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단어

이별

이별

 

[ 이ː별 ] 서로 갈리어 떨어짐

 

근처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D 씨는 책방을 가장 자주 찾는 손님이다. 작은 동네, 작은 책방, 작은 도서관. 그와 나는 ‘작디작은 곳에 자리 잡고 홀로 일하는 노동자’라는 공통분모 덕에 가까워졌다. 푸념과 넋두리를 나눌 상대가 생겨 안도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최근 우리는 도서관에서 함께 운영할 글쓰기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여러 아이템을 두고 고민하던 중, D 씨는 어머니의 삶을 재구성해서 기록해보자고 제안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좋은 기획이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시에 글쓰기에 참여하기로 했다. D 씨는 이번 기회에 그동안 몰랐던 엄마의 삶에 관해 많이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엄마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어떤 위기감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가 부탁해 책방에 입고한 책들을 머릿속으로 죽- 훑어보았다. 그중 그물에 걸린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다. 프랑스의 지성,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은 후 2년동안 쓴 상실의 기록이 담긴 책이다.

 

D: 매일 엄마한테 짜증 내요.

나: 그건 전데요(웃음). 짜증 내는 도중에 실시간으로 후회해요.

D: 저도요. 그런데 가끔은 출근하면서 오늘이 엄마를 보는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엄마 없으면 어떻게 살까. 상상만 해도 암담해요.

나: 《애도 일기》 때문인가요?

D: 맞아요. 그 책 괜히 샀어. 요즘은 온통 엄마의 죽음 이후만 생각한다니까요.

 

엄마와의 이별을 생각하는 일에 시동을 걸고 나자, 그는 곧 그에게 닥칠 온갖 종류의 이별을 미리 슬퍼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물렁해지는 계절이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이별의 그림자가 꽤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또 다른 이별은 좋아하는 작가와의 이별이다.

도서관 사서인 동시에 일본 문학 번역가이기도 한 D 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70대 노인이 된 하루키가 죽으면 어쩌나 싶어, 엄마를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마음 졸인다. 작가의 부고를 듣는 날이 최대한 천천히 오기를, ‘장수의 나라’에 사는 마라톤 애호가인만큼 오래오래 살기를 빈다. 다 읽은 책을 또 읽고, 다시 또 읽으며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 뿐이 아니다. D 씨가 이별을 두려워하게 된 후로 그의 연애에도 차질이 생겼다.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려면 다가올 이별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분간 연애의 욕구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를 통해 해소하겠다고,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남자는 작품 속 주인공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는 결혼할 생각도 없다. 해를 넘길 때마다 ‘결혼’이 연애의 종착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별을 전제로 하는 연애는 사절이라고, 그는 못을 박았다.

 

D: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이별이 두려워서 주춤거리다가 떠나 보낸 인연이 많아요.

나: 주춤하면 어색해지고, 그럼 다 틀어져버리죠.

D: 네. 어색한 것도 헤어지는 것도 끔찍하게 싫어요. 이별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건 무서운 일 같아요.

나: 슬프네요.

D: 이 책방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문 닫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슬퍼져요. 문 닫기 한참 전에 저한테 말해주세요! 천천히 마음 정리하게.

 

철학자 김진영의 산문집이 떠올랐다. 파란색 책등을 가진 《아침의 피아노》는 저자가 임종 3일 전까지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길고 짧은 산문을 넘기며 마침내 다가올 나의 미래를 천천히 생각했다. ‘사랑의 대상’들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며 생의 끝을 맞이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사랑을 인지하며 사는 일은 아주 어렵다. 우리는 매일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나날을 고민하게 하는 페이지였다.

다만 이듬해 출간된 붉은색 책등의 《이별의 푸가》에서는 작은 위로를 발견했다. 우리에게는 끝내 추억만이 남을 것이다. 그 추억에는 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그렇다면 간직할 만한 고운 흔적을 많이 남기는 것이 남은 생의 목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뻔한 다짐을 다시 한 번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자’, ‘우리가 함께한 장면을 아름답게 남기자.’ 망각의 동물은 같은 주문을 주기적으로 되새긴다.

이제 본격적으로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사랑하는 가족에 관해 다시 묻고, 떠올리고, 추억하며 글을 지어낼 이들과의 만남이 코앞에 있다. 무얼 준비해야 할지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종이와 연필, 그리고 티슈나 넉넉히 준비해두자고 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적다 보면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르는 가을의 아침이 오겠지. 벌써 슬프고, 참을 수 없이 기대된다.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뒤적인다. 부끄럽고 괴롭다. 그의 고통들은 모두가 마망 때문이다. 마망의 상실 때문이다. 그의 고통들은 타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인가. 그건 오로지 나 때문이다. 나는 나만을 근심하고 걱정한다. 그 어리석은 이기성이 나를 둘러싼 사랑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실 나는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이미 상실했다. 그러나 내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한다. 나는 그들을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된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사람이 떠나면 추억이 남는다. 나는 그 추억을 꼭 붙든다. 추억이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워서. 추억이 떠나면 나는 그 사람을 잊고, 그 사람도 완전히 나를 떠나고 말까 봐. 나는 망각의 두려움과 맞서서 추억에 매달린다. 하루 종일을 추억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부재의 추억은 얼마나 허망하고 괴로운 것인지. 안개를 움켜쥐는 것처럼 그 사람의 부재만을 확인시키는 추억들.

나는 차츰 추억에 지친다. 추억이 싫어지고 미워진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이지 추억이 아니야, 라고 격렬하게 항의한다. 그런데 나의 항의에 추억도 항의하는 걸까. 추억은 물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집요하게 내게 매달린다. 그런데 왜일까? 왜 추억은 물러가지 않는 걸까? 내가 그 사람에 매달리는 것처럼, 왜 추억도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 걸까? 그건 혹시, (…) 추억이 그 사람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


– 김진영 《이별의 푸가》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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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