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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곤란한 감정, 위로 : 작가 김신식
누군가와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얼룩이 지고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 자리엔 지우고 덮어낼 무언가가 필요하다. 바로 ‘위로’라고 하는 것. 필요하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연하게, 만연히 알려진 이 단어의 이면을 살펴보려 했다. 낯선 감정을 바탕으로 사회 속 숨겨진 단상을 꺼내 보인 책 《다소 곤란한 감정》엔 위로의 비밀한 뒷모습이 담긴 네 단어가 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가끔은 예민하고 민감하게 다가가 보는 그런 시간이다. 익숙한 단어 속, 낯선 감정이 스며 있는 풍경.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위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람 간에 쌓이는 감정, 관계 속에 숙성된 속마음, ‘심정’. 이 복잡하고도 모연한 개념의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됐다. 편집자이자 작가, 비평가이자 감정사회학자인 김신식 작가는 사회 속에 피어나는 감정을 공부하다가 심정이라는 단어와 마주했다. 익숙하게 보아온 사람과 긴 시간 동안 쌓아온 감정의 일환인 이 심정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안개처럼 가려진 속내를 걷어본다.
– 《다소 곤란한 감정》 중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김신식 작가는 독자를 부르는 말로 ‘우리’나 ‘현대인’ 대신 ‘나’와 ‘너’의 호칭을 택했다. 개성을 가진 각자에게 ‘우리’라는 지칭이 과연 마음속에 잘 닿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조금 더 예민하게 자기의 감정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을 상상하고 그들을 위해 작은 것부터 골몰했다. ‘나’는 ‘너’가 있을 때 가능한 표현이라는 것. 함께 사는 세상에서 개개인의 감정이 결코 크고 둔감하게 다뤄지지 않길 바라는 그의 심정이다.
“사회학하면 여전히 거시적 차원의 연구를 많이 한다, 집단의 감정을 연구해야만 한다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해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좀더 작은 사회에서 출발해 보고 싶었어요. 당신과 나, 나와 당신이라는 관계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서 결코 작은 부분이라도 무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요.”
감정은 늘 예고 없이 노크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내 안에 자리잡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직접 겪어볼 수 없는, 오롯이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엇이다.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곱씹어 보는 일은 어쩌면 거울을 보는 일과도 같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투명한 거울일지도.
부산에서 양장점을 운영했던 외할머니와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외삼촌. 그리고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그는 발명하고 발견하는 일에 익숙한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유년 시절에 그가 살던 집은 외할머니의 양장점과 가깝게 붙어 있어, 작은 문틈 사이로 그녀에게 옷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관찰했다. 매일 그 풍경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의 태도, 대화, 표정, 몸짓 등으로 저도 모르게 감정을 가늠하는 습관이 생겼다. 《다소 곤란한 감정》 안에도 감정을 품은 사람들의 순간을 묘사하는 습관이 문득 엿보인다.
“외할머니는 고령이셨지만 기억력이 무척 좋으셨어요. 일곱 살 난 저에게 이미 일어났던, 지나간 일들을 시간이 흐른 뒤에 종종 이야기해 주셨어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세히 들린 말들이 지금도 잘 떠올라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는 저에게 일종의 심정을 토로하신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경향이 남아 있어요. 말 그대로 숙성된 감정, 쌓아온 감정을 돌아보면서 나한테 어떤 감정이 생겨났는지 복기해 보는 습관이 배어 있게 된 거죠.”
《다소 곤란한 감정》엔 다양한 심정이 스며든 가운데 작가 본인의 심정 역시 함께 담겨 있다. 목회자였던 부모님 슬하에서 겪어온 일들을 책 안에 기록하기도 한다. 그가 계속해서 감정을 해석하고 살피는 이유는 뭘까. 김신식 작가는 늘 이상하고 찝찝하지만 어쩐지 곁에 두고 싶은 존재를 감정이라고 말한다.
“감정은 저에게 무조건 좋게만 다가오지는 않아요. 찝찝하고 명쾌하지 못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더 많아요. 동시에 낯섦을 체험하게 만드는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하죠. 그렇게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요. 이건 제가 감정을 괴랄한 ‘친구’라고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힘들지만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게 만드는 힘. 이게 제 안에서 감정이 하는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욱 오래, 감정을 붙들어 살아가고 싶어요.”
《다소 곤란한 감정》은 감정사회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오로지 감정만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감정 파헤치기를 해결책으로 내세우기 보다, 감정을 뒤집어 다시 생각해보기에 가깝다. 그렇게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충돌을 연구한다. 그 속에서 ‘위로 민감성’, 위로하는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단어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왜 우리는 꼭 위로받아야 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가정되어 있는 걸까. 늘 긍정적이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위로가 때로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 결국엔 또다시 위로가 필요한 상황을 만든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보이지 않는 괴로움이 꿈틀거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힐링 문화 비판이 한국 사회에서 집중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위로 역시 필요로 하지만 그만큼 위로를 의심하는 과정을 통과 중이라고 생각해요. 위로, 공감, 연대 같은 주제는 오늘날 가장 필요하면서 가장 의심하는 화두가 아닐까요. 선의의 개념이지만 그에 따라서 생기는 폐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위로를 거부하기보다는, 위로라는 말에 예민해져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단상을 살펴보고 싶어요.”
Q. 우울을 통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무거운 감정이 힘들기만 해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같은 우울한 마음을, 과연 좋게 볼 수 있을까요?
“G와 저의 대화를 예로 들어볼게요. G는 자신이 건네는 위로가 진부하게 받아들여질까 봐 고민이 많은 친구예요.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도리어 자신이 우울해지고 말아요. G와 저는 오랜만에 만나 시시콜콜한 안부를 주고받다가 서로의 우울을 꺼내게 돼요. 그렇게 각자의 힘든 감정을 이해하고 묶여 있던 우울에서 잠시 멀어지게 됐죠. 각자의 힘든 감정을 이해하고 묶여 있던 우울에서 잠시 멀어지게 됐어요. 우울이 ‘우정의 가교’가 될 수 있음을 된 거에요. 우리의 대화를 통해서 우울감이 늘 부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까, 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었어요. 이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울은 감정을 되돌아보는 감정 경험으로, 어떤 경우에서는 우울해서 힘들기 때문에 또 다른 해결점을 찾으려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느꼈어요.
수많은 우울증 수기와 논문을 보면 대개 마지막 결론은 어떠한 해결점에 다다랐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우울은 그저 죽고만 싶은 감정이 아니라 극복 지점으로 향하기 위해서 필요한 ‘중간 감정’일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우울을 또 다른 관점에서 정의한 것처럼, G와 제가 서로의 우울감에 공감한 것처럼 우울을 그저 눅눅하고 울적한 감정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멀어지기를 바라요. 각자의 삶에서 좀더 넓은 방향으로 재해석해 보는 건 어떨까요. 우울해서 힘든 순간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서로의 어둑한 감정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ps. 때로는 엉뚱한 이야기로 대화를 채워보세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어떤 이론적 방법보다도 가깝고 진솔한 해결책의 신호가 될 수 있어요.
Q. SNS를 통해서 감정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해요. 매일, 당연하게 일어나는 비교의 순간과 멀어질 수 있을까요?
“SNS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 사람들은 괜히 안부를 물어오곤 해요. 미디어에서 나를 대변하는 무언가에 변화가 생겼을 때, 감정 상태를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짐작당하는 거죠. 타인의 상태를 묻는 선의가 사실은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지점이에요.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그리고 앞으로 발명될 관계 지향적인 미디어들까지. 온라인으로 서로의 소식을 확인하는 문화가 익숙해진 지금 나의 겉면, 즉 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만을 보고 심정을 추측하는 습관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싶어요.
타인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듯한, 이런 식의 태도를 나 자신부터 지양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열어보는 SNS는 비교의 장이 되기도 해요. 이런 지점은 늘 사람을 괴롭게 하는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고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새로운 고민으로 자리 잡았죠. 결국엔 자신의 결핍만을 고민하고 자책하게 되는 과정으로 접어들어요.
하지만 저는 이 결핍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자기 삶의 타이밍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비교하는 대상을 따라잡으려고 아등바등 용쓰다 보면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몰두하던 결핍의 화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온다고 믿어요. 물론 이 결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해요. 먼저, ‘아등바등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너무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기’, 그 다음 ‘비교 대상의 장점을 시인하고 인정하기’, 마지막 ‘결핍이라고 생각한 무엇이 결국엔 자신이 잘해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복원해보기’. 나를 힘들게 하는 SNS를 좋게 소비할 수 있는 방식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쫓고 쫓으면 점점 비교의 대상과 멀어지는 당신을 발견할 수도 있겠죠.”
Q. 공감과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들어주기만 해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공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잘 공감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끊임없는 부담감에 쌓여 녹초가 돼요. 저는 비평가이기 때문에 이 공감 피로에서 오랜 시간 맴돌았어요. 어떻게 하면 기존과 다른 시선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단어를 끌어올까, 골몰한 순간들이죠. 스스로 공감했던 자세를 비판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해요. 가령, 내가 오늘 공감을 잘했는지, 너무 둔감하게 공감을 표하지는 않았는지 ‘셀프 테스트’를 하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저처럼 공감 피로를 겪는 사람들은 한편으론, 공감을 잘하는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기도 하죠. 대화를 나누는 관계에서 마치 ‘내가 네 고민을 잘 들어주고 있다’는 뉘앙스를 내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고요.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 뒤에 자기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뼈아픈 지점들을 꼬집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저 자신까지도요.
공감 피로에서 벗어나 그저 들어주는 것, 그 자리가 끝난 뒤에 시간을 두고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려 보는 것, 내게 고민을 말한 상대방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기다리는 일이에요. 때로는 밋밋하고 멍하게 느껴지더라도 답답한 순간을 참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기다려 주세요. 시간이 지나 언젠가 ‘그때 정말 위로가 되었다’는 말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제아무리 진부한 방법이라고 해도요.”
Q.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조력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돕고 동시에 도움받으며 살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감정 상태를 학술적 용어로 ‘조력자증후군’이라고 해요.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 즉 사회적으로 조력자 위치에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고충이죠. 조력자는 기본적으로 타인 지향적인 성향을 가져요.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죠.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그들도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딘가에서 풀어내야 해요. 여기서 ‘일터 괴롭힘*’이 발현돼죠. 외부에서 받은 피로와 부정적인 에너지를 그들의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이 있는 집에서까지 쏟아내는 것이에요. 그렇게 집도 일터가 되어버려요. 흔히 말해, ‘쟤 집에서는 안 그런다?’ 같은 이야기요. 꼭 조력자에 가까운 직종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사회 안에서 도움을 주는 위치에 속해 있어요. 대부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이런 상황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빈번하게 일어나요. 그래서 더욱 무섭기도 해요. 이 증후군이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바로 자신이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혹, 자신이 조력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면 지금 이 시간이 자기 주변과 자신을 헤아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요. 위로가 필요한 상황을 직면하기 전에 꼭 기회를 잡아보세요.
조력자증후군의 피해는 저 역시 겪어 오면서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해 맴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다 할 해답을 드릴 수도 없어요. 그저 자신의 관점에서 조력자증후군을 바라볼 수 있는 사고의 시작이 된다면 좋겠어요. 아직 결론이 없는 이 이야기에, 언젠가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본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 근무처에서 느낀 피로도와 어떤 감정이 집까지 확장되어 다가오는 것. 집 자체가 일터가 되는 것.
에디터 김지수
사진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