는 문학으로의 시가 아니라 시적인 순간을 말해요. 하루하루 평범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적인 순간이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거죠.
시적인 순간이 어떤 건지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우리 마음의 뭔가를 건드리는 순간이요.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그게 운명적인 순간이고, 시적인 순간이에요. 앞서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우리는 시간을 잃고 시간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에는 영원히 머물 수 있고, 시간을 벗어날 수도 있어요. 정말 좋을 때는, 너무 재미있을 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기도 하죠.
어떤 시적인 순간, 운명적인 순간을 경험했어요?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마지막 챕터에 쓴 ‘돌고래와 반딧불이’이야기도 운명적인 순간 중 하나예요. 그때 저는 정말로 슬픈 일을 겪는 중이었고 그 슬픈 마음으로는 삶의 기쁨을 맛보는 게 도무지 불가능할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야생 돌고래의 도약을 보면서 삶의 기쁨에 대한 욕망이 생겼죠. 돌고래는 다른 동물일 리가 없는 자신만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그 돌고래를 보면서 ‘나도 삶의 형태를 만들고 싶다, 하루하루 흩어져 가는 것이 싫다, 파편처럼 사는 것이 싫다.’ 얼마나 간절히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요. 같은 챕터에서 이야기한 반딧불이 뱃사공은 ‘그런데 어떻게 내 삶의 형태를 만들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어요. 그 뱃사공은 우수에 젖은, 그러나 참 깨끗한 느낌의 청년이었는데요. 그는 처음 반딧불이를 본 날 반딧불이에 빠져서 바로 반딧불이 뱃사공이 되었대요. 제가 매일 밤 반딧불이를 보는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해요. “스틸 뷰티풀Still Beautiful.” 그 말을 듣던 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살은 찰랑거리고, 반딧불이는 팅커벨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별처럼 맹그로브 숲을 에워싸고…운명적인 순간이었죠. 그 뒤로 ‘스틸 뷰티풀, 여전히 아름다운’은 제 단어가 되었어요. 여전히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슬프지만 기쁜… 그런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어서 살자, 그런 이야기를 전하자, 이런 생각이 수년의 시간이 흘러 책에 담기고 제목을 만들어낸 거예요. 아, 책에는 싣지 않았지만 한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네, 계속 들려주세요.
제 인생의 가장 잊을 수 없는 날 중 하나는 칠레에 있는 아타카마 사막에 갔을 때예요. 두 개의 화산 분화구와 노천 탄광이 있는 황량한 곳이거든요. 거대한 트럭이 씽씽 오가고, 바람 때문에 치마를 입을 수도 없는 곳이에요. 거기서 광부들에게 “이 고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데가 어디예요?” 하고 물어봤어요. 여행지에서 항상 하는 질문이기도 한데요. 광부들이 입을 모아 그러는 거예요. “사막의 별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밤 12시에 별을 보러 갔죠. 근데… 그때 그 광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제 평생 앞으로도 그렇게 많은 별을 볼 일은 없을 거예요. 별이 너무 많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거든요. 약간만 움직여도 별이 다 따라 움직여요. 보통, 별자리라고 하면 별옆의 별을 보고 상상하게 되는데요. 그때 본 건 별 뒤에 별, 별 뒤에 별, 다시 그 뒤에 별이 보이는 풍경이었어요. 3차원의 세계였죠. 그걸 무려 맨눈으로 경험하는 거예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하늘만 바라본 경험은 정말이지 운명적인 순간이었어요.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친구들에게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하거든요. 그때 친구들이 “우리가 밖으로 휠체어를 끌고 나갈게.” 하고는 별이 가득한 밤을 보여줘요. 저는 이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어요. 경이로운 아타카마 사막의 밤하늘을 본 다음부터요.
아름다움과 자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같아요.
지구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건 지구가 아름답기 때문일 거예요. 아름다운 걸 보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거예요. 아름다움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움에 한 번에 압도된 경험을 나타낸 문장이 있는데요. “삶에 별빛을 섞으세요. 그러면 다른 건 하찮아질 겁니다.” 삶에 아름다움을 섞으라는 말이기도 할 거예요. 세상은 두 번째 기회가 모여 있는 장소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도 참 아름답지 않나요? 우리 모두에게 다시 잘 해낼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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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