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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중인 친구와의 조우를 위해 밀라노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런던에 늦은 밤 도착해서 이른 아침 떠나는 3박 4일, 사실상 이곳을 둘러볼 수 있는 기간은 이틀밖에 되지 않는 밭은 일정이었다. 고백하건대, 사랑하는 친구가 없었더라면 방문하지 않았을 도시가 이곳, 런던이다. 내가 오랜 기간동안 가장 사랑하고 있는 ‘영화’와 ‘축구’에 미쳐있는 나라인데도 이상하게 이 도시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리만큼 명확했다. 포털 사이트에 런던 날씨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듯 일 년 내내 한 달에 10일 이상은 비가 내리는 날씨 탓이다. 어느 도시에 가도 물과 풀 곁에서 산책하길 좋아하는, 항상 푸름을 찾는 내게 잦은 빈도로 비가 내리는 회색 도시가 매력적일 리 없다. 런던에 도착한 첫날 저녁, 다행히 비를 피해 숙소까지 도착하는 듯했으나, 역시나…. 런던은 참지 않지! 이십 킬로가 훌쩍 넘는 캐리어를 끌고 도저히 우산을 쓸 자신이 없었기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충만한 이틀을 보내고, 극장에서 딱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파리 못지않게 매력적인 영화관이 도시 곳곳에 포진해있는 런던, 사실 구글 지도에 저장해둔 극장만 해도 수십 곳이라 어딜 방문해야 하나 고민이 앞섰다. 딱 한 곳을 방문해 오직 한 편의 영화만 관람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포기해야 하는 모든 공간과 작품이 더 애틋해졌다. 상영관뿐 아니라 도서관이나 박물관, 굿즈샵 등 많은 볼거리를 가진 공간이었으면, 평소 내가 관심 가지던 영화들을 엮은 프로그래밍이거나 보고 싶은 상영작이 있었으면, 거기다 오후 4시 전후로 해가 지는 12월의 런던임을 고려해 어두워진 밤에도 숙소로 돌아오는 데 지장이 없는 곳이었으면 싶었다. 머물렀던 3일중 가장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때마침 <사랑은 비를 타고>를 상영하는, 내가 바랐던 모든 조건에 걸맞은 공간과 만났다. 발길이 닿는 대로 우연히 방문한 극장과 예상도 못 한 영화에서 위안을 얻었던 그간의 경우들과는 조금 다른 여정이었다.
프랑스어 교육과 프랑스 문화를 장려하고, 다양한 문화적 교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랑스 문화원(Institut français). 이곳 런던에는 1910년 설립되었는데, 문화원의 핵심인 언어센터를 비롯해 영화관 시네 뤼미에르(Ciné Lumière), 멀티미디어 도서관 메디아테크(La Médiathèque), 어린이 도서관 쿠엔틴 블레이크(Bibliothèque Quentin Blake), 카페 탠저린(Café Tangerine)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완전히 새롭게 단장하고 2009년 프랑스의 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에 의해 재개관한 시네 뤼미에르는 프랑스와 유럽 영화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의 영화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감독과 배우들이 참석하는 무대 인사나 관객과의 대화 또한 자주 준비하며, 런던 최고의 영화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극장 못지않게 돋보이는 공간인 메디아테크는 프랑스 문화예술, 사회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소설, 만화책부터 장편 영화와 잡지에 이르기까지 약 5만 개의 아이템을 무료로 접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 컬처 테크를 통해 영국 전역에서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2만 5천 개 이상의 자료를 읽을 수 있다.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건물로 들어서면,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로비와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했듯 극장의 기능뿐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하는 문화원이다 보니 공간 구분이 확실해, 내부를 둘러보는 재미가 분명했다. <사랑은 비를 타고> 티켓을 발권하고, 내가 가야 하는 상영관이 지하 1층에 있는 아담한 2관임을 확인했다. 매표소와 로비에서 멀지 않은 1층 한 귀퉁이에는 카페 탠저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는데, 당장은 배도 부른 데다 카페보다 흥미를 자극하는 공간인 멀티미디어 도서관을 보기 위해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내에서도 특히 서적이 있는 공간은 인테리어부터 인상적이었다. 차분한 톤의 소파와 목재 풍 바닥 간의 조화는 단정한 느낌을 줬으며,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발코니가 있는 복층 구조라 곳곳에 시선이 갔다. 게다가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는데, 해가 좋은 낮 시간대라면 자연광을 받으며 책 속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모두가 꿈꾸는 낭만적이고 따뜻한 서재의 느낌이 가득했다. 이 공간은 회의나 어쿠스틱 콘서트 등을 위해 대관도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이곳 외에도 225석 규모의 뤼미에르 극장 1관과 34석 규모의 2관, 인상적이던 로비 공간 등도 시사, 회의, 파티 등 다양한 목적으로 대관이 가능하다.
생각보다 금방 찾아온 영화 시작 시각에 맞춰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1952년 미국에서 제작된 <사랑은 비를 타고>는 뮤지컬 영화의 모범 답안과 같은 작품으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명작으로 기억된다. 영화의 배경인 1920년대 후반은 할리우드의 무성영화의 인기가 절정에 다다름과 동시에 유성영화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을 무렵이다. 영화 속 돈은 스턴트맨을 거쳐 스타가 된 무성영화 시절을 대표하는 배우다.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배우 지망생이자 각종 무대의 코러스를 담당하며 파티장을 전전하던 캐시와 만나게 된다. 시대가 변하면서 당시 돈과 함께 영화의 주역이었던 리나의 약점인 쇳소리가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리나를 대신해 노래하고 연기한 캐시는 돈의 성공에 크게 이바지한다. 무성영화의 상징과 같은 배우와 유성영화 시대에 접어들어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결국 과도기에 접어든 당대 할리우드의 상황으로 자연스레 치환된다.
영화를 전부 보지 않았더라도, 어떤 작품인지 아리송하더라도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서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우산을 소품 삼아 탭댄스를 추는 신사(돈을 연기한 진 켈리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캐시에게 푹 빠진 돈의 심리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장면인데, 이는 숱한 패러디와 리메이크를 낳았고, 많은 작품의 레퍼런스가 되었다. 그럼에도 원작의 감흥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단언한다. 전주만 떠올려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스크린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볼 이유는 충분하다. 비 내리는 런던에서 마침 내게 온 단 한 편의 영화가 <사랑은 비를 타고>라니, 이보다 적절할 수 없다는 생각에 행복 지수가 절로 올라간다.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력과 아름다운 롱테이크의 향연에 정신을 못 차릴 때쯤 등장하는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들,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움의 최대치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사랑은 비를 타고, 영화는 삶을 따라 흐른다. 우리가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 고전의 가치를 믿는 이유, 한 편의 영화로 생의 낭만을 기억할 수 있는 이유…. 이 모든 걸 담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대서사시를 아로새긴 채 비 내리는 런던의 밤거리를 신나게 활보했다.
Ciné Lumière, Institut français
A.17 Queensberry Pl, South Kensington, London SW7 2DT, United Kingdom
H. www.institut-francais.org.uk/cine-lumiere
T. +44 20 7871 3515
씨네21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8년 5월, 칸국제영화제의 <미치광이 피에로> 포스터에 매료되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난 것이 유럽 극장 여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극장에 찾아가 머무르는 동안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적어보려 합니다.
글·사진 이나경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