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찾아 삼만 리


Childhood Playground

“엄마 오백 원만!” 두툼한 동전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학교에 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신이 났다. 쫀디기, 아폴로, 밭두렁, 양념쥐포, 만득이 시리즈, 다마고치, 끈끈이, 미끌이, 종이인형…. 온갖 괴상하고 신비로운 것이 가득하던 학교 앞 문방구는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던 보물섬이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소비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백 원 대신 만 원 지폐 두 장을 챙겨 그 시절 보물섬을 찾아 떠났다. 하나둘 흔적을 감춰 서울부터 경기, 인천까지 들쑤셔야 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문구로 가득한 보물 창고

가만히 문구

서울 | 동교초등학교 맞은편

하교하는 아이들이 앞다투어 달리다 말고 입구도 잘 보이지 않는 문방구 앞에 멈춰 선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물건들을 흥미롭게 만져보며 “이건 얼마예요?” 묻는 모습이 어디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 여자아이 둘이 나란히 무언가 사길래 살짝 훔쳐보니 팔찌다. 가격은 400원. 계산을 마친 아이들은 금박으로 뒤덮인 화려하고 조악한 그것으로 손목을 겨냥하더니 ‘탁!’ 내리친다. 손목 둘레 그대로 휘감기는 모습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다.

30년 이상 같은 자리를 지켜온 이 문방구엔 간판이 없다. 문구점 이름을 물으니 있긴 있지만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면서 웃는 주인 할머니. 할머니가 움직이지 않는 탁상시계를 고쳐달라고 찾아온 할아버지를 상대하는 동안, 구석구석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종이로 된 작은 간판을 보게 됐다. 할머니가 굳이 알리지 않은 문방구의 이름은 (아, 사랑스럽게도) ‘가만히’, 가만히 문구였다. 할머니는 높고 복잡한 선반에서 건전지를 꺼내 할아버지 시계에 끼워 금세 뚝딱 고쳐낸다. 시간도 맞춰달라는 할아버지께 “제가 그런 것까지 해야 해요?”라며 빙긋 웃는 할머니의 얼굴은 문방구만큼이나 푸근하고 정답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할머니가 오랜 시간 뒤에도 이 보물섬에 머물고 계셨으면.

이 구역의 터줏대감

영화문구완구

인천 | 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맞은편

알음알음 찾아간 오래된 문방구들은 없어졌거나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다섯 곳이나 허탕 친 채 망연자실했을 때 문득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이 떠올랐다. 울며 겨자 먹기로 혜화역에서부터 도원역까지,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인천 동구 창영동까지 자리를 옮겨 정보도 없이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맸다. 잔뜩 지쳐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 체념하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나타난 문방구가 바로 영화문구완구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 할아버지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인지 어서 오세요,인지 잘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응하며, 먼지 앉은 지우개 몇 개와 불량식품을 집어 들고는 물었다. “이 문방구는 얼마나 되었어요?” 할아버지는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되묻더니 준비라도 한 듯 “1970년 3월 20일에 문 열었어.” 하고 덧붙인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하다. 50년이라는 세월을 헤아리며 구석구석을 살피는 동안 초등학생, 중학생,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이 등 너무 많은 손님 오가던 이곳. 창영동에서 제일 오래된 문방구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어쩐지 믿음직스럽다. 또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와선 대뜸 편지 봉투를 찾는다. “여어~ 편지 봉투 좀 줘.” “우편번호 있는 거, 없는 거?” 아, 이 엄청난 베테랑 냄새! 킁킁.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여기가 거기

대호문구사

인천 | 배다리 헌책방 거리 어딘가

인천 동구에는 오래된 책들이 숨 쉬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있다. 작고 깊은 헌책방 사이를 거닐다 뜻밖에도 큼직하고 넓은 문구사를 하나 만났다. 보통 서너 시면 문을 닫고 길어봐야 여섯 시엔 영업을 끝내는 학교 앞 문방구와는 달리, 대호문구사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중에도 물품 포장으로 분주했다. 박스를 나르는 직원의 날랜 손놀림을 구경하는데, 말동무가 필요한 동네 아저씨가 들어와선 뉴스를 보며 몇 마디 덧붙인다. “저거 저거, 범인 잡혔대?” 동네 아저씨와 주인아저씨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꽃 철사를 찾는 젊은 여성 손님과 클립을 찾는 아주머니도 번갈아 다녀갔다. 도매 위주로 운영하고 있지만 필요한 손님에겐 소량의 문구도 판매하는 대호문구사는 동네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넉넉하고 인심 좋은 문방구다.

널찍한 문구사 안에는 조악한 장난감부터 학교 준비물, 전문 화구용품까지 다양한 물건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넋 놓고 구경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직원에게 생긴 지 얼마나 되었느냐 묻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한다. 이토록 정겨운 분위기에 체계적인 시스템이라니! 여기가 혹시… 문방구계의 큰손? 가만 보니 없는 거 빼고는 전부 다 있는 것 같다. 

별처럼 반짝이는 찬란한 공간

스타맥스

인천 | 동구 금곡동

타박타박 걷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커다란 곰 인형을 만났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황급히 눈길을 거두는데 빨간 간판이 시야에 담긴다. 이름하여 ‘스타맥스’. 뭐 하는 곳인진 몰라도 이름도 간판도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어? 문방구? 우연 아니면 필연이라는 마음으로 문을 여니 끼익 소리와 함께 온갖 문구 제품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길다. 주인아주머니가 앉아 있는 계산대와 입구 사이의 거리가 꽤 먼 구조다. “어서 오세요.” 인사가 간신히 들릴락 말락 한 거리. 색지부터 스티커, 실내화, 공, 비눗방울, 장난감까지 다양한 문구완구가 돌탑처럼 쌓여 있는 이곳을 탐험가의 기분으로 바지런히 기웃거렸다. 어린 시절 사촌오빠가 곧잘 갖고 놀던 장난감 총도 만져보고, ‘두더지 팡팡’이라 적힌 박스는 무엇인가 궁금한 듯 살펴보고, 촘촘히 쌓여 있는 색지들도 종류별로 훑어보며 무궁무진한 문구의 세계를 탐방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맴돌다 보니 양손에 온갖 자질구레한 문구가 한가득이다. 한 푼 두 푼, 덮어놓고 쓰다 보니 주머니는 어느새 텅텅 비었다.

삼만 리를 돌고 돌아

발굴한 보물들

곤충채집통 | 1천 8백 원

뽀얀 먼지를 입은 수많은 문구류 사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형광 노랑 곤충채집통. 어린 시절, 채집통도 잠자리채도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곤충을 잡은 기억은 없어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물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곤충채집이라는 거 꽤 끔찍한 방학 숙제 아닌가 싶고. 흐흥.

실내화 | 3천 원

어릴 때 친구들은 실내화 코에 매직으로 귀여운 그림을 그리거나 이름을 써서 나만의 실내화를 꾸미곤 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발가락에 구멍이 나면 단번에 티가 나는 불상사가….

유리구슬 | 2백 원

놀이터 모래밭에서 두더지 집을 만들 때면 꼭 한두 개씩 나오던 유리구슬. 어떻게 가지고 노는 건진 몰라도 이왕이면 많이 모으고 싶어서 열심히 줍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주워온 상처 난 구슬들이 문방구에서 산 깨끗한 녀석보다 훨씬 영롱해 보이는 건 무슨 심리지? 에잇, 모래 바닥에 사정없이 굴려버렸다.

학종이 | 1천 원

언니오빠들은 학 천 마리를 접어 소원을 빌거나 사랑을 이루는 데 썼다는데, 나는 학종이로 거북이를 그렇게나 접었다. 다 합치면 천 마리는 훌쩍 넘을 텐데…. 거북이는 소원 안 이루어주나?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포토그래퍼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