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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나를 한눈에 사로잡았던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포스터가 붙어 있는 극장 Écoles 21에 도착했다. 명칭이 세 차례나 바뀐 공간이라 헷갈리는 이들도 많을 듯하다. 1977년 개관한 극장의 원 명칭은 에꼴 시네마 클럽(Écoles Cinéma Club), 이후 1982년 액션 에꼴(Action Écoles), 2011년 르 데스페라도(Le Desperado, 무법자 정도로 해석된다)였으며, 2017년 7월부터 현재의 명칭인 에꼴 21로 불리게 되었다(극장의 소유자가 변하면서 자연스레 이름이 바뀐 것, École은 학교를 뜻한다). 여전히 간판에는 Écoles Cinéma Club이 쓰여 있고, 구글 지도에는 Le Desperado로 검색되고, 티켓에는 Écoles 21과 Le Desperado가 함께 표기되어 있어 이방인으로서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특히 2017년에 이곳을 인수한 로널드 샤마(프랑스 영화 감독이자 프로듀서, 전시 큐레이터.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인 이자벨 위페르의 전 남편이기도 하다)는 이미 ‘Christine 21’이라는 파리의 다른 극장을 운영하고 있어, 두 극장은 ’파리 시네마 클럽’으로 묶여서 함께 언급된다.
에꼴 21에는 네 가지의 시네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먼저 매달 마지막 수요일 진행하는 ‘클래식 클럽’은 디브이디클래식(Dvdclassik, 영화에 대한 비평과 분석을 제공하며, DVD 및 블루레이를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의 편집자들과 영화에 관한 토론의 장을 마련한다. 또한 ‘슈퍼 세븐 클럽’은 파비앙 바우만(영화학 교수 겸 영화잡지 《Positif》의 평론가)과 함께 슈퍼 세븐(Super Seven,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모임으로 프랑스 전역에 퍼져 있다) 멤버의 영화를 관람한다. 이들은 토론을 통해 여러 창작자들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이란 등 중앙아시아의 영화 프로그래밍을 목표로 하는 ‘페르시아의 전망’,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 고전 영화와 함께 다양한 출판사, 잡지와 도서 등을 접목한 토론 프로그램 ‘시네미러’ 또한 인기다.
버스터 키튼의 <항해자>를 보고 그랜드 액션을 한 번 더 살핀 뒤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으로 이동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산의 소리>를 상영하기로 한 오후 2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 극장이 문조차 열지 않은 것. 구글 지도를 켜서 확인해봐도 오늘은 휴관일이 아닌데 말이다. 유럽은 대형 멀티플렉스를 제외한(때때로 대형 멀티플렉스마저) 대부분의 극장이 오후(상영 일정에 맞춰)부터 문을 연다. 티켓 부스는 보통 상영 30분 전이면 오픈하는데, 극장 자체가 닫혀 있으니 애가 타기 시작했다. 일단 최대한 침착한 척하며 근처 가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극장을 다시 찾았는데 여전히 문이 닫혀 있어, 극장 앞을 서성이며 나루세 미키오 상영작을 확인하고 있는 또 다른 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기도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닫는 날은 아니다”는 그의 대답에 계속 서성이던 중, 그러니까 원래는 상영이 시작되어야 할 2시 정각이 거의 다 되어 극장과 티켓 부스가 문을 열었다.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훨씬 큰 기쁨이 공존한 채 가장 먼저 티켓 발권을 했다. 지금 당장 상영이 시작하는 것인지, 앞서 광고 상영이 있는지를 물어보니 10분에서 15분 후 영화가 시작된다기에 잠깐 극장을 구경하고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포스터가 붙어 있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나루세 미키오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작품은 <부운>, <흐르다>, <흐트러지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등이 있다. <산의 소리>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나루세 미키오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연출작으로 꼽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남편 슈이치의 불륜을 알게 된 기쿠코의 선택에 초점을 맞춤과 동시에 실패하는 부부 관계와 해체되는 가족 속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을 그린다. 여기에 기쿠코와 시아버지 신고 사이를 미묘하게 담기도 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 관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모호하게 그리기를 택하지만 이런 설정 자체에서 호불호가 나뉘기도 한다. 나 역시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산의 소리> 속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주체적으로 미래를 선택하는 기쿠코와 그녀를 비롯한 여성들의 모습 그 자체다. 현란하지는 않지만, 정석과 같은 숏과 필요한 컷들만 사용한 촬영과 편집 또한 인상 깊다.
역시나 평일 오후라 관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열 명도 채 되지 않은 관객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특히 일본어로 대화를 하던 할머니 두 분이 기억에 남는다. 2018년 12월, 바르셀로나의 작은 단관 극장에서 우연히 <버닝>을 봤던, 어제 파리 한가운데서 <기생충>을 보던 내 기분과 비슷했을까. 당신의 젊은 시절 어느 조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 있었을지도, 당대 일본 최고의 배우이자 아이콘이던 다카미네 히데코와 하라 세츠코를 추억했을지도,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과 더불어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을 머나먼 타국에서 몇십 년을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어떨지 혼자 상상해보다 코끝이 찡해졌다. 스크린에서 상업 광고 대신 반복 재생되던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 클립 영상과 상기된 목소리가 중첩돼 전해지는 기운에 어쩐지 함께 벅차오른다.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던 낯선 일본어와 눈 앞에 펼쳐진 흑백 화면 속 익숙한 장면들이 뒤섞여 하나의 리듬이 되어 다가온다. 희끗희끗 흰머리가 나기 시작해도,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를 짚게 되어도, 여전히 설렘을 안고 극장으로 향하는 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Écoles 21
A. 23 Rue des Écoles, 75005 Paris, France
H. pariscinemaclub.com/ecoles
T. +33 1 43 25 72 07
씨네21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8년 5월, 칸국제영화제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에 매료되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것이 유럽 극장 여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극장에 찾아가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
글·사진 이나경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