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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사랑
10년 전에 만들어진 일본 드라마 <우먼>(2013)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제목이 멋없기는 한데, 이 드라마의 작가가 얼마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로 칸 국제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탄 사카모토 유지다. <괴물>이라는 영화가 신기하게 재미있어서, 사카모토 유지의 드라마나 찾아볼까, 하다가 넷플릭스에 <우먼>이 있어 보기 시작했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 둘을 키우는 가난한 싱글맘 코하루는 재생불량성 빈혈, 그러니까 백혈병에 걸렸다. 돌볼 사람 없이 남겨질 아이들 걱정에 코하루는 20년 전 헤어진 친모 사치를 찾아간다. 아버지와 이혼하고 집을 나간 사치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살고 있다. 버림받았다는 상처에 사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는 코하루는 자존심을 굽히고 사치의 집에서 살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문제는 이복여동생 시오리가 코하루의 남편 신의 사고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비밀을 아는 사치는 20년 만에 찾아온 딸과 손자들을 반기지 못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좋은 드라마와 나쁜 드라마의 차이는 무엇일까? 좋은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의 차이는? 내 생각에, 좋은 이야기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납작하게, 그러니까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을 가난한 싱글마더, 자식을 버린 어머니, 언니를 질투하는 동생, 엄마를 미워하는 딸,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는 언니라는 기능적 존재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은 착한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이며, 행복한 동시에 불행하며, 책임을 지려 하는 동시에 달아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며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남편을 잃어도, 병에 걸려도, 죄를 지어도, 가족을 미워해도 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어른들에게는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기에 자기감정 속에서 허우적댈 수만은 없다. 그 아이들에게 먹을 걸 사주고 밥을 차려주기 위해서 버텨야 한다. 울며 쓰러지고 싶어도 아이들이랑 이상한 춤을 춰야 하고, 아이들이 겁먹지 않도록, 슬퍼하지 않도록 재미있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
만약에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썼다면 어땠을까? 인간을 선인과 악인으로만 그리는, 자극적인 설정에만 탐닉하는 작가였다면? 시청자와 관객을 관조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이야기 속 여러 인물들이 처한 딜레마에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사카모토 유지의 재능과 노력에 감탄했다.
클레어 키건의 짧은 소설 《맡겨진 소녀》의 주인공은 가난한 농가의 여러 딸 중 하나다. 부모는 새로 태어날 동생의 출산을 준비하느라 소녀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긴다. 그 집에는 아이가 없다. 낯선 사람들의 집에 맡겨진 소녀는 잔뜩 긴장하지만, 다행히 부부는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다.
소녀는 지금껏 자신이 살던 집이, 자신이 속한 가족이 전부인 세상에서 살았다. 아주머니는 긴장한 소녀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자다가 매트리스에 오줌 눈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체해준다. 아저씨는 소녀에게 다정히 농담을 건네고, 전속력으로 달려 진입로에 있는 우편함에서 편지를 가져오게 한 후 칭찬해 준다. 늘 지쳐 있고 아이들을 성가셔 하며 죄의식을 심어주던 부모와 함께 살아온 소녀에게는 이런 생활이 너무나 낯설다.
그러나 소녀는 조금씩 적응해 나간다. 아주머니 아저씨와 함께 식사를 하고, 하루 종일 아주머니를 도와서 집안일을 한다. 아저씨의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밤에는 어른들 모임에 끼어 간식을 얻어먹기도 한다. 부부는 소녀를 마치 친딸처럼 편하게 대하면서도 아껴주고, 소녀는 조금씩 그들에게 마음을 의지하게 된다. 소녀는 난생처음 세심히 이해받는 느낌이다. 부모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한 가족에 속한 느낌이다.
얼마 전 친구가 내 아이들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일 것이다. 나는 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제 고작 두 돌이 지난 첫째는 별수 없이 방치되어 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는 발에 스티커가 붙어 성가셔 하는 내 딸을 보았다. 그 애가 혼자서 스티커를 떼지 못해 칭얼대자, 다정한 내 친구는 “이모가 떼어줄게.”라고 하며 딸에게 다가가 발에서 스티커를 떼어주었다고 한다. 그때 딸은 낯을 가려 경계하면서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표정을 상상할 수 있다. 조용히 기쁨에 겨운 표정. 조심스럽게 기뻐하는 표정.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아이 둘과 씨름하는 매일에 지쳐서 그 애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돌봐줄 여유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앉혀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스티커를 떼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고마웠고, 동시에 내 아이를 생각하며 조금 슬펐다. 그 아이의 유년 시절에 내가 모르는 얼마나 많은 기쁨과 슬픔이 스쳐 지나갔을지를 생각하니 슬펐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잘 돌보는 것,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이 부모의 품을 잘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무슨 역할을 할까? 아이들도 부모에게 주는 것이 있을까? 부모도 아이들한테 받는 것이 있을까?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키울수록 마이너스라면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에게 받은 무한한 사랑과 신뢰야말로 아이를 낳아서 얻은 가장 큰 이득이라 생각해 왔다. 그래, 이 아이들이 아니라면 세상 누가 이렇게 날 사랑해 주고 믿어주리. 그런데 <우먼>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산을 좋아했던 코하루의 남편 신은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대해,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마지막 페이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다고, 정상에 오르면 그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정답 같은 것은 없다. 누구도 자기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사람은 그들의 아이들이다.
언젠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아이들이 부모의 인생을 대신 읽어줄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남긴 답을 아이들이 잘 간직할 수 있도록,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모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오직 그것뿐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아이들이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내 주변의 결혼한 커플들 중 절반은 아이가 없다. 지나가는 유아차 안을 슬쩍 들여다보면 아이 대신 강아지가 앉아 있다. 놀이터는 늘 텅 비어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돈을 주면 아이를 더 낳을까? 겁을 주면 아이를 더 낳을까? 아이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과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과 따뜻하게 보살필 수 있는 마음은 여유에서 오는 것 같다. 물질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에서도. 그러니 우리에게 돈보다는 시간을 달라고 이 세상에 요구할 수밖에 없겠다. 아니, 돈도 주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도 주라고 세상에 요구할 수밖에 없겠다.
세상의 속도를 늦춰 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겠다. 세상의 속도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속도는 세상이 늦춰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누구도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라도 해야겠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시간이 전부니까. 아니, 사실상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전부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