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 moments not things

뒷모습이라는 표정

자기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詩 나태주, 〈뒷모습〉

나는 왜 그렇게
뒷모습을 찍곤 했을까

낯선 나라, 낯선 골목길에서 나는 때로 종종걸음으로 걷곤 했다. 가만히 따라 걷고 싶어지는 뒷모습을 만날 때 그랬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혹은 어느 집의 대문 너머로 그 모습이 금세 사라지기라도 할까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있었다. 적고 보니 좀 수상하지만 걷는 일, 그게 전부였다. 마음 두는 데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눈앞에 반짝하고 생겨난 이유를 따라 걸었던 거라 해야 할까.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탁 트인 광장이나 전망대, 앉고 싶어지는 카페 같은 것을 만나면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때로 뒷모습들은 그런 식으로, 따라나서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풍경에 나를 데려다주기도 했다. 혼자만 아는 동행의 결과치고는 제법 근사한 우연이었던 셈이다.

대개 나를 이끈 것은 다정한 뒷모습들이었다. 그런 뒷모습을 나는 한 번도 앞지른 적 없다. 그 뒤를 걷는 것이 좋았다. 땀이 배어나는 줄도 모르고서 잡은 손, 서로를 챙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들, 세월의 더께만큼 이해가 쌓인 사이…. 그런 것을 짐작하게 하는 뒷모습들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이를테면 해피엔딩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기분 같은 것. 그래, 세상에 이런 이야기도 있겠지. 믿고 싶어질 때의 그런 기분. 

그것이 아마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어느 여행자의 사진 속에나 누군가의 뒷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다. 뒷모습엔 말이 없는 대신 가만한 표정이 있다.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쩌면 무엇을 보이는 줄도 모르고서 보여주는 그런 표정. 그리하여 그 표정은 자주, 혼자 걷는 여행자에게 친구가 되어준다. 시인의 말처럼 내 눈으로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표정이라는 것은 뒷모습이 지닌 운명 같다. 내 것이지만 평생토록 나만은 결코 볼 수 없는, 진짜 표정. 그 말은 곧, 우리의 진짜 표정을 보아줄 수 있는 것은 타인뿐이라는 말 같다. 이토록 무방비한 표정을 지닌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뒷모습을 불러 세우는,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일

영화 <레인 오버 미>에서 앨런은 길을 가다 우연히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찰리의 뒷모습을 보고 소리쳐 그를 부른다. 그의 소식을 멀리서나마 전해 들은 적 있는 앨런은 그가 염려스럽다. 수년 전,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세 딸을 잃은 후로 찰리는 스스로를 유폐시킨 지 오래다. 이를테면 그는 세상의 기준에서 ‘고장 난’ 사람이다. 사람들을 피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게임에만 몰두하며, 주방의 페인트칠을 끊임없이 바꾸고, 피하고 싶은 상황에 처할 때마다 헤드폰의 볼륨을 높인다.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찰리는 수시로 폭발해 앨런을 곤란하게 만들고,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해 앨런에게 상처 준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며, 나아지리란 희망도 보이지 않는데. 다시 모르고 지내던 때로 돌아가거나 그를 포기해버린 이들의 말대로 시설에서 치료를 받게 하는 일,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앨런은 끝까지 그의 곁에서 스스로 상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이 다만 아름다운 결말에 이르기 위한 손쉬운 길이었다고 해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일까. 아무리 망가진 모습이라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지난 모습을 잊지 않고서, 지금의 너도 너니까, 내버려 두지 않고, 함께 있을 방법을 지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을까. 물어보면 자신이 없었다. 변한 누군가를 포기하기란 그리도 쉽다.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네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탓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너 스스로도 포기해버린 너를, 내가 어떻게 포기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란 얼마나 편한가. 영화는 묻는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해온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처음 앨런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찰리를 보고서 소리쳐 그를 불렀다. 늘 헤드폰을 쓰고 다니는 찰리는 그대로 멀어지지만, 그는 부르길 멈추지 않는다. 찰리가 들을 때까지. 혹은 들을 수 없다고 해도. 첫 번째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에는 그냥 멀어지는 것 같던 찰리가 모퉁이를 돌기 직전 멈춰 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어떤 부름은 그렇다. 아주 멀어질 것 같던 뒷모습을 기어코 불러 세운다. 끝끝내 기다려, 마주 보게 만든다.

내게는 언제까지고 아플
어떤 뒷모습

뒷모습에 대해 말하다 보면 결국 도착하는 곳은 내 맘에 가장 오래 맺혀 있는 뒷모습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러나 동시에 그 이유로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뒷모습. 어쩌면 뒷모습은 우리에게 서로의 외로움에 대해 털어놓을 기회를 주기 위해 그토록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이를테면 나는 복잡한 서울의 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리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볼 때 외로워졌다. 서울에 올라온 아빠가, 전철 개찰구에서 내가 준 교통카드를 손에 쥐고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할지 왼쪽으로 들어가야 할지 망설일 때 외로워졌다. 기다란 전철 좌석에 짐처럼 불편하게 앉아 어서 빨리 내리고 싶은 얼굴을 할 때 외로워졌다. 몇 년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오는 부모에게 궁이라든가, 한강이라든가,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그저 내 욕심이었다. 내가 주고 싶은 것들은 늘 그들을 불편하게 했다. 세월은 우리를 데려가지 않고 혼자만 저만치 앞서가곤 한다. 어린 나를 낯설고 새로운 곳에 데려가 주던, 손을 놓치면 불안해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던 나의 그 커다란 부모는 어디서부터 뒤처진 걸까.

아빠가 창이 하나뿐인 내 자취방에 앉아 ‘이 좁은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며 혼잣말했을 때, 나는 외로워졌다. 창을 열어도 건너편 건물에 막혀 버리는 좁은 방이 아빠를 갑갑하게 했다. 이 도시에서 내가 가진 것 중엔 부모에게 권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그날 밤엔, 좁은 방에서 옛날처럼 다 같이 어깨를 포개고 자도 좋았으련만, 아빠가 끝끝내 막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그것이 아빠의 속상하고 낯선 마음인 것도 알아서 외로워졌다. 

터미널에만 가면 엄마 아빠는 나를 먼저 보내지 못해 성화다. 바쁜 애가 어서 들어가라고, 그저 보내려는 마음 앞에서 나는 그보다 더 고집을 부린다. 버스가 들어오고, 차창에 붙어 앉은 엄마와 아빠가 손을 흔들고, 버스가 출발하고, 멀어지고 멀어져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서 있는다.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한참 멀어진 뒤에 돌아보더라도 여전히 거기 있는 것. 보지 않아도 손 흔드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사랑이라는 듯이. 뒷모습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친다면 그런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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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