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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삶
나의 삶은 머무는 것보단 떠나는 것에 가깝다. 높은 빌딩숲보다는 넘실거리는 풀과 나무에 더 익숙하다. 나의 아이들은 길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 어깨를 나란히 한 자연에게 인사하며 자랐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충분한 행복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고, 아이들은 자연스레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고 그 감정을 충실히 느끼며 자라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자칭 분갈이 전문가이자 초록을 읽어주는 도슨트, 그리고 세상에서 집을 가장 많이 가진 여자인 나와 그 아이들의 일상이다.
우리는 지금 경주에 머물고 있다. 벌써 내려온 지 100일 정도 지난 듯하다. 강원도 춘천에서 2월 말에 내려올 땐 잘 걷지도 못하던 둘째가 어느덧 넘어지지 않고 뒤뚱뒤뚱 잘 걷고 있으며 단어도 몇 개 말할 줄 알게 되었다. “엄마” 다음으로 잘 뱉는 단어는 “꼬옷”인데 흔들리는 풀도 꽃, 예쁘게 핀 송엽국도, 연둣빛 나뭇잎도 아기에겐 모두 ‘꽃’으로 보이나 보다. 나은이는 그 뒤에서 “엄마 이 노래 알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랜데!” 하며 동생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군인 아버지를 둔 나은이는 일곱 살 인생에 총 여섯 번의 이사를 경험했다. 화천에서 세 번, 춘천에서 두 번 그리고 지금의 경주 집, 올가을이 오면 충청도 남쪽 어딘가로 다시 이사를 갈 예정이다. 태어나기도 전, 화천 산양리 산 중턱 작은 관사에서 조금 더 산꼭대기에 위치한 넓은 평수의 관사로 이사한 것이 엄마 배 속에 있던 나은이의 첫 이사였다. 당시 만삭의 몸이었던 나는 거주 중이던 작은 평수의 관사가 리모델링에 들어가야 한다며 이사를 통보받았다.
아이를 갖기 직전까지 나는 서울 이태원에서 출판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일을 정리하고 쉬어 가려던 차에 아이가 생겼고, 그렇게 남편의 곁으로 오게 됐다. 화천이 38선보다 훨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놀라웠지만, 화천 읍내에서 다시 30분을 더 들어가야만 산양리라는 마을이 나온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참 멀리도 계시구나. 산양리는 비무장 지대가 화천 읍내보다도 훨씬 가까웠고, 북한이 춘천보다 가까이 있는 곳이었다. 2015년 여름에 북한과의 긴박한 충돌이 벌어졌을 때는 당장 피난을 떠나라는 방송이 나오기도 했었다.
도시 인구밀도 세계 1위인 서울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도 사람 한 명 마주하기 힘든 고요한 강원도 시골 마을에 떨어진 나는, 한동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내가 거쳐 온 촘촘한 집들과 얼굴 없는, 화가 많던 이웃들을 떠올렸다. 도심의 소음과 인공적인 밤의 불빛에서 해방된 나는 점점 신이 났다. 내가 발 딛는 이 땅의 면적, 내가 마시는 숨의 면적이 너무 호사스럽게 느껴져서 매일이 꿈같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출산 후에 나는 더 씩씩하게 아기띠를 하고 화천 라이프를 즐겼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매일 산에 올랐다. 당시 면허도 없던 나는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산에서 정류장까지 아기띠를 한 채로 덜렁덜렁 최소 30분을 걸어야 했다. 때론 집으로 가는 여정이 너무 힘에 부쳐서 시골길을 다 누비고 다니다가, 해가 질 즈음 남은 힘으로 기어올라 회귀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아기와 뻗어 자는 나날들은 행복하고 건강했다.
새댁이었던 나와 아기를 주목하는 시골 사람은 없었으며,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하든 크게 상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아기가 예뻐서 용돈을 쥐여주는 어르신들과 또래의 순하고 씩씩한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이 몇몇 있었다. 나의 얼굴과 마음에 살이 붙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것을 오래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와 사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내 삶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더불어 작은 아기의 성장을 신비롭게 관찰하며 엄마이자 여성으로서 함께 성장하는 시절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였을까. 친구도 가족도 쉽게 찾아오기 힘든 마을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꾸밈이 아닌 오직 아이와 나를 위해 공간을 사랑스럽게 꾸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나는 아이의 사계절을, 이 좋은 기회를 마치 깔아놓은 멍석처럼 누리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기록하고 즐기기 시작했다. 사계절이 선사하는 자연물을 주워 와 아이와 만져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모빌을 만들어 집에 걸어 두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친정 엄마나 지인들은 조금 염려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네 것도 아닌데, 나중에 너희 집 생기면 그때 예쁘게 하고 살아.” “그럼 내 것은 언제 생기는 걸까요? 그리고 혹여 내 것이, 물질적인 소유가 이루어진 뒤 정착하게 되는 그때가 오지 않으면요?”
낡은 관사는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내가 그 공간을 어떤 색으로 칠하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너무 낡고 관리인도 무심해서 편안했지만 오롯이 나의 공간은 아니기에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나의 형편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소박하게 채워나가는 삶. 이윽고 첫아이, 나은이가 돌이 지나고 화천 읍내로 이사 왔을 때 나는 읍내의 유일한 고층 아파트에서 월세살이를 시작했다. 가장 꼭대기인 15층이었다. 시골 전망을 바라보며 아파트 변두리의 소 축사, 사슴 농장, 사과 밭, 그리고 논두렁길을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로 열심히 달렸다. 언제 또 새로운 근무지로 발령이 날지 모르는 군인 가족이지만 나는 내 삶이 한 번씩 이사를 통해 환기되고 정리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집을 많이 가진 여자네요. 나만큼 집을 많이 가져본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요?
이사를 갈 때마다 마치 캠핑을 온 듯 지닌 살림을 펼쳤다. 내가 꼭 갖고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떠나보내고 짐을 가벼이 했다. 이사한 집의 사진을 공유할 때면 사람들은 이사한 것이 맞느냐며, 이전과 똑같이 편안해 보인다며 새 출발을 응원해 주었다. 이사 달인이 된 엄마에게 나은이는 물음을 던진다. “엄마 다음번에는 우리 어디로 떠날 거야?” “응? 우리 방금 이사 왔는데?” 벌써 삶을 여정으로 받아들이는 아이에게 나는 꼭 말해주고 싶다.
생각보다 인생이란 이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 훌쩍 떠난다는 건 어렵지 않은 것, 오래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불안해할 필요 없다는 것, 완벽하게 준비된 행복은 없다는 것, 순간순간 행복을 그냥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냥 네가 앉은 그 자리가 집이 되고 삶의 무대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슬슬 갖고 싶은 것이 많아지기 시작한 나은이는 드디어 내게 요구가 잦아지고 있다. 그럴 때면 자신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하고 나서 100원씩 받아 간다. 그럼 하루에 금방 몇천 원을 모아 저금통에 넣어둔다. 그 작은 돈으로 집을 사거나 비싼 장난감은 살 수 없어도 “엄마 나 플리마켓 가면 그동안 모은 걸로 책도 사고 인형도 살래요. 도현이 장난감도 하나 사고 엄마가 좋아하는 귀여운 스티커도 사 줄게요.”라고 말하는 아이. 자신의 삶에서 앞으로 이뤄나갈 바람이나 희망이 더 많아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한 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자라기를 응원하고 싶다.
오늘따라 우리 딸내미의 노래가 마음에 깊게 남는다.
에디터 이명주
글·사진 전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