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e, Not Perfect

아파트멘터리 윤소연 대표

뭐든 잘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갖고 산 적이 있다. 잘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날카롭고 긴장된 상태는 나를 흔들고 갉아먹는다. ‘아파트멘터리’를 이끄는 윤소연 대표는 일과 가정이라는 두 세계를 똑같이 5년째 달리고 있다. 꾸준히 이어 나가지만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달리지는 않는다. 한계를 인정하고 지켜야할 것에 마음을 쓴다. 가족은 오래도록 이 길을 걸어갈 테다. 한 사람이 넘어지려하면 붙잡고, 서로의 걸음에 맞추면서.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완벽할 수 있을까.

따로 또 같이

반가워요. 최근 리모델링을 하고 이사한 집이죠?

맞아요. 결혼하고 네 번째 집이에요. 지은 지 20년 된 아파트고 구조가 좁은 집이라서 리모델링을 했어요. 오랜만에 제 공간을 다듬을 기회이다 보니 고민이 많았어요. 아이가 있는 집이니 아이가 좋아하는 공간으로 꾸며야 할까, 내가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까 생각해 봤어요. 거실에 아이 책장을 놓거나 전면에 매트를 깔고 아이들 공부하는 책상을 놓기도 하잖아요. 그렇다면 아이가 우선순위인 집이 되겠지만 저는 편하지 않을 거 같더라고요. 고민 끝에 모두가 쓰는 거실과 주방은 제 취향으로 하고 아이 방은 아이가 좋아 하는 구조를 넣기로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월넛의 색감으로 신발장과 주방, 안방 붙박이장 등은 통일되게 맞췄고요. 

 

공간을 새로 꾸미거나 가구를 들일 때 남편과 자주 의논하는 편인가요?

아니요. 100% 제 의견으로 꾸며요. 남편이 상의하는 걸 바라지 않아요. 본인은 어떤 공간이든 큰 상관없다며 취향이 없는 사람이래요(웃음). 제가 봤을 때 남편은 극 실용주의예요. 심미를 위해 돈 쓰는 걸 이해 못 해요. 저는 서재에 좋은 가구를 놓고 꾸미고 싶었어요. 남편은 기성품으로 다음 날 받을 수 있는 책상도 오래 쓸 수 있다며, 왜 굳이 돈을 들이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남편 마음대로 하게 뒀어요. 서재는 남편이 주로 써요.

 

각자의 취향을 담은 거네요. 모두 만족하는 집이 된 건가요?

각자 스스로 만족해야 셋이 모였을 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도 이제야 첫 방이 생겼어요. 친정 엄마가 아이를 돌봐주셔서 늘 할머니와 방을 같이 쓰다가 자기 공간이 생겨 너무 좋아해요. 우리 집은 세 식구 모두 자신만의 공간이 있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집이에요.

 

아이 방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꾸민 건가요?

아이가 어릴 때는 장난감도 인테리어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정말 예쁜 장난감을 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바깥세상이 유럽이 아닌데 집 안에 디자인 장난감만 가져다 놓는 건 의미가 없잖아요.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로 사주되 선택지를 넓혀 줘요. 최근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장난감은 플레이모빌이에요. 아이가 역할놀이를 좋아하는데,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다워서 함께 역할극을 하면 저도 힐링이 되어요. 역할극이 되면서 디자인이 아름다운 물건으로 접점을 찾는 편이에요.

집 안에서 소연 씨가 가장 행복한 공간은 어디예요?

거실에 보이는 임스 라운지 체어Eames Lounge Chair예요. 제가 이 집에 올 때, 사고 싶은 게 딱 하나 있다면 저 의자였어요. 서재는 남편이 쓰고, 아이는 아이 방에서 노는데 집 안에 내 방이 없는 거예요. 저만의 휴식처로 저 의자를 마련했어요. 앉으면 너무 행복해요. 아이도 남편도 여기가 제 공간이라는 걸 알아요. 책을 읽고 싶으면 “엄마, 우리 둘이 앉는 의자에서 같이 책 읽자.”라고 해요.

 

집 안에 짐이 없는 편이에요. 공간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져요.

신혼 때 산 것들을 바꿀 시기가 되었고, 공간이 주는 느낌도 달라서 기존 가구는 대부분 누군가를 주거나 버렸어요. 마음에 드는 게 나타나지 않는 항목은 굳이 구색 갖추려 사지 않고 좀 여백 있고 허전하게 뒀어요. 제 삶에도 여유가 필요했거든요. 아이 낳고 창업을 시작한 4년 동안 아무런 여백 없이 살았어요. 회사도 키워야 하고, 아이도 길러야 하고, 결혼도 5년 차가 되니까 권태기가 오더라고요. 

삶에 공백이 하나도 없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을 못 하고 살았어요. 신혼집을 셀프로 리모델링 할 땐 그게 취미생활이었어요. 집 꾸미는 게 재미있고 즐거웠는데 이게 일이 되니까 집에서 더 안 하게 되더라고요. 정작 제 공간을 위해 고민해본 적이 없었어요. 제가 2년 뒤면 40대예요. 지금까지 너무 달려왔다면 조금 천천히 돌아보면서 잊고 살던 공간이 주는 즐거움을 찾고 싶어요. 거의 기본 가구와 물건들만 두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좋아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서 이 집을 완성하고 싶어요.

 

집에 두고 싶어서 고민하는 물건들이 생겼나요?

거실에 그림을 걸고 싶어서 고민하고 있어요. 제 취향에 맞고 마음에 안정과 기쁨을 주는 오브제를 찾아야겠죠. 처음 볼 때 예쁜 것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예쁜 것을 사려고 해요. 한눈에 너무 예쁜 게 계속 아름답기는 힘들더라고요. 최근에는 연후가 결혼할 때 물려주고 싶은 걸 사야겠다는 기준이 생겼어요. 늘 좋은 것만 살 순 없으니까 물려줄 게 아니면 아예 싸고 기능이 좋은 걸 사고 오래 쓸 수 있는 건 좀 투자해서 사려고 해요. 애매한 걸 들이지 않아야죠. 유혹을 참아가면서요.

아파트인데 안방 창의 각도와 흐릿하게 나무가 보이는 구조가 신선해요.

신경 쓴 부분 중 하나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외국 에어비앤비에 온 거 같은 청량함을 느끼고 싶었어요. 오래된 아파트는 안방 새시가 있어서 구조가 새롭게 나올 수가 없어요. 이 방에서만큼은 여행 온 거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일부러 벽을 치고 각도를 만들었어요. 아파트멘터리에서도 처음 해본 작업이에요. 자칫하면 좁아 보일 수 있거든요. 

아, 벽도 새롭게 시도한 거예요. 페인트를 칠하고 싶었는데 43평 전체에 칠하면 시공 원가만 천만 원이 넘어요. 너무 비싸죠. 이 금액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일까 고민하던 차에 직원들이 도배를 페인트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 있대요. 실험적이라 고객에게 제안하지는 못했다고 하길래, ‘그럼 우리 집에 해보자.’ 해서 시도를 했어요. 천장을 보면 몰딩 없이 도배로만 마감을 했어요. 페인트만큼 좋지는 않지만 그 값의 1/4로 가능해요. 아파트멘터리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제일 좋은 시공법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요소를 저희 집에 실험해 본 거죠.

 

아파트멘터리를 시작하고 4년 동안 고객들이 집을 대하는태도도 많이 바뀌었죠?

맞아요. 제가 집을 고칠 때만 해도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인이 집을 대대적으로 고치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어요. 집에 사람을 초대해서 함께 뭔가를 하는 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이라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 저희 집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셨는데, 4년이 지난 지금 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정말 많이 바뀐 걸 느껴요. 디자인 체어를 사고, 조명으로 공간을 살리는 게 보편적이죠. 정말 큰 변화 같아요.

 

지금의 공간에서 더 멋진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인테리어 팁이 있다면요?

주방과 욕실에 신경을 쓰고 다듬기를 추천해요. 저는 이 두공간이 아니면 무리해서 돈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벽면에 마블을 시공한다던지 디테일에 많이 신경 쓰기보다 도배, 바닥은 심플하게 하고, 주방과 욕실에 힘을 줬을 때 고객들의 만족도가 컸어요. 남자분들은 화장실에서 안정감을 얻는대요. 제 남편도 화장실에서 휴대폰 하는 시간을 좋아해요. 여자분들은 주방이 아름다워야 만족도가 커져요. 저도 이 집을 공사할 때 요리도 잘 안 하는데 주방이 예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꾸며 놓으니까 요리를 해 먹지 않아도 오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여기서 요리를 하거나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도 마구마구 생기고요. 주방을 바꾸는 방법은 많아요. 요즘은 필름도 잘 나와서 간편하게 싱크대를 바꿀 수 있으니까, 더 좋죠.

 

처음 공간을 고쳐본 게 신혼집이죠? 이름이 상암살롱이었나요?

맞아요. 결혼 전까지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어요. 열 번 정도 옮겼을 거예요. 마음도 불안정하고 유목민처럼 살았어요. 결혼하고 9평짜리 오피스텔에 살다가 저희 부부가 있는 재산을 다 모아 전세를 끼고 집을 샀어요. 이사를 해야 하는데 꽃무늬 벽지와 답답한 구조로 제 취향이 아닌 거예요. 그때 저희에게 딱 3천만 원이 주어졌어요. 가구와 리모델링 비용 모두 해서요. 잡지에 나오는 곳에 상담받았더니 견적이 1억이 나왔어요. 동네 인테리어 사무실에서는 못 한다고 하는 게 많았고요. 3천만 원도 큰돈인데 직접 해보자, 싶었어요. 

당시 저와 남편이 예능 PD였어요. 제 단순한 생각으로는 스태프를 꾸려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 듯이 잘하시는 반장님들 모아서 협업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죠. 9년 차직장인에 일에 흥미도 떨어졌을 때라 제 에너지를 쏟고 즐거움을 발견하고 싶었어요. 그땐 집 전체를 셀프로 뜯어고치는 사람은 드물어서 내가 해봐야지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그렇게 집을 고치고 물건을 사다 보니 정보가 너무 많이 쌓이는 거예요. 나 같이 이런 정보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회사에서 보고서 쓰듯이 블로그에 글을 썼고, 인기가 많아져서 《인테리어 원 북》을 내게 되었어요.

책을 낸 지 얼마 안 되어 퇴사를 하고 창업도 했어요. 리모델링을 할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요. 어떤 과정이었어요?

퇴사 생각은 없었어요. 우연히 제 책을 소프트뱅크에서 보시고 제안을 주셨어요. 제2의 한샘을 만들어 볼 생각이 있으면 투자할 의향이 있으니 기획안을 만들어 올 수 있겠냐고요. 제가 경영학에 대해 잘 몰라서 열심히 공부해서 보고서를 쓰고 피칭을 했어요. 투자를 받게 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폭주 기관차에 올랐네요(웃음). 스타트업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남편의 동의도 필요했을 텐데요.

사실 남편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했을 거 같아요. 당시 다니던 회사도 평생 직장이고 PD라는 직업이 주는 기회비용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남편에게 고민을 말했더니 “그거 해서 한 달에 100만 원은 벌 수 있어?”라고 묻더라고요. 신혼집 대출금도 남아있었거든요. 과외를 해서라도 월에 100만 원은 벌겠다고 약속하고 창업을 시작했어요(웃음).

 

상암살롱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거네요.

인생을 새로 살게 해준 집이에요. 책도 썼고 사업도 시작했고 아이도 생겼죠. 첫 집이 생기고 공사가 다 끝나 가구가 들어오고 나서의 일주일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예요. 지금은 더 행복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데도 그때만큼 행복했던 감정을 죽기 전에 못 찾을 거 같아요. 제가 가진 열정을 다 쏟아부었어요. 결혼 전에는 늘 불안하게 거주지를 옮기며 살았는데,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모님 도움 안 받고 집을 마련했다는 성취감과 안정감, 복합적인 만족감이 컸어요. 집을 그렇게 바꾸고 나니까 못하는 요리도 해보고, 꽃도 사서 꽃꽂이도 했어요. 청소도 하고 집을 쓸고 닦았죠. 집을 가꾸려는 마음을 처음 가져봤어요.

 

열심히 가꿨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것도 있나요?

저는 디자이너 출신이 아니어서 디자인 DNA가 있으신 분들의 센스는 따라잡을 수 없겠더라고요. 북유럽에 여행을 다녀온 뒤로 잡지를 많이 보고, 아름다운 집을 찾아봤어요. 제가 정말 좋아해서라기보다,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 채 ‘이게 예쁘네. 예쁜 집에는 이게 꼭 있더라.’ 하면서 유행하는 것들로 따라 한 거죠. 그걸 모았더니 북유럽 스타일이 된 거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상암살롱을 좋아한 거 같아요. 디자이너들 눈에는 조금 촌스러울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나도 할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느꼈을 거예요. 예쁘다 싶은 것, 유행하는 것들을 조합해 놓았으니까요. 그 점이 아쉬워요. 

이번 집을 인테리어하면서 직원들에게 북유럽 콘셉트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선택하는 가구와 색감이 결국 북유럽에서 출발한 디자인이더라고요. 우리가 예전에 북유럽풍이라고 하던 것과는 다르게 좀더 진하고 모던하지만, 이게 실제 북유럽 디자인이죠. 이걸 계기로 제 취향을 발견했어요. 첫 집은 북유럽 무드를 흉내 내려고 했다면 이 집은 제가 좋아하는 것을 모아 놓고 나니 실제 북유럽에 있을 법한 무드가 된 거죠.

자기 공간에 애착이 큰 편 같아요. 공간이라는 개념이 처음생긴 때가 언제예요?

어린 시절 할어버지 댁에서 살았어요. 제가 다섯 살 전까지는 할아버지가 부유한 편이어서 2층짜리 큰 저택에 연못도 있었어요. 거길 기어 다니던 기억이 나요. 제가 처음 인지한 공간인 거죠. 그 이후에 부모님과 동생과 15평짜리 아파트에 살았어요. 늘 동생이랑 같이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유년 시절의 공간은 동생과 함께하는 곳. 그래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러다 중1 때 부모님이 분양을 받아서 33평에 이사를 갔어요. 드디어 제 방이 생긴 거죠.

 

너무 행복했겠네요. 첫 방을 어떻게 가꿨어요?

정말 좋았어요. 당시 영화 포스터를 방에 붙이는 게 유행이어서 〈그린 파파야 향기〉, 〈프렌치 키스〉 같은 포스터를 표구해서 방에 걸어 뒀어요. 대신동 시장에 가서 네온사인 전화기를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기도 하고, 내 방의 가구는 어떤 걸 샀으면 좋겠다고 제 의견을 말하기도 했죠. 대학 가기 전까지 6년을 거기서 보냈어요. 감수성이 풍부한 학생이었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혼자 방 안에서 음악 듣고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그때 1년에 책을 거의 200권은 읽었어요. 소설책을 쌓아 놓고 하나씩 독파하며 사춘기 시절 성취감을 느꼈어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방에서 신문방송학과를 꿈꿨고요.

 

꿈을 이룬 방이네요. 독립 후에는 이사를 많이 다녔다고 했어요.

줄곧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에 처음 와서 대학 생활을 했어요. 대구에서는 일반적인 아파트에 살아서 누가 잘살고 못사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보통 집이 다 이렇게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다른 세계더라고요. 부유한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처음에 놀란 게 저는 기초 화장품을 존슨즈베이비를 썼는데 친구들은 집에 가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서 화장품 세트를 사더라고요. 문화충격이었어요. 

저도 서울로 대학 가면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오피스텔 같은 데 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에게 주어진 건 열 명이 한 층을 쓰는 하숙집이었어요. 방이라는 게 내 현실을 보여주는 거고, 경제적으로 치환된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그러면서 집에 대한 집착이 생겼어요. ‘나도 돈 벌면 좋은 집에서 살겠어.’라는 마음을 늘 품고 살아서 상암동 집도 무리해서 산 거죠. 남편은 전세로 살아도 된다고 했는데, 저는 아니라고 내 집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가만 보면 우리는 삶의 주기마다 공간을 옮겨 살아왔어요. 집이 생활을 닮기도 하고, 삶이 공간을 닮아가기도 해요. 어쨌든 둘 다에게 가장 큰 변화는 아이의 출생이 아닐까 싶어요.

회사를 다니다가 창업을 하면서 삶이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서 일의 변화가 더 크게 와닿아요. 법인 등록한 다음 날 임신 소식을 알았거든요. 일의 변화와 임신· 출산의 시기가 딱 맞물려서 복합적으로 삶이 변했어요.

어떻게 변하던가요?

그 전에는 시간이 너무 많다 보니 집도 고치고 책도 썼어요.그게 사실 저를 위한 시간이었던 거죠. 창업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까 동시에 아이 둘이 생긴 거 같아요. 아파트멘터리라는 아이 하나, 연후라는 아이 하나. 조력자들이 분명 있지만 제가 없으면 안 크는 두 아이인 거죠. 이 둘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게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해요. 4년 동안은 저한테 시간을 쏟을 정신이 없었어요. 제가 뭘 먹는지 뭘 입는지 뭘 읽는지 다 미뤄 놓고 저라는 사람을 없애고 살아왔어요. 

작년에 워크숍을 가서 1년간의 매출과 지표를 그래프로 그려봤어요. 매달 신경 쓰지만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 멘탈의 그래프와 똑같은 거예요.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멘탈이 회사의 성과구나, 내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모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잘하니까 내가 좀 소홀해도 회사가 잘되겠지, 하는 건 아직은 자만이라는 걸 알았어요.

 

소홀히 할 수 없는 두 아이인 거네요. 연후에게 어떤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저는 딱 51점짜리 엄마가 되는 게 목표예요. 일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100점이 되길 바라진 않아요. 아이를 키우는데 필요한 물리적 행위들 있잖아요. 음식을 먹이고, 씻기고, 옷 입히고 챙기는 건 친정 엄마가 도와주세요. 모든 걸 열심히 하고 49점까지 채우려고 노력하고,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싶지 않아요. 유기농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하거나 예쁜 옷을 입혀주고, 학습적으로 옆에서 뭔가를 해주는 건 필수는 아닌 거 같아요. 제가 노력한다고 더 잘할 수 없기도 하고요. 다만 감정적인 지지는 늘 해주고 있어요.

 

그럼, 51점은 감정적인 뒷받침인 거네요?

맞아요. 사랑은 당연한 전제조건이지만 아이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려고 노력해요. 내 부속품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아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인정해 주고 긍정하는 것. 아이에게 제가 꼭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이에요.

 

아이의 감정을 인정해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요?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닌데, 저희 부부는 아이가 아주 아기때부터 “우리 연후 뭐 했떠요?” 이렇게 묻지 않았어요. 좀 크면서 의견을 물어볼 때도 “너 뭐 먹고 싶어? 안 먹고 싶어?그래 그럼 배고플 때 얘기해.” 이렇게 어른한테 하듯이, 친구한테 말하는 것처럼 해요. 아이가 밥을 잘 먹는 편은 아니지만, 따라다니면서 먹인 적이 없어요. 선택도 스스로 하는 거니까요. 요즘도 주중에는 일이 많아서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하진 못하는데요, 대신 주말엔 정말 재미있게 놀아요. 주로 역할놀이를 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해요. 그러면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다 나오더라고요. 가만 보면 아이도 저를 친구나 잘 놀아주는 이모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웃음). 

 

주말엔 어떻게 시간을 보내요?

남편이 해외에 나가는 프로그램을 오래 해서 주말에 세 식구가 함께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어요. 보통 주말 오전까지 제가 뻗어 있어요. 연후도 주말 오전에는 엄마를 귀찮게 하면 안된다는 걸 알아요. 남편이 아이 깨면 같이 놀고 밥 먹이고, 제 밥도 준비해 줘요. 그러면 12시부터 저희가 함께하는 일과가 시작되죠. 최근에는 아이 친구 가족을 초대해서 집에서 같이 놀았어요. 저녁 되면 같이 밥 먹고 헤어지는 게 주말의 일상이었죠.

 

부부가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연후 낳고 4년 동안 사이가 정말 안 좋았어요. 일이 고되니까 서로 기대고 싶은데 기댈 언덕이 될 수 없을 때마다 실망했어요. 서로 없는 존재처럼 여기며 살던 시절이 있었죠. 올해부터는 둘만의 시간을 억지로라도 가지려고 노력해요. 일주일에 한 번은 밖에 나가서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함께해요. 연후와 2시간을 더 놀아주는 것도 좋지만 둘이 시간을 보내서 좋은 영향을 아이에게 주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

부부에게 연후는 어떤 아이예요?

연후를 생각하면 늘 고마워요. 친정 엄마도 연후는 워킹맘의 딸이 되려고 태어난 거 같대요. 한 번은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는데 연후가 “아이고 우리 엄마 불쌍해라. 저렇게 일하느라 힘들지?” 하더라고요. 왈칵 눈물이 났어요. 엄마가 일이 많아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자체가 아이에게는 제가 기댈 곳이라기보다는 걱정해 줘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의식해서 감정을 전환해요. ‘아우, 우리 연후 독립적으로 컸네.’ 하면서요. 방법이 없는 일로 속상해하면 저를 갉아먹는 일이 될 거 같아요. 언젠가는 미안함이나 죄책감이 훅 밀려오는 시기가 한 번은 오겠죠.

 

자립심이 강한 편 같아요. 지금도 엄마를 찾지 않고 잘 놀고요.

‘엄마는 지금 일을 하고 있구나’를 알아요. 자라면서 본 연후는 활발하고 누군가에게 디렉션 주는 걸 좋아해요. 병원 놀이를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아이들을 모아서 “너는 이걸 하고 너는 뭘 해.” 하면서 정해줘요. 아빠가 일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촬영 현장에서 디렉션 주는 것처럼 놀이를 해요. 확실히 성향이란 게 있더라고요. 기획하고 상상하고 창작하는 걸 좋아해요. 

저희 부부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니까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첼로도 시켜보고 공부도 시켜보고 싶었는데 관심이 없어요. 아이 기질을 보니까 저희 부부가 해온 일을 이 아이가 해도 좋겠다 싶어요. 그런 일을 잘할 것 같고요. 20년 뒤에 PD는 없겠지만 새로운 직업이 있겠죠. 얼마 전에 남편과 그래미 어워드를 보면서 저희의 바람을 좀 넣어서, “연후가 쇼를 연출하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이야기했어요. 가만 보면 저도 엄마의 바람이 제 꿈에 더해져서 PD가 되었거든요.

 

아, 정말요?

엄마는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제가 연대 신방과 가서 아나운서가 되길 바라셨대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잡지에 백지연 아나운서가 나오면 스크랩해서 제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런 사람 되게 멋있지 않아?”“서울에 있는 대학에서는 응원전이라는 걸 한대. 너무 재미있을 거 같지?” 하면서 동기 부여를 해주고 계속 상상하게 해줬어요. 저도 모르게 열심히 공부해서 방송국에서 일하면 너무 좋겠다 하는 꿈이 생겼어요. 조련당한 것 같은데 제가 선택했고 압박은 없었거든요. 티 안 나게 잘하셨죠(웃음).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대부분 엄마들이 딸에게 그런 태도를 갖지 않는대요. “넌 안 돼. 넌 못해.”라는 말을 들고 자란 친구들이 많아 놀랐어요. ‘너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엄마가 생각보다 없었더라고요.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저희 엄마에게 육아 조언을 얻으려고 연락하곤 해요. 저도 연후가 마음껏 꿈꾸고 상상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연후가 사회 안에서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살면 좋을까요?

저의 가장 큰 단점이자 성장하고 싶게 만드는 욕구는 남들과의 비교예요. 내 감정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많이 신경 썼어요. 저는 늘 옳음보다 친절함을 택하며 살았어요. 남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고, 모든 걸 좋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저를 위해서 살아왔다기보다는 내가 노력해서 성취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줬을 때 더 행복해한 거 같아요. 퇴사 후 창업을 한 것도 더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있었겠죠. 사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택하려면 계속 글 쓰는 일을 하면 되는 건데 말이에요. 제가 선택한 길이지만 지금 내가 정말 행복한가 물었을 때, 솔직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조금 다른 의미죠. 

연후는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맞춰 살면 좋겠어요. 친절함보다는 옳음을 선택하면서요. 그게 이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 같아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는데, 키워보니까 한국 사회가 자신의 중심을 잡기가 정말 쉽지 않아요. 특히 여자아이는 외모에 대한 존중감을 갖기 힘들죠. 한번은 옆 반에 예쁜 여자아이가 새로 왔는데, 머리핀을 이만한 걸 꼽고 왔대요. 선생님이 무의식적으로 “OO는 원래도 예쁜데 핀을 꽂으니 더 예쁘네.” 했나 봐요. 연후는 원래 핀 같은 걸 안 좋아했는데도, “엄마 나도 OO 같은 핀 사줘.” 하더라고요. ‘안 해도 돼. 안 해도 예뻐.’ 하려다가 “안 예뻐도 돼. 모두 예뻐야 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해줬어요.

매일매일 엄마의 세계와 대표의 세계 사이를 나가고 들어오며 사는 셈이네요. 대표로서의 목표는 몇 점이에요?

안타깝게도 회사에서는 100점짜리 대표가 되고 싶어요. 일 욕심이 아직 더 있나 봐요. 제가 뛰어든 판에서는 가정보다 회사의 비중이 더 큰 게 지금 저에게 맞는 균형 같아요. 아직은 제가 견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요. 회사의 규모가 커져서 직원이 40명이 되었거든요. 아이와 회사 사이에서 나는 왜 균형을 못 잡지, 중간 지점으로 균형을 찾으려고 하면 스스로 힘들어지는 거예요. 지금은 회사에 더 신경 쓰지만 나중에는 연후에게도 100점짜리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져요. 엄마가 대표로서 100점이 되려고 노력한 게 연후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겠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나중에 엄마를 이해해 주면 고마울거 같아요. 그렇게 마음먹지 않으면 너무 힘겹거든요.

 

두 세계 사이에서 나만의 도피처가 있나요?

정신없이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해요. 4년간 여유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최근 이 집에 이사를 오면서 혼자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을 찾았어요. 친정 엄마가 연후를 재우면 혼자 노래를 틀고 식탁에서 와인을 마셔요. 그게 너무 행복한 거예요. 매일 밤 옛날 음악을 들어요. 온라인 탑골. 2002~2010년사이 팝송이나 가요를 틀어놓고 ‘20대 때의 내가 젊어서 좋았던 것도 있네. 하지만 그때 부족했던 걸 나는 이미 많이 이뤘으니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스스로 최면을 걸어요. ‘그래, 나는 잘 살고 있어.’ 하면서요.

 

자꾸 점수를 매기는 게 좀 우습지만, 시작한 김에 하나만 더 물을게요. 소연 씨가 연후에게 기대하는 점수는?

작년부터 많이 내렸어요(웃음). 유치원에 가기 전에는 애가 좀 빠르고 잘하는 아이인 줄 알았어요. 근데 특출한 아이는 아니더라고요. 친한 친구들 중에 벌써 영어 작문을 쓰는 아이도 있대요. 예전 같으면 속이 좀 탔을 텐데 깨달음을 얻으니까 ‘특출할 필요 있나? 좋아하는 거 하고 행복하면 되지.’ 하고 저도 51점으로 맞췄어요. SNS를 보면 100점으로 보이는 엄마와 아이들도 많잖아요. 제가 그런 엄마이기를, 내 아이가 그런 아이이기를 기대하면 우리의 관계를 갉아먹는 일이 될 거 같아요. 

 

10년 뒤쯤 다른 일을 하며 살 수도 있잖아요. 남몰래 품어온 꿈도 있어요?

시트콤 작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살아온 워킹맘, 창업 이야기가 누적되면 재미있는 뭔가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때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요?

계속 친구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제가 힘든 게 있으면 연후에게 상담하고, 연후와 남편도 속상한 일을 서로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고민 상담을 할 수 있는 세 식구가 되면 좋겠어요. 관계에도 적당한 거리가 관계가 필요한 거 같아요.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기대가 너무 높으면 실망이 크잖아요. 연후도 저도 남편도 서로에게 100점을 기대하지 않는 관계가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는 51점이 목표니까, 그렇게 맞춰 살고 싶어요.

가족의 집, 각자의 행복

엄마가 고른 꽃 | 동네에 예쁜 꽃집이 생겨서 봄 원피스 대신 집 안에 들인 봄이다. 단아한 화려함이 마음에 쏙 든다.

연후가 좋아하는 그림책 | 연후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책. 엄마가 열심히 읽다가 엄마는 피기, 연후는 엘리펀트가 되어 책을 함께 읽었고 최근엔 연후도 혼자 이 책을 읽는다.

아빠의 안정, 욕실 |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다. 혼자 휴대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참 행복하다.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Ar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