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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달아나며 늘 함께 : 물건으로 나누는 대화
어떤 물건들은 말을 건다. 기능 없는 물건일수록 더 그렇고 누군가와 연관된 물건인 경우에 어쩐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완두는 작은 물건들을 이빨로 물고, 가지고 달아나고, 어딘가에 숨겨놓는다. 가끔 나는 그 물건들에서 짧은 메모를 발견하곤 한다.
먹을 것도 중요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고 또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게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개와 사는 동안 그저 산책을 자주 나가려고 하는 편이다. 그래서 완두는 나만 보면 일단 문 앞에 선다. 내가 나갈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금세 파악하고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데, 어쨌든 일단 문 앞에 서서 나를 한번 보는 것이다. 나 자신도, 완두를 둘러싼 사람들 중에서, 산책을 담당하는 게 나라고 여기고 있다. 장난감을 사주는 사람은 보통 엄마나 친구들이다. 엄마는 장 보러 나갔다가 별로 비싸지 않고 완두 입 크기에 들어갈 만한 게 있으면 가끔 사온다. 탁구공을 사왔다가 그게 금세 부서지면 골프공을 줘보고,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다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뒤 테니스공을 사오는 식이다. 그런 과정 끝에 완두도 엄마도 만족하게 된 장난감은 방울이 든 고무공. 칼국수 면처럼 얇은 색색의 고무링을 얽어 만든 공에서는 물고 도망갈 때 귀여운 방울 소리가 난다. 어릴 적에는 딱딱하든 크기가 크든 세게 물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던 완두는 이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적당히 깨물고 자신만 아는 장소에 숨겨놓을 줄도 알게 되었다. “기특해.” 엄마는 그런 완두를 보며 몸과 생각이 쑥쑥 자라나는 어린이 대하듯 말한다. 나는 그 단어가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대충 뭉그러트린 거라고 생각했다. ‘빼앗기기 싫어서 숨겨놓는 것.’ 내가 완두의 행동을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두 살 된 조카가 자기 몸에 맡는 앙증맞은 책상이 생긴 뒤로, 장난감 몇 개를 그 책상 서랍에 넣어놓기 시작한 걸 봤을 때 나는 완두의 행동과 엄마의 말이 문득 떠올라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떤 물건이 소중해지는 찰나를 뒤늦게 알아챈 것이고, 또 ‘비밀’이 생기기 시작한 존재들에게 내가 앞으로 지켜줘야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완두를 보고 기특하다고 말한 엄마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일도 비로소 가능해진 것 같았다.
노랗고 작은 오리 인형은 친구 혜민이 얼마 전에 선물로 준 것이다.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와 함께 지내는 친구들에게 하나씩 선물했는데, 이번이 아니더라도 혜민은 늘 동물들의 선물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걸 아는지 동물들은 혜민을 항상 반기고 앞발로 누르길 좋아한다. 언젠가 혜민이 완두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길래 속으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생각했었는데, 곧바로 완두 장난감을 사려고 한다는 걸 직감으로 깨닫고 대답해준 기억이 있다. “형광색에 반응해.” 혜민의 질문 덕분에 나도 그 사실을 더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그런데 왜 노란색 오리를 사다 준 걸까).
노란 오리 인형은 완두에게 준 그날 잃어버려서 찾지 못하게 됐는데, 나중에 보니 내 백팩에 들어가 있었다. 아마 완두는 내 백팩을 듬직한 서랍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완두의 장난감은 아니지만, 완두와 관련된 물건 중에는 서울에 있는 내 방 창가에 항상 올려져 있는 게 있다. 친구인 덕현이 형이 우붓을 여행할 때 사다 준 나무 인형인데, 완두와 꼭 닮아서 내가 아끼게 되었다. 이 나무 인형은 사실 나를 위해 사다 준 건 아니다. 덕현이 형은 완두와 비슷한 나이의 개 ‘댄디’와 살고 있는데, 여행 중에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 이 인형을 발견했다. 형은 댄디랑 닮은 인형을 찾았다고 생각해 좋아하며 그 내용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나는 댄디가 아니라 오히려 완두와 닮았다고 댓글을 달았다. 누가 봐도 내 말이 맞았기 때문에 형은 그 인형을 나에게 준 것이다(진실이 늘 이긴다).
나무 인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나도 덕현이 형처럼 조금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댄디보다 완두와 닮긴 했지만 완두와 꼭 닮았다고 하기엔 잘 맞지 않는 부분을 금세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언제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인지, 이 나무 인형을 마음속으로 완두라고 여기고 나서부터는 겉모양이 별로 상관없게 돼버렸다. 창가 화분들에 물을 부어주며 해가 잘 드는 쪽으로 나무 인형을 옮겨주고, 또 나무 인형의 시야에서 창밖이 더 잘 보일 수 있게 나뭇가지들을 정리해주곤 한다. 완두와 산책할 때의 마음으로.
예전에 처음 자취 생활을 할 때 포천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완두는 태어났다. 완두 엄마인 진주가 동네 떠돌이 개와 일을 벌인 것이다. 노산이었는데도 진주는 무사히 출산에 성공했고 강아지 세 마리가 태어났다. 친구가 키울 거라고 거짓말한 뒤, 그중 한 마리를 내가 살던 서울 집으로 데리고 왔다. 만약 내가 정식 입양을 하는 것이었다면, 보호소에서는 내게 완두를 절대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돈도 많이 없었고, 주 5일 출근하며 혼자 살고 있는 직장인이었으니까. 점심시간마다 집에 가서 완두를 챙겨주던 게 기억난다. 그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무렵, 나는 엄마에게 솔직히 말하고 완두를 다시 태어났던 부모님 집에 맡겼다. 직업을 바꾸는 과정에서 완두를 많이 떠올렸다. 같이 살며 돈도 벌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결국 가구 회사에 취직해 3년을 일했고 얼마 전 퇴사해 혼자서 쓸 작업실을 구했다. 11월부터는 완두와 내가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2년만 기다려.” 내가 완두 귀에 대고 늘 말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났다. 쫓기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리고 완두를 찾아가지 못하는 주말마다 나는 나무 인형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거의 다 됐다고. 나무 인형이 없었어도 우리가 보낸 시간을 상상하며 잘 이겨냈겠지만, 나는 덕현이 형이 이 인형을 사다 줘서 늘 고맙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글·사진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