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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마다 굳이 어려운 선택을 하는 작품 속 주인공들이 늘 의아했다. 소설이니까, 영화니까, 애니메이션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던 모험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도 있다. 프로필에 얼굴 사진 대신 덩그러니 ‘숭’ 한 글자를 적어놓아 숭이라 불리는 사람. 좋아하는 걸 함께 좋아하고 싶어서 나누는 데 열심인 숭은 재미와 호기심을 쫓아 불편한 곳으로 간다.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기어이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 불안한 영역에 재미를 싹 틔우는 사람, 숭의 발길이 닿는 곳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위트 있는 장르가 태어날 것만 같다.
귀여운 게 가득한 집이네요. 여기 있는 물건들 하나씩만 들여다봐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아요.
뭐가 좀 많죠(웃음)? 알아주는 맥시멀리스트여서 집에 물건이 한가득이에요.
혹시 이사 준비하시나요? 문 앞에 박스들이 쌓여 있던데요.
그거 다 제 물건이에요. 오늘 오신다고 해서 아침에 밖으로 빼두었어요. 좁은 원룸 한가운데 쌓아놓고 살던 것들인데 그 상태면 사람이 들어올 수가 없잖아요(웃음). 바빠서 당장은 어렵지만 이사를 해야 할 것 같긴 해요.
뭐가 정말 많네요. 집 둘러보다 하루가 다 갈 것 같아요(웃음). 소개부터 들어볼까요? 배달의민족 마케터로 잘 알려져 있지만 퇴사 이후 더 많은 정체성이 생긴 것 같아요.
제 핵심 자아는 마케터지만, 요즘 가장 좋아하는 정체성은 ‘기록자記錄者’로서의 자아예요. 이 단어는 지승호 작가의《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이라는 책에 나온 말인데 기록자라는 표현이 좋아서 저를 소개할 단어로 쓰고 있어요.
그럼 오늘은 기록자 자아와 이야기해 봐야겠어요. SNS에서는 ‘숭’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오늘은 숭이라고 부를게요.
좋아요.
가장 간단한 것부터 물을게요. 기록이 뭐라고 생각해요?
살아 있는 표현 수단? 남겨진 것들의 모습은 참 다양해요. 죽어 있는 것도 있고, 무채색도 있고, 선명한 것도 있죠. 근데 기록이라는 건 어느 한순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하는 기록은 나의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에요. 미래의 누군가가 제 기록을 보면서 영향받고 융합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그럼 ‘죽어 있는’ 건 뭐예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거요. 내 감정이나 생각은 물론이고 무엇도 표현하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상태! 죽은 기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겠죠.
기록이라는 건 숨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네요. 주로 어떨 때 기록을 하나요?
제 주변의 모든 걸 기록하기보단 저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들을 기록해요. 어느 날 친구 A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렇구나, 하고 넘긴 적이 있거든요. 근데 그다음 날 친구 B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와! 대박!” 그런 거예요. A는 옆에서 자기가 어제 한 말이라면서 서운해하고(웃음). 같은 이야기여도 제 컨디션이나 마음 상태에 따라 어떤 날엔 별다른 의미가 없고, 어떤 날엔 확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제 상태와 타이밍이 맞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게 되는 거고요.
누구에게나 처음의 의미는 다를 텐데, 첫 기록이라고 하면 언제가 떠올라요?
저는 과거엔 기록을 정말 안 하던 사람이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최초의 기록은 다이어리 첫 장인 것 같아요. 열심히 쓰진 않았지만 다이어리 사는 건 좋아했거든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다이어리를 사서 1월 며칠만 열심히 적고 그만두는 애들(웃음). 맨 앞 장엔 늘 과한 버킷리스트를 적었어요. 한 번 쓰고 펼쳐보지도 않은 채로 1년을 보내고, 다음 해가 밝으면 새 다이어리를 또 사고…. 버킷리스트는 실천 여부와는 관계없이 만드는 걸 좋아해요. 이루지 못한다고 스트레스받는 편도 아니어서 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두둑해지거든요. 한 해를 알차게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올해는 뭐라고 적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란 키워드가 점점 더 중요해져요. 다이어트가 가장 중요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삶의 균형을 이루면서 신체를 회복하는 게 버킷리스트가 됐어요. 옛날엔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 훌륭한 마케터가 되고 싶다 같은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가짓수가 적어지고 문장도 좀 철학적으로 변했어요. 요즘 꾸준하게 꿈꾸는 건 ‘여유 있는 삶’이에요.
2021년 1분기는 여유롭게 지냈어요?
…아니요. 저는 한동안 백수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 다시 취직을 하게 됐어요. 1년 정도 백수로 지낼 땐 열심히 노력해서 건강한 루틴을 만들었거든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책 읽고, 차 마시고, 운동 다녀오고, 화분에 물 주고…. 친구들이 ‘은퇴한 회장님 삶’ 같다고 했는데(웃음) 다시 입사하고 출퇴근하다 보니 만들어놓은 루틴이 다 깨졌어요. 회사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건강을 뒷전에 두게 되는 것 같아요. 3개월에 한 번씩 이런 각성이 찾아오는데, 다시 여유 있는 삶을 찾아가 보려고요.
기록에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처음은 이상하고 엉성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용기를 주기도 했어요. 숭의 엉성한 기록도 궁금해지는데요.
부끄러운 건 보통 온라인 기록이에요. 특히 블로그요. 제가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써온 온라인 플랫폼이 블로그거든요. 늘 생활처럼 해오던 거니까 제가 과거에 어떤 글을 썼고, 그때와 지금의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감이 잘 안 잡히는 곳이기도 하죠. 원래 익숙한 데서 그런 걸 발견하기가 더 어렵잖아요. 최근에 책 《기록의 쓸모》도 출간하고, 미디어에도 노출되면서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제 블로그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아주 옛날 글에도 댓글이 달리고 제 포스팅이 공유되는 일도 많아졌어요. 알람이 올 때마다 제가 쓴 글이지만 낯부끄러워서 깜짝깜짝 놀라요. 파이팅 넘치게 ‘최고의 마케터가 되겠어!’를 외치는 글도 있고, 마케팅 실장이 되겠다며 승진에 대한 야망을 보이는 글도 있고,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는 물론이고 블로그 상위 노출을 노리고 검색될 만한 단어들을 마구 쓰며 최선을 다한 포스팅도 있어요(웃음). 하나하나 확인하기엔 양이 너무 많아서 지금 제 태도랑 다른 글들만 좀 정리했어요. 주로 저의 과거를 반성하게 되는 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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