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의 단어

초심

초심

처음에먹은 마음

결국 몸살이 났다. 환절기를 무사히 넘기는데 실패하고 어김없이 한 방 맞은 것이다. 부랴부랴 책방을 하루 쉰다고 공지하고 병원에 갔다. 일부러 애매한 시간을 골랐는데도 사람이 넘쳤다. 아픈 사람들에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심하게 만드는 소음에 괴로워하며 오랜 시간을 대기했고 찰나의 진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나온 사람들은 일렬로 같은 출구를 향했고,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같은 약국으로 들어갔다. 기침과 한숨 소리가 움직이는 길을 가득 채웠다.

집으로 돌아온 후엔 온종일 잠만 잤다. 야무지게 아프고 나자 만사가 귀찮아졌다. 이제는 익숙할 법한 책방의 미미한 매출과 줄지 않는 업무량에도 괜스레 화가 났다. 직장인 대부분이 시달린다는 ‘369 증후군’이 떠올랐다. 3년, 6년, 9년 차가 되면 버티기 어려운 고비가 온다는 것인데 책방 운영 만 3년이 코앞인 내게도 바로 그 고비가 온 걸까. 휴대폰을 들고 ‘태국 한 달 살기’를 검색하거나 ‘사람인’과 ‘잡코리아’ 앱을 설치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음을 고쳐 먹고 자리에 앉았다. 제목이 없는 녹음 파일 가운데 첫 번째 음성 메모를 터치했다. 책방 근처에 새로 생긴 한 카페를 찾은 날, 비슷한 또래의 카페 대표인 E 씨와 나눈 대화가 담겨 있었다. 사실 원고 작성을 위해 들어야 하는 건 다른 파일이었는데도 나는 멍하니 E 씨의 목소리만 들었다. 그에겐 완벽한 생기가 있었다.

 

E: 카페는 언젠가 꼭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들 생일 때마다 제가 케이크를 만들어주곤 했거든요.

나: 원래 비슷한 일을 하셨던 거예요?

E: 아뇨. 그냥 평범한 회사의 직원이었어요. 카페 투어나 베이킹은 오랜 취미였고요.

나: 어찌 보면 커리어를 180도 바꾸는 건데, 어떻게 카페를 열겠다는 결단을 하시게 된 거예요?

E: 마침 해외에서 일하다 귀국을 해서 타이밍이 좋았어요. 자신도 있었고요. 완전 잘 될 것 같았거든요.

 

목소리만 듣고도 E 씨의 표정과 몸짓에서 풍기던 활력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소리는 공기를 통해 어떤 파동이 전달되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의 목소리가 내는 파동 위에는 한 줌의 에너지도 함께 실려 오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날에도 내게는 어떤 동력이 필요했던 게 분명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E 씨에게 무려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지체 없이 자신이 품고 있던 꿈을 꺼내 보였다. 한 두 개나 될까 싶었던 나의 예측은 빗나갔고, 그의 꿈들은 줄줄 매달려 나왔다. 그의 꿈들은 줄줄 매달려 나왔다.

 

E: 카페가 잘 되어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늘어났으면 해요.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면, 작은 건물을 지어서 새로 시작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나: 우와! 건물이요?

E: 저 진짜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제가 크루아상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크루아상 가게도 언젠가 꼭 열고 싶어요. 욕심은 많은데, 손이 두 개뿐이라…(웃음)

나: 체력 관리가 중요할 것 같아요.

E: 맞아요. 체력 잘 챙겨야죠! 카페 마감하고도 운동하러 꼭 가요.

나: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E: 밥 잘 챙겨 먹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E 씨는 완충된 배터리로 매일을 살고 있다. ‘3년 전의 나’는 그와 꽤 비슷했다. 그즈음의 일기를 다시 펼쳐 읽어보면 곳곳에 초심자만이 가지는 생기가 있다. 그러나 이 계절의 나는 그 팔팔한 기운을 다 잃었다. 내가 매고 있는 가방엔 욕심을 잔뜩 들어있었다. 가방은 힘에 부쳤는지 몰래 제 바닥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렇게 오랜 길을 걷고 나니 구멍 사이로 알맹이가 다 빠져나갔다. 나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목적지를 잃은 채 앞으로의 여정만을 하염없이 헤아리는 중이었다. E 씨에게서 발견한(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지난 내 모습을 떠올렸을 때 나는 ‘도대체 나 다운 건 뭔데!’ 하고 유서 깊은 대사를 되뇌었다.

허망하게 책꽂이만 바라보다가 레이더에 걸린 것은 한수희 작가의 《온전히 나답게》. 별생각 없이 책을 꺼내어 목차를 보는데 ‘마음을 먹어야 할 때’라는 소제목이 어떠한 계시처럼 와 닿았다. 홀린 듯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자고로 마음은 ‘그냥’ 먹는 게 아니라, ‘제대로’ 먹는 것. 나는 ‘제대로’라는 세 글자에 꽂혀버렸다. 마음을 제대로 먹어야만 비로소 건강하고 규칙적인 삼시 세끼를 챙길 수 있고, 적당한 강도로 일할 수 있고, 운동도 잊지 않을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은 가벼운 충돌과 자극으로도 쉽게 망가진다. 나는 헐렁한 마음으로 살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 초반에 지니고 있던 패턴을 모두 잃어버렸다.

상황이나 맥락을 단번에 바꾸기는 어렵다. 한수희 작가의 말처럼 이제는 그저 ‘초심을 먹어야 할 때’다. 제대로 마음을 먹은 E 씨의 바쁜 두 손을 떠올리며, 키보드 위를 움직이는 나의 열 손가락을 바라본다. 이 손으로 일과 생활의 기본적인 질서부터 천천히 만들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한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나면 높은 언덕 어귀에 있는 E 씨의 카페에 다시 찾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그가 여전히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틈틈이 크루아상을 만들고 있기를 빌며.

 

 

사실 마음을 먹었는데도 안 되는 일은 너무나 많다. 마음을 먹어도 살은 잘 안 빠지고, 마음을 먹어도 계획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마음을 먹어도 느긋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먹어도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지도 않고, 마음을 먹어도 돈은 나만 피해 가고, 마음을 먹어도 성공의 길은 내가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져 있다. 아, 어쩌면 내가 마음을 제대로 안 먹어서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 한수희 《온전히 나답게》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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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