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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K의 가소로운 일상 기행
만화책 《新공태랑 나가신다!-유도 편》의 등장인물 ‘시로’는 작은 체구에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 주연급 캐릭터가 대개 그렇듯 타고난 약골인 그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극한의 상황에서 정신을 잃으면 등장하는 ‘태풍 메치기’가 바로 그것이다.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궁극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나는 오늘 유도장에 간다.
어린 시절 자주 가위에 눌렸다. 엄마는 사탄에 씐 거라며 내 머리통을 붙잡고 밤새 통성기도를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나는 그것이 사탄의 농락이 아니라 타고난 체질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건강해지기 위해 포레스트 검프처럼 뛰고 또 뛰기를 반복했다. 종아리가 두꺼워졌고 숨을 오래 참을 수 있게 됐으며 남보다 빠르고 오래 달릴 수 있게 됐다. 급식 시간에 제일 먼저 식당에 도착할 수 있게 됐고, 힘찬 도움닫기로 담을 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학교 대표로 전국 대회에 나가게 됐을 때는 여학생에게 핫초코와 피자빵을 받기도 했다. 세상의 짱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자 달리기를 잘한다는 건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격식을 차리는 불편한 자리에 참석했을 때, 상사에게 꾸짖음을 들었을 때, 연인과 크게 다투는 순간순간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도망가는 충동을 느끼지만, 그렇게 했다간 돌아갈 자리가 사라지고 만다는 걸 알아 버렸다. 도망가지 않고도 위기의 순간을 잘 넘길 수는 없는 걸까? 까까머리 유도선수 시로처럼 상대를 넘기는 궁극의 필살기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게 됐다. 베이징올림픽 유도 국가대표 최민호의 한판승 모음이었다. 눈도 작고 키도 작고 심지어 피부마저 하얀 그가 험상궂고 털도 많은 상대들을 차례로 넘기는 장면이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상대를 매트 밖으로 던져버리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 저건 태풍 메치기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근처 유도장을 검색했다. 나오지 않았다. 뮤직 복싱과 주짓수에 밀려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지식iN’은 말했다. 그나마 버스를 타고 30분은 가야 하는 곳에 유도장이 하나 있었는데, 인원이 많지 않아 체급과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함께 수업을 받는다고했다. 코찔찔이 초딩과 함께 수업을 받는다는 것에 자존심 상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도인이 된 첫날, 입관 원서를 쓰고 빳빳한 유도복을 받아 입었다. 대여섯 명이 모인 작은 공간에서 관장님의 구령과 함께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단단한 체구의 관장님은 생긴 대로 무뚝뚝했다. 그는 ‘진정한 무도인은 스스로 터득한다.’라고 선언이라도 한 듯, 운동 순서나 요령 따위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눈치껏 다른 사람의 동작을 보고 낑낑대며 몸을 풀어야 했다. 고작 몸 푸는 동작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크고 작은 부상이 예정된 격투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몸풀기였다.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크게 다치지않는다고.
준비 운동이 끝나고 사람들은 대형을 짜 기술을 연습했다. 허리에 감은 띠의 색깔로 그의 위상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검은 띠를 두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추성훈처럼 얼굴이 검었다. 강해 보이려고 태닝을 한 건지, 아니면 격투기를 오래 하면 간이 나빠지는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눈치 없는 나도 건들면 안 되는 상대를 알아보는 능력은 있다. 관장님은 멀뚱히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낙법을 가르쳤다. 낙법이란 메치기를 당하거나 갑작스레 넘어질 때 안전하게 몸을 보호하는 기술로, 숙련된 서커스 단원처럼 불붙은 굴렁쇠를 뛰어넘고 싶다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 먼저 전방 낙법은 넘어지는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려 코가 깨지지 않게 하는 기술이었다. 매트리스에 양손을 동시에 짚으며 ‘펑’ 소리가 크게 나도록 내려치는 것이 핵심이다. 관장님은 소리가 크고 경쾌하게 나면 아무 말도 없다가 ‘펑’이 아니라, ‘퍽’이나 ‘퍼벅’ 같은 소리가 나면 험상궂은 얼굴이 됐다. 유도복을 처음 입은 지 20분도 안 된 사람에게 짓는 표정치곤 꽤나 리얼했다. 태국 여행에서 두리안을 처음 맛본 내 친구가 딱 저런 표정을 지었는데, 유도의 세계에서 나는 자주 두리안이 됐다. 고약한 과일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며 용케 그날의 운동을 마쳤다. 쓰지 않던 몸의 근육들이 꿈틀댔는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일이면 좀더 멋진 기술을 배우겠지? 이렇게 강해지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기술은커녕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낙법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넘어지고 옆으로 넘어지고 달리며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낙법, 낙법, 낙법! 온통 낙법뿐이었다. 길을 걷다 낙지가 적힌 간판만 봐도 신물이 올라왔다. 보름간 낙법의 개미지옥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관장님은 서두르지 말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건 지구를 상대하는 일이다.” 관장님이 말했다. 어쩐지 거창한 말이었지만 근사한 표현 같았다. 유도는 주먹 크기나 발차기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지구의 힘을 이용해 나보다 큰 상대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반대로 지구에 떨어졌을 때 죽거나 다치지 않는 방법 역시 낙법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잘 넘어지는 기술을 배우는 중이로군.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방법을 익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유도가 조금 시시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시시한 일이 하루빨리 몸에 배었으면 하고 바라게 됐다. 자전거 타는 법을 평생 잊지 않는 것처럼, 물속에서 몸이 저절로 뜨는 것처럼, 유도를 그만두더라도 평생 쓸 만한 낙법 하나가 몸에 새겨진다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자라오며 나는 누군가를 거느리는 쪽이 아니라 늘 그 반대편에 있었다. 한마디로 약해빠진 애였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히는 애의 콧잔등을 날리기보단 제발 때리지 말아 달라며 구걸하는 쪽이었고, 내 물건을 가져간 애에게는 괜찮으니 네가 편할 때 돌려달라고 말하는게 편했다. 누군가를 때리면 상대가 아파할 테니까,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한 번 더 참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좋게 말해 평화주의자, 나쁘게 말하자면 찌질이. 그런 사람이 기술을 익힌다고 상대를 바닥에 메칠 수 있을까? 아무리 오래 유도를 배운다 해도 아마 나는 이렇게 밖에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 유도 했어. 검은 띠야. 꺼져. 괴롭히지 마세요. 제발요.”
한 달이 넘어 드디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대의 도복 잡는 법을 배우고, 업어치기를 배우고, 굳히기를 배웠다. 한 번은 발기술로 상대의 중심을 흩뜨려 주저앉게 했는데, 그건 내 기술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힘을 적절히 흘려보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는 언제나 바닥에 눕는 역할이다. 메쳐지고, 고꾸라지고, 걸리고, 넘어지고, 그렇게 수백 번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안 아프게 넘어지는 방법이 몸에 익기 시작했다. 굳히기로 숨이 막힐 때도 버티지 않고 재빨리 탭을 치면 상대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공격을 온몸으로 저항하기보단 움직임의 흐름을 따라가니 만사가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태풍 메치기 같은 필살기는 애초에 나에게 필요하지도 않았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닥칠 성가신 공격들에 아프지 않게 넘어질 수 있다면 굳이 상대를 해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그런 사실을 깨달았지만 나는 여전히 유도장에 간다. 여전히 운동을 하기 전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여전히 몸을 유연하게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여전히 낙법을 배우고,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조금은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시하고 반복적인 운동이 좋다. 빠른 발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도 스릴 있지만 그건 최후의 보루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내겐 낙법이 있으니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