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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흐르는 방콕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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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흐르는 방콕의 시간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방콕으로 떠났다. 내 나이 서른이 되던 해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될 것 같아서’라든지 ‘아주 잘 다니던 직장을 박차고 떠나왔다’라는 식의 드라마틱한 이유는 없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3개월짜리 왕복 티켓을 손에 쥐고 태국으로 왔고, 3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버렸다. 그리고 방콕에 작은 카페를 하나 열었다.
작은 동네에서
시작된 일
그동안 어쩌다 방콕에 머무르게 되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돌이켜보면 그건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방콕에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은 람성Ramkhamhaeng 이라는 외곽지역, 전철이나 지하철이 다니기는커녕 이따금 그곳을 지나는 버스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방콕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내 중심에 있는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을 가기 위해 매일 4시간을 버스에서 보내야 했지만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난다.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기에 좋은 점들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가까웠으며 지역 내 교류가 활발했던 것. 매주 서너 번 열리는 야시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기로 유명했고, 매일 가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아주 저렴한 가격의 마사지 가게와 풍성한 먹거리가 있었다.
거리를 거닐 때면 정겨운 얼굴의 학생들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고 쏙 숨어버리곤 했다.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영어에 능숙했던 롯띠Rotti(인도식 팬케이크) 가게 아저씨는 인도 사람이었는데 나와 마주칠 때마다 “Hi” 하며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길거리 스테이크 가게 아주머니와도 금세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외국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지역에서 한국인의 등장은 꽤 화젯거리였던 모양이다(태국에서는K-pop과 드라마의 열풍으로 한국인들이 인기가 좋다). 모두가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람성에서 방콕 생활을 시작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에 머물렀다면, 태국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음은 물론 이렇게 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카페나 할까?
외국에서 카페를 운영한다는 건 막연한 로망처럼 느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방콕에 머물게 된 이유가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내가 카페를 시작하게 된 것 역시 그랬다. 카페 ‘데이 오프 데이Day off day’는 방콕의 베링Bearing이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카페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장소를 찾아본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작은 공간을 만나게 되어 카페를 열었다. 마치 <카모메 식당>의 마사코 상이 고양이를 떠맡게 되어 어쩔 수 없이 핀란드에 남기로 결정한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순서가 뒤죽박죽이긴 하다.
카페들이 몰려있는 수쿰윗Sukhumvit 중심가와는 달리 베링은 방콕의 지상철(BTS)에서도 가장 종점인 로컬지역이다. 태국의 카페들은 보통 2층 이상의 건물에 테이블이 수십 개가 되는 큰 규모가 많은데, 데이 오프 데이는 테이블이 딱 4개뿐인 아주 작은 공간이다. 이렇게 작은 카페가 드물어서인지 신문과 잡지, 방송에도 몇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받은 인터뷰 질문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지역에서 하는 것이 좋지 않아요? 이 지역은 여행객들이나 사람들이 찾기에는 조금 힘들지 않나요? 왜 이렇게 작은 공간에 카페를 했어요?” 나는 카페를 준비하면서 한국에서처럼 온통 일에 신경을 쓰거나 욕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렇다고 아무 노력 없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태국에 온 뒤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고 싶었다. 이 공간은 카페이기 전에 내가 글을 쓰고, 작업을 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인파로 붐비는 카페가 되기보다는, 태국인들의 생활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누군가가 잠시 카페에 머무르며 ‘이런 곳도 방콕이구나’ 하고 느꼈으면 했다. 더불어 주변 사람들이 자주 들러 여유를 느끼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카페는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여행자들이 트럭을 개조해 만든 마을버스 썽테우를 타고 동네를 구경 왔다가 쉬어가는 공간, 작가들의 글을 쓰는 공간, 엽서나 가방을 만들어 판매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공간. 때로는 한국 여행을 앞두고 있거나 진짜 한국인을 만나고 싶어서 오는 이들,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자주 이용하는 항공사의 승무원들도 다음 비행을 앞두고 종종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실 이곳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카페임을 알아챌 만한 단서는 입간판에 ‘안녕하세요’라고 적힌 한국어 인사말뿐이다.
어느 날, 한 외국인이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하며 카페에 들어왔다. 그와는 동네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무에타이를 배우기 위해 태국에 머물고 있는 미국인이었다. 그에게 아메리카노를 대접하는 건 여간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니었다(타이 밀크티를 만들 때마다 태국인들의 반응이 어떨지 조마조마한 것과 비슷하다). 다행히 그는 이후에도 카페에 찾아와 “안녕하세요” 하고 호탕한 인사를 건네고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리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곤 했다.
슬로우 카페,
데이 오프 데이
카페를 한다면 커피는 꼭 태국에서 생산된 커피를 사용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이전호에 소개했던 것처럼 치앙라이Chiang Rai에서 나고 자란 커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맛도 여타 커피에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국에서 생산된 가장 신선한 커피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태국 커피는 에스프레소 머신보다 직접 내렸을 때 맛이 더 좋아, 시간과 정성이 두 배로 들어가는 핸드 드립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태국은 아직 커피 문화가 많이 확산되지 않은 편이라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자신이 주문한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길 즐긴다. 처음 카페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핸드 드립 카페가 별로 없었는데, 조금씩 많아지는 추세다.
데이 오프 데이는 커피가 아닌 음료도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한국에서 한때 핑크레모네이드가 유행이었던 것처럼 이곳에는 핑크라임에이드가 있다. 핑크레모네이드와 다른 게 있다면, 색소가 아닌 안찬(Butterfly pea flower)을 우려 색을 냈다는 점. 태국에서는 이 안찬을 이용한 음료를 종종 볼 수 있다. 또 라임이 생산되는 나라이기에 레몬보다 라임을 사용해 새콤한 맛을 더했다. 주문을 하면 라임에이드와 안찬티를 따로 내는데, 직접 라임에이드에 섞으면서 점점 핑크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사실 카페에서 근무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마케팅을 담당하는 사람 아니 고양이와 함께다. ‘메오’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독일인 친구 앤Ann의 고양이가 낳은 새끼로 내게 온 지 2년쯤 되었다.
원래 ‘메오’라는 단어는 태국어로 ‘고양이’라는 뜻인데 어감이 좋아서 몇 번 부르다 보니 이름을 되었다. 태국 손님들은 이름을 듣고 어김없이 웃는다. 고양이에게 고양이라고 이름을 붙인 셈이니 말이다. 메오는 카페에 종일 머물며, 손님들이 올 때마다(특히 새로운 사람) 뚱뚱한 몸을 비벼가며 애교를 부려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나는 메오에게 한국 성을 붙여 ‘김메오’라고 부르는데, 태국인들도 어떻게 알았는지 똑같이 “김메오-” 하고 따라 부르기도 한다. 카페에는 그의 지정석이 있다. 가끔 그 자리에 손님이 앉아있으면 그 앞에서 “메오오-” 울며 자기 자리에서 비켜달라고 해서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홀로 방문한 손님의 맞은편 자리를 채워주고 외롭지 않게 하니 과연 마케터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듯하다.
메오와 나는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같이 카페로 출근한다(정작 그는 자신이 출근 중인 것도 모르겠지만). 카페에 오면 가장 먼저 그의 사료와 물을 넉넉히 채워주고, 카페를 깨끗이 청소하고, 민트를 손질하고, 라임을 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카페를 커피향으로 채운다는 핑계로 나를 위한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아무도 없는 카페에 앉아 책을 꺼내어 읽고 있으면 이곳이 방콕인지 한국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카페에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책들과 태국인 작가들이 자신이 썼다며 놓고 간 책들이 비치되어 있다. 태국 책과 한국 책이 한데 섞여 있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도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든다.
단출하지만
초라하지 않게
유독 태국은 정형화된 이미지가 많았다. 유흥과 밤 문화, 휴양지, 쇼핑, 패키지 여행, 마사지, 지저분한 도시, 가수 닉쿤의 고향 등. 나 역시도 이곳에서 살기 전까지는 그저 쇼핑하고 즐기기에 좋은 동남아 국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태국에 정착하면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패키지 여행상품과 밤 문화로 점철된 태국은 사실 아주 매력적인 슬로우 시티Slow City였다. 이곳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마음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기도 했다. 날마다 사진을 찍고 주변을 돌아보며 거리를 걸었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 나는 이곳에서 일상의 작은 감정 하나까지 기록하고 여행을 다녔다. 사실 이토록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집중했던 시간이 있었던가 싶다. 한국에서의 나는 사실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또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동안 내 삶의 영역이 얼마나 좁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내가 어느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리라. 카페 문을 연지 이제 8개월 남짓, 앞으로 데이 오프 데이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나는 한국에 많은 것을 두고 떠나왔고, 그중 대부분을 잃었다. 방콕에서 테이블이 4개뿐인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오히려 더 가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기약 없이 떠나와서 기약 없이 태국에 머물고 있다. 이 나라에서 평생을 살게 될지 아니면 떠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많은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얻는, 단출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카페 데이 오프 데이
방콕 베어링역 3번 출구, Bearing(Sukhumvit 107) soi. 2
Tel +66 86 409 8776
Open 목 – 토 1:00pm-9:00pm, 일 2:30pm-9:00pm
zooey_kim.blog.me
TIP
데이 오프 데이의
핑크라임에이드 만들기
1. 안찬 4~5장을 뜨거운 물에 넣고 우린다. 뜨거운 물을 붓자마자 색이 나오므로 음료를 만들기 직전에 우려도 된다.
2. 우린 물을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다.
3. 기다리는 동안 라임즙을 낸다.
4. 얼음을 가득 채우고 소다수를 부어 충분히 섞어준다.
5. 차갑게 식힌 안찬을 음료에 붓는다. 이때 안찬을 음료 위에 얹어 장식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한 분홍빛을 더한다.
* 태국의 전통적인 허브식물 ‘안찬’은 천연 색소로 쓰이며 인체에 무해하다. 안찬에는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이 함유돼 있어 눈의 염증을 치료하고 시력을 개선하며, 산화방지 및 면역력 강화 등의 효과가 있다. 또한 머릿결을 좋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어 태국에서는 화장품 및 모발 제품, 건강제제 등의 원료로 널리 쓰이고 있다.
에디터 오혜진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