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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마을
세상의 모든 자전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고등학생 시절 나는 청소년 적십자 RCY 부원이었다. 특별활동으로 부서를 하나 정해야 했을 때, 간절히 문예부를, 열렬히 밴드부를 원했지만 우르르 RCY 가입 신청서를 들고 몰려가는 친구들 곁에서 하릴없이 신청서를 작성해야 했다. 연필을 들고 원고지에 글을 적거나 건반 같은 걸 치면서 특별활동을 보내고 싶었던 나는 상상과 달리 ‘애니’라고 불리는 심폐소생술 인형에 “정신 차리세요!” 소리치면서 흉부를 압박하고 살리는데 열중해야 했다. 친구들이 RCY에 가입한 이유는 하나였다. 잘나가는 언니·오빠들이 몽땅 RCY 출신이라나? 애니를 살리는 과정은 꽤나 디테일했다. 인형을 흔들고 뺨을 때리며 의식을 확인한다. (당연히 대답하지 않는다.) 심장에 귀를 대고 박동을 확인한다. (당연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 사람을 지목해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요청한다. 가슴팍을 서른 번 압박하고 턱을 아래로 조금 내려 숨을 불어넣는다…. 이 단계에 사춘기 애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쉽게 머릿속에 그려질 테다. ‘인형과 키스하는 부서’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RCY는 재미있는 활동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야외 활동을 하자고 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단체로 야외 활동 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서 귀찮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경기도에 사는 학생들에게 여의도로 집합하라니. 속으론 툴툴대면서도 성실한 학생 얼굴을 하곤 여의도 공원으로 향한 기억이 난다. 사복을 입고 모인다는 사실에 친구들은 들떠 보였고, 한껏 멋을 낸 모습이 귀엽고 우스웠다. 피부가 탈까 봐 모자를 눌러쓰고 반팔 위에 얇은 남방을 걸쳤다. 바지를 즐겨 입지 않아 조금 불편하게 서울로 향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와글와글 모인 RCY 부원들은 자전거와 인라인 중 원하는 걸 골라 타야 했다. 둘 다 좋아했기에 뭐가 더 나을까 고민하다가 운 나쁘게 2인용 자전거에 당첨되었다. 단체로 하는 야외 활동은 질색인데, 그 안에서 또 누군가와 합을 맞춰야 한다니. 게다가 전혀 친하지 않은 3학년 남자 선배와 짝이 되었다. 사춘기 학생들은 남녀가 2인용 자전거를 탄다는 데 적잖이 열광했다. 영화 〈클래식〉(2003)의 한 장면이라며 셔터 세례를 받는 기분이란…. 그 환호에 휩쓸린 건지, 여자 후배 앞에서 멋진 선배 노릇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는 내게 “페달을 밟지 말고 바람을 느끼라.”고 했다. 둥근 등을 한껏 구부린 채 쥐며느리처럼 페달을 밟던 선배. 바람이요? 멜로 영화라면 그의 둥근 등에 반해 수줍게 웃었을 테지만, 나는 등이 굽은 선배에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주변에서 선배들이 “우우~” 하면서 사진을 찍고 환호한 게 화근이었다. 등이 굽은 선배는 긴장한 듯 페달을 점점 더 세게 밟기 시작했다. 선배는 여의도 공원을 벗어나 좀더 달리자고 했다.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급기야 여의도 공원을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질주했다. 온갖 돌멩이를 밟아 덜컹거리며 달리는 자전거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악 소리를 참느라 입술을 꽉 물어야 했다. 자전거가 튕겨 오를 때마다 안장 위에서 들썩이는 엉덩이와 허벅지가 비명을 질러댔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다 못해 나중엔 흐르기까지 했는데, 그만 타자고 말할 수가 없어 한참을 견디고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바지를 벗었을 때, 허벅지 안쪽, 뒤쪽, 그리고 엉덩이에 든 보랏빛 멍을 보고 얼마나 허탈했던가. 난 2인용 자전거만 보면 지금도 엉덩이가 아프다.
올리브 섬이라 불리는 일본의 쇼도시마는 푸르고 청명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가는 계절이라 그랬겠지만, 하늘은 푸르고 높았으며 키가 작은 나무들이 즐비한 길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쇼도시마에 빼곡하게 펼쳐진 건 온통 올리브 나무였다. 차도를 따라, 언덕을 따라, 길가를 따라 펼쳐진 모든 게 올리브 나무였다. 보통의 여름철 나무보다 채도가 낮아 카키 색상에 가까운 이파리들, 키가 작은 나무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곳. 나무들은 낮고 가느다랬지만 씩씩하고 곧았다. 올리브 나무 사이를 헤매며 대롱대롱 매달린 올리브에 몇 번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길 곳곳엔 올리브 캐릭터들이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여기서 버스를 타라든지, 조금만 더 가면 바람의 언덕이라든지, 하고 가리키는 것이었다. 올리브 캐릭터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힘을 주어 페달을 밟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빌린 건 전기자전거였다.
전기자전거는 전원電源 버튼을 누르면 작동을 시작한다. 오토매틱オートマチック 모드는 경사가 있거나 달리기 힘든 구간에서 알아서 전기를 소모하며 세게 작동하고, 편평한 길에선 적은 전력으로 느슨하게 작동하는 모드다. 반면, 파워모드パワーモード는 페달을 아주 조금만 밟아도 쌩쌩 나가는 모드로 이 버튼을 누르면 ‘이게 전기자전거인가!’ 싶은 기분이 들게 된다. 배터리가 빠르게 닳기 때문에 계속 작동해 두면 금세 방전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에코모드エコモード 버튼은 최소한으로만 전력을 소모하는 모드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나 보통 자전거보단 힘주어 달려야 할 구간에서 사용하면 좋다. 처음엔 방전될까 봐 잔뜩 몸을 사리며 버튼누르기를 주저했는데, 방전되어도 일반 자전거와 똑같이 작동한다는 걸 알고는 적재적소에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대부분 에코모드로 달렸고, 급경사의 오르막이 나타나면 파워모드 버튼을 눌렀다.
일본의 자전거들은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다. 열쇠로 풀고 잠그는 구조다. 고작 내 손가락 두마디 정도밖에 안 하는 자그마한 열쇠기 때문에 자전거를 정차하고 나면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쇼도시마는 〈마녀 배달부 키키〉(2014) 실사판 영화의 배경이 된 섬으로, 바람의 언덕에 오르면 사람들이 너도 나도 빗자루를 들고 깡총깡총 뛰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슬쩍 들어가 볼까 싶어 자전거를 그늘에 주차하는데, 좋은 그늘엔 이미 다른 자전거가 잔뜩 주차돼 있다. 커다란 나뭇잎에 안장만 겨우 숨기고 부디 작열하는 태양에 자전거가 익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살금살금 바람의 언덕으로 올랐다. 빗자루에 올라 점프하는 귀여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나도 몇 번쯤 깡총깡총 뛰다 보니 ‘인생샷’이 한가득이다. 적당히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등진 햇빛이 만든 그림자가 꽤 멋스러웠고, 나는 정말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키키가 된 듯한 기분에 히죽대며 주차한 자전거로 향했는데, 아뿔싸. 키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의 언덕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자전거 열쇠를 찾기 위해 언덕을 수 시간 꼼꼼하게 뒤적이며 흘린 식은땀만 몇천 방울쯤 되겠지. 나는 그날 열쇠를 찾기 위해 몇 장의 올리브 이파리를 만져야 했던가. 수북하게 쌓인 이파리 사이에서 자그마한 열쇠를 발견했을 때, “심봤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올리브 나무는 이제 100미터 밖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평일 아침, 축 처진 회사원들의 어깨를 힐끔거리며 성큼성큼 따릉이 정거장으로 간다. 폭우가 쏟아지거나 눈이 얼어 미끄러운 날이 아니라면 역에서 나와 언제나 자전거를 탄다. 비록 4분 남짓 달리는 게 전부지만, 페달을 밟는 그 잠깐의 시간은 온전한 아침의 기쁨이다. 매일 기쁨을 행하기 전에 날씨와 어울리고 오늘 기분과 닮은 음악을 고르는 건 나름의 의식이었는데, 친구에게 핀잔을 들은 뒤로는 출근길이 다소 조용하고 심심해졌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뮤직비디오 속 여자 주인공이 된 양 출근길을 바라보던 나는 청신경을 곤두세우는 대신 주변을 좀더 샅샅이 둘러보는 시야 넓은 출근자가 되었다.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각에 경의선숲길 부근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20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앳된 얼굴로 언제나 전동킥보드를 타는 그녀.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기쁨의 킥보드를 대여할까 상상하면서 얼굴을 마주한 게 벌써 수개월째다. 몇 날 며칠 아침마다 만나니 같은 학교를 다닌 후배처럼 반갑고 친근하다. 어쩌다 하루 못 보면 오늘은 출근(등교일까?)하지 않는 걸까,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애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나와 마주쳐 지나는 길목에서 꼭 한 번씩 정차한다는 건데, 늘 킥보드를 세우고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지만 뭘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다.
이틀 정도 그 애를 보지 못했다. 안부가 조금 궁금해지던 아침,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단화를 신고, 크로스백을 멘 채 유령처럼, 소리 없이 도로 위를 질주하는 킥보드. 전동킥보드는 도로 위의 고라니라며 많은 이의 미움을 사는 것 같지만, 그 애가 타고 있는 걸 보면 무해하고 순해 보이기만 한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의 움직임이 조금 다르다. 보통은 나와 마주 보며 달려와 얼굴을 확인하고 스쳐 지나가는 식인데, 오늘은 나와 수직 방향으로 길을 건넌다. 길이라고 해봤자 좁기 때문에 그녀의 동선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그녀는 킥보드를 길 한쪽에 세워두고 교통경찰처럼 손바닥을 펼쳐 달려오는 자동차를 멈춘다. 뭐야, 초능력이라도 부리려는 걸까? 호기심이 일어 마주 오는 차를 피해 갓길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 애의 행동을 관찰한다. 한 손은 차량을 향해 손바닥이 보이게끔 펼치고 다른 한 손은 뒤쪽을 향해 이리 오라는 듯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며 무언가를 부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작은 여자애가 자동차 몇 대를 세우고 길을 건너는 모습은 마치 꼬마 마법사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귀여우면서도 불안하다. 혹시라도 호통을 들을까 겁이 나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려는데, 시야 아래쪽에 해답이 있었다. 거기엔 여자애만큼 작고 여린 길 고양이가 여자의 손짓을 따라 쫄쫄쫄 길을 건너고 있었다. 여자는 길 반대편으로 고양이를 무사히 인도한 뒤 자동차에 꾸벅 인사를 하고 길을 터준다. 그간 킥보드를 세워두고 가방을 뒤적이며 꺼낸 게 길고양이 사료였구나, 이제야 그 애의 동선이 이해가 된다. ‘연남동에서 아침마다 길고양이의 안부를 살핀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이어폰을 빼고 자전거에 오르니 출근길이 한층 더 깊고 귀여워진다. 연남동의 출근길은 이렇게나 아름답고 귀하다.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