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Yourself

버튼티 출판 조인숙

좋아하는 일이라고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그럴 때면 하던 일을 좋아하려 애쓰기보다 고개를 돌려 다른 관심사를 찾는 사람, 버튼티 출판의 조인숙 대표다. 잘하지 못해도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들었고, 일과 육아로 삶의 중심을 잃어갈 때면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관광지보다 익숙한 장소에 들리고, 숙소에서 빈둥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여행 가기 전 손수 옷을 만들며 나다운 재미를 찾아온 이야기는 여러 권의 책이 되어 새로운 육아 문화를 만들었다. 그 사이 곁의 두 아이는 자신의 결과 속도로 자라났다.

좋아하는 걸 했을 뿐인데

“신기하게 여행을 가면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되더라고요. 아이 말에 귀 기울이고, 예기치 못한 일이 닥쳐도 평소보다 침착하게 판단해요. 여행 갔을 때 비로소 엄마가 되는 것 같아요.”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요즘 어떻게 지내요?

아이들과 리스본에 다녀온 기록으로 책을 준비 중이었는데 코로나19로 미뤘어요.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작업실과 생활 공간을 분리하고 싶은 열망이 점점 커졌어요. 숲이 보이는 큰 창이 있는 작업실을 알아보다가 집을 구해 층을 분리해 보기로 마음먹고, 경매에 도전해 집을 샀어요. 공부할 것이 정말 많았지만 무탈하게 이사를 했고, 커튼과 침구, 쿠션 등을 만들다가 자연스럽게 온라인 숍도 운영하게 되었죠. 요즘은 패브릭 제작의 비중이 더 커졌지만 여전히 작업의 중심은 책이에요. 4월 중순부터 새로운 패브릭은 안 만들고 다시 책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한 달 바짝 하면 7월에는 리스본 책이 나오지 않을까요(웃음)? 

 

집 안에 가구나 살림살이, 소품들이 독특해요. 취향이 확고한 편 같아요. 좋아하고 아끼는 몇 가지를 소개해 주세요. 

저는 좋아하는 게 늘 많은 편인데 대체로 이야기가 있는 걸 좋아해요. 여행 가서 제일 먼저 일기장, 개인 컵, 이불을 사는데요, 그 물건들을 보면서 ‘우리 이때 즐거웠잖아.’ 하고 떠올리는 게 좋아요. 저에게 여행 준비는 옷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요. 지난 여행에서 산 천으로 다음 여행에서 입을 옷들을 만드는 거죠. 그 옷을 보면 우리가 간 나라와 겪은 일들이 기억나서 누구도 못 주고 아직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아껴요. 제 작업실 책상에 있는 브라운 곰돌이 인형은 예전에 잡지에 연재할 때 만든 건데, 여섯 살 민소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어요. 곰돌이 솜 안에 민소가 자기 머리카락을 넣어 놨대요. 그래서 더 특별하고 기억에 남아요. 저희 집 거실에 알바 알토Alvar Aalto 제품이 많은 편인데요, 여행을 못 가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곁에 두고 싶더라고요. 예전이라면 색감이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별로 관심 없었을 디자인인데, 요즘은 서양적이면서 동양미가 결합된 디자인과 철학이 좋아졌어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많이 생각했고, 핀란드의 자작나무를 최초로 구부렸잖아요. 핀란드 호수 모양의 화병이나 트레이도 좋아해요.

첫아이가 일곱 살 때부터 함께 여행을 떠난 거죠? 《런던에서 보낸 여름방학》, 《파리에서 보낸 여름방학》, 《북유럽에서 보낸 여름방학》 등의 책도 만들었고요. 그때가 15년 전이니까 ‘아이와 여행하는 엄마’의 선구자였어요. 

아이 낳고 가까운 동남아나 일본 여행은 종종 갔어요. 첫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이와 단둘이 런던으로 떠났는데, 돈 많은 엄마가 아이 데리고 유유자적 런던을 배회한 줄 아시더라고요. 사실은 형편이 넉넉한 시기는 아니어서 몇 년 동안 쌓은 여행 적금이 만기 되어 간 거예요. 숙박도 유스호스텔만 구했고, 현지에 가면 더 싼 방이 있을 것 같아서 발로 뛰면서 잠잘 곳을 구했어요. 그때는 에어비앤비가 없었거든요. 애 데리고 가면서 거절당하고 고생한 이야기들을 잡지에 연재했고, 인기가 있어서 책으로 나왔어요. 글 쓰는 일에 자신이 없었는데, 편집장님, 에디터분이 응원과 격려를 많이 해주셔서, 재미있게 했어요. 혼자서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멋모르고 1인 출판을 차린 거고요. 당시엔 가이드 책에 런던 뮤지컬 소개가 없었어요. 리버티 백화점도 안내되어 있지 않았죠. 제가 경험하고 좋았던 정보를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 같아요.

좋아하는 걸 하는 데 깊이 고민하고 비교하는 성향은 아니에요. 제가 영어를 못해요. 고등학교 선생님이 저한테 영어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영어 난독증이 있었어요. 엄마는 제가 여행 간다고 그러면 “안 된다. 남편이랑 가야지 애랑 둘이 왜 가니?” 하면서 말리셨고요. 영어도 못하고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약간 겁도 나지만 ‘아니 누가 우릴 잡아먹겠어? 영어 못해도 우리는 외국 사람인데 어때?’ 하는 생각이 있었죠. 일곱 살 아이에게도 “아빠 없이 우리끼리 잘 다녀올 수 있어. 괜찮아. 우리 충분히 잘할 수 있어.” 말해주고 함께 떠났어요. 민소가 고2까지 함께 해외여행을 다녔는데, 학원에서 놀라더라고요. 그래서 선행을 하거나 진도가 빠른 학원에는 다니질 못했어요. 민소가 고3 시험 기간 때는 둘째와 둘이 여행을 갔어요. “민소야 지금 비행기 표가 싸. 다녀올게. 너는 시험 잘 봐.” 하고 도시락 배달시켜 주고 열흘 런던에 다녀왔어요.

즉흥적으로 행동해서 생각과 다르거나 후회한 적은 없어요? 

사람은 원래 자기 합리화를 잘하잖아요. 특히 여행이 그래요. 김영하 작가는 안 좋은 순간이 많을수록 쓸 거리가 많아서 좋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소설가는 아니지만 추억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엉엉 울었어.’ 하는 일들을 추억하는 것도 재밌어요. 제일 당황한 기억은 첫째 5학년 때 중학생 조카와 셋이 여행을 갔는데, 조카를 잃어버린 거예요.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이동하려고 트램에 탔는데, 혼자 앞에 앉겠다고 고집부리더니 사람이 가득 차면서 애가 안 보이는 거예요. 트램 기사가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고 해서 민소한테 제 휴대폰을 주고 “이 자리에 트렁크 들고 잠깐만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아빠한테 전화해.” 하고 뛰어가서 조카를 찾은 적도 있어요. 여행은 어떤 순간도 후회가 없는데 책은 나오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아요. ‘양장으로 만들걸. 폰트 사이즈를 키울걸.’ 후회가 계속 남아서 또 만드나 봐요. 

 

잘하지 못해도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도하고, 어려움도 헤쳐나가는 거 같아요. 

맞아요.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직접 옷을 지어주고 싶었어요. 아이도 봐주고 수업도 진행하는 센터를 알아보고 등록했어요. 처음으로 재봉틀을 배웠는데 정말 못했어요. 좀 퉁명스러운 선생님이셨는데, 제가 만든 바지를 보시더니 “남자가 한 줄 알았어요.”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요. 잘하지 못하지만 만드는 게 너무 재밌어서 계속했더니 칭찬을 받는 날이 오더라고요. 원피스 만드는 수업이었는데, 대부분 한 가지 천으로 만드는데, 저는 주머니에 배색을 넣고 가슴팍에 수놓고 종 달고… 전위적인 옷을 만든 거예요(웃음). 그때 선생님이 재봉틀은 배우면 느는데 이렇게 남과 다르게 만드는 건 쉽지 않다며, 잘한 거라고 해주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잘 알아챘어요? 

저는 4남매 중에서 셋째로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언니는 영특했고 오빠는 아들, 동생은 아기였는데,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늘 바쁘셨죠. 게다가 정말 늦된 아이였어요. 유치원을 안 다니고 집에서 동생이랑 개미 쳐다보고 놀고, 고모랑 삼촌이 살던 책방에 들어가서 그림을 자주 봤어요. 무슨 내용일까 혼자 상상하는 날이 많았어요. 한글을 안 떼고 초등학교에 가서 맨날 울었어요. 고무줄이나 공기놀이를 못했고, 받아쓰기할 때 나는 2번도 못 썼는데 선생님이 3번 부르면 울고, 숙제를 몰라서 오빠가 제 친구 집에 찾아가서 물어봐 줬어요.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는데 미술 시간은 칭찬을 받으니까 좋았어요. ‘내가 그림은 좀 잘 그리나 보다.’라고 생각했죠. 고등학교 때는 교지 만드는 편집부를 모집한다고 해서 언니 곁에서 주워들은 거로 에세이를 써서 냈는데, 운 좋게 뽑히면서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미술을 배워보라고 권하셨어요. 미술 학원에 갔더니 친구들이 석고상을 똑같이 그려서 깜짝 놀랐어요.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뛰어난 화가가 될 것 같지는 않아서 디자인을 선택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는 학교생활이 지루해서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지만 매일 가서 영화를 봤죠. 진지하게 토론하는 거에는 흥미가 없었는데 그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재미있는 걸 찾는 재주가 있네요. 나를 보듬어주는 방식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취직도 동기보다 먼저 했고, 독립도 결혼도 가장 빨리했어요.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일로 넘어와 일 욕심도 큰 편이었죠. 만삭일 때도 잡지 일러스트레이터로 매달 마감을 두 개씩 했어요. 그런데 아이 낳고 정말 놀랐어요. 내 시간이 없을 거라는 걸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거든요. 과도기적인 시기여서 산후우울증이라는 단어도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죠. 아기가 100일 지나면 잘 잔다고 그랬는데 100일이 지나도 안 자더라고요. 일러스트 그릴 게 많은데, 남편은 야근한다고 늦고, 아이가 너무 안 자는 날에는 애랑 같이 울었어요. 지금 같으면 “나도 일해야 해. 당신 일찍 퇴근해서 아이 좀 봐.” 하면서 화도 냈을 텐데, 그래도 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고 주위에 조언해 줄 사람도 없었어요. 시댁에 무조건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해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일이라도 좀 쉬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때는 지금 쉬면 일이 끊길 것 같더라고요.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게, 엄마를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거였어요. 일러스트레이터, 엄마 이렇게 두 가지 일을 하는 거라 여기며 첫째를 직업의식으로 키웠어요. 약간 죄책감도 있었지만 돌 즈음 어린이집에 보내고 회사에 출근했어요. 이유식이 보급된 시기가 아니었지만 요리를 못하니까 이유식을 배달시켜 아이를 키웠고요. 제가 잘하지 못하는 걸 하는 것보다 좋은 걸 사서 먹이는 게 훨씬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5대 영양소가 다 들어 있다고 하잖아요(웃음).

하고 싶은 게 많은 엄마의 삶은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잖아요. 균형을 어떻게 잡아갔어요? 

탈출구는 여행이었어요. 학교 선생님인 엄마가 방학하면 아이를 맡기고 친구와 여행을 떠났어요. 둘째 낳고 일 년도 안되어 다시 집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그때는 집에서 일한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했어요. 하지만 전 너무 힘든 시기였죠. 하루 종일 일하고 애 자면 또 일하고. 내 시간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제가 딱했는지, 엄마가 퇴직하면서 둘째를 맡아 키워주셨어요.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해야 했죠. 첫째 하교 시간까지 일을 마치려고 밥도 건너뛰고 화장실도 참고 일했어요. 늘 밤늦게 자고 아침엔 식구 중 제가 가장 늦게 일어났어요. 아침을 차리고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남편 몫이었고요. 아이 하교 후에도 “민소야 놀고 있어. 숙제하고 있어.” 하면서 일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여행을 가면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되더라고요.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어른이라는 책임감도 생겨서 아무리 늦게 자도 아침 일곱 시면 눈이 떠져요. 생활비 아껴보겠다고 밥도 직접 하고 도시락도 싸요. 아이 말에 귀 기울이고, 예기치 못한 일이 닥쳐도 평소보다 침착하게 판단해요. 

여행 갔을 때 비로소 엄마가 되는 것 같아요. 엄마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다를 텐데 저는 말이 많아서 이야기해주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첫째가 미술관 가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같이 가서 제가 아는 건 설명하고, 모르는 건 사진 찍어 와서 저녁에 집에서 검색해 봤어요. 다음 날 다시 가서 “엄마가 알았어. 이런 의미가 있는 그림이래”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일곱 살 아이랑 여행 간다고 하면 “더 커서 가. 어차피 기억 못 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아이는 지금까지 꽤 많은 걸 기억해요. 열한 살 때 테이트 브리튼 옆 숙소에 묵으면서 미술관에 자주 갔는데, 그때 이야기 나눈 그림의 복선도 기억해요. 참 신기한 게 비슷하게 자랐는데 둘째 민유는 미술관을 정말 싫어해요.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하는데, 폐쇄공포증인가 싶게 너무 지루해하고. 제 딴에는 카페에 가서 단것도 먹이고 달래봤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미술관 밖으로 나오면 쌩쌩해서 막 뛰어다니죠. 

 

여행을 가서 비로소 엄마가 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해야 할 일과 의무를 내려놓으면 좋아하는 것만 남을 거 같아요.

사람들은 어떤 행위에는 목표나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여행 가서 아이가 활발해졌나요? 다양한 걸 접하고 호기심이 많아졌나요? 영어로 말도 많이 했어요?” 하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우리는 여행 가서 구경하고 빈둥거리거든요. 아, 그림도 그려요. 집에서는 일로서의 그림만 그렸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요. 애들도 집에서는 게임처럼 재밌는 게 더 많으니 자주 그리진 않는데 여행 오면 시키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고 기록을 하죠. 그래서 여행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서점이나 화방을 찾아요. 고흐가 아르바이트했던 서점에서 제본이 특이한 노트나 마음에 드는 일기장을 사는 식이죠. 일상생활에서는 일기를 안 쓰지만 여기선 일기장을 끄적이거든요.

봐봐, 엄마는 네 편이야

“네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좋지만 직업 별로 안 중요해. 좋아하는 거, 행복한 걸 해. 대신 기본적으로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어야 해.”

두 아이가 많이 자랐죠. 직접 쓴 책에 이런 얘길 했어요. ‘여행을 떠날 때는 아이들이 공부할 것은 절대 가져가지 않는다.’, ‘실력을 쌓으려 노력하기보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루어 짐작했을 때, 아이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도왔을 거 같아요.

저는 지극히 보통 엄마예요.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유학을 보내려 고민하고 대학은 안 가도 된다며 진취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공교육 안에서 해야 할 공부를 시키고 학원도 보냈어요. “좋은 대학 가면 좋지! 근데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아이를 키웠어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수학 문제집 풀다 물어보면 봐주고, 시험이나 숙제 같은 것도 챙겼어요. 한글을 혼자 깨우치고 가르치지 않아도 받아쓰기를 곧잘 했는데, 중학교 입학 후 시험이 어려웠나 봐요.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고 고민해서 반 대표 엄마에게 물어 몇몇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아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게 엄마 책임인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저는 아이의 삶과 내 삶을 동일시하는 편이 아니라 그 학원에 보내지 않았어요. 선행을 하지 않는 적당한 학원을 찾아 등록했고, 학원이 싫다고 하면 다른 학원 알아봐 줬어요. 거기까지는 제가 도와줬지만 매 순간 성적을 체크하진 않았어요. 저는 아이 성향을 알잖아요. 내향적이고 자신감이 높은 편이 아닌데 스스로 말하지 않는 걸 제가 묻고 체크한다고 나아질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민소가 미대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저는 학원비만 내줄 뿐 아이에게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주변의 선배 언니는 미술 학원에 찾아가서 선생님하고 그림에 대해서 상담하는 엄마들도 많다며 “왜 그림을 안 봐? 네가 보여 달라고 하면 되잖아.”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아이가 잘 그렸으면 저한테 자랑했을 거 같아요. 시험 잘 봤으면 얘기했겠죠. 잘 못한 거 같은데 굳이 물어보면 기분만 나빠지잖아요. 사이만 안 좋아져요. 제 정신 건강도 중요하니까요. 입시 끝나고 “엄마 사실 나 수학 꼴등 할 때도 있었어. 나이스NEIS 들어가면 성적 조회할 수 있는데, 엄마는 정말 안 봤어?” 하고 묻더라고요. ‘나는 나고, 너는 너다’가 제 삶의 방식이에요.

아이가 원하는 건 돕고, 속도와 방식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지켜봐 준 거네요. 

제가 아이들과 여행을 갔던 것도 선택지를 열어주고 싶어서 였어요. 저는 대학 때 런던으로 배낭여행을 갔는데, 런던에 가면 꼭 〈오페라의 유령〉을 보라길래 못 알아들으면서 봤어요. 그런데도 너무 흥미로워서 ‘내가 이걸 좀더 빨리 알았다면 무대 미술을 공부했을 텐데.’ 싶더라고요. 우리는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부터 꿈이 뭐냐고 물어봐요. 그리고 그 꿈을 어른들이 판단하곤 해요. 민소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태권도 사범님이 꿈이 뭐냐고 물었대요. 그래서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이라고 했더니 “꿈은 크게 가져야지.” 그랬대요. 저는 너무 좋았거든요. “네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좋지만 직업 별로 안 중요해. 좋아하는 거, 행복한 걸 해. 대신 기본적으로 먹고 살 만큼의 돈은 벌어야 해.” 같이 전시를 볼 때도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저 작가는 원래 전공이 조각이 아니고 건축이래. 토베 얀손은 원래 서양화를 공부했대.” 민소는 동양화를 전공하지만 요즘 조소에 관심이 있대요. 그런 접근이 참 좋아요. “네가 하고 싶으면 선택지를 닫아놓지 마. 영어가 문제라면 지금부터라도 배우고 준비해서 교환학생으로 가도 돼. 나중에 뭘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될 거 같아.”라고 얘기해요. 자라면서 애 성향이 계속 바뀔 거고 직업도 더 다양해질 거 같아요.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길을 걸어보면 좋겠어요.

 

민소는 그림을 좋아한 아이였죠. 미대 입시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해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예고 준비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경쟁이 싫고 실패를 두려워해서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엄마와 남편은 그래도 시켜보자고 했지만 저는 바로 그만뒀어요. 예고를 가는 것보다 아이 자신감이 더 중요한 거 같았거든요. 일반 학교로 진학했고, 책을 좋아하니까 사서가 되어 볼까 하다가, 사서는 현실적으로 성적이 더 높아야 해서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미술로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일반고에서 미대를 준비하기엔 그림만큼 성적에도 집중을 해야 하는 터라 쉽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1년 사이에 아이의 태도가 바뀌었더라고요. 성향상 사람이 많은 큰 학원에 다니길 꺼리는 편이었는데, 스스로 큰 학원에 다니겠다고 했어요. 주눅 들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좋은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미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잡고,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미술학원 가서는 잘 그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연습하느라 고군분투했죠.

그런데 고3 시험 기간에 둘째와 런던에 다녀오셨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그때 같은 고3을 키우는 선배 언니가 수험생 엄마 같지 않다면서 나무랐어요. “너 그거 자랑 아니야.” 하면서 옆에서 자소서 자료 찾아주고 그림도 찾아줘야 한대요. 당시의 저는 민소에게 이런 얘길 했거든요. “엄마가 그림 자료를 찾아준다고 네가 그림을 잘 그리고, 자료를 안 찾아준다고 그림을 못 그리는 걸까? 그건 말이 안 돼.” 옆에서 연필 깎아주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도 “연필 깎는 것도 그림의 일부야. 준비 과정이야.” 하면서 스스로 하게 했어요. 연필 깎는 거 힐링 되고 좋잖아요(웃음). 냄새 맡으면서 자기가 해야죠. “엄마, 실기 시험 준비물로 집게 필요한데 사다 줄 수 있어?” 물으면 “네가 홍대 화방 가서 살래?” 하고 답했어요. 다 컸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나고 너는 너다’가 명확히 이해됐어요(웃음). 민소가 목표에 도전한 얘기를 더 들려주세요. 

민소가 선생님 추천으로 나간 대회의 정물과 인물 분야에서 특선과 입선 상을 탄 적이 있어요. 민소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삼수생까지 치르는 대회라서 정말 잘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준비했는데, 어느 날 서울대 반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꿈을 너무 높게 잡은 거 같아서 엄청 말렸어요. 모든 아이에게 서울대의 꿈을 심어주고 그 전형 위주로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모두 그 학교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학교마다 실기 주제와 면접 유형이 다르고 자소서와 포트폴리오 준비도 해야 하는데, 성적이 높지 않은 아이가 그것만 바라보는 건 너무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하는 중 감사하게도 수시에 넣은 대학에 합격했어요. 막상 수시에 합격하니 목표한 학교를 완강하게 반대한 게 좀 미안하더라고요. 아이도 아쉬움이 컸는지 제대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 했어요.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미술학원 옆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어요. 거리가 멀어서 아침 여섯 시쯤 집에서 출발하는 생활을 반년 했어요. 아침잠이 많은 제가 어둑어둑한 시간에 일어나 애를 깨우고, 차에서 먹을 아침을 챙긴 뒤 학원에 데려다주는 생활을 하게 된 거예요. 

 

이제야 미대 수험생 엄마로 산 거네요.

그렇죠. 쉽진 않았지만, 아이는 고맙게도 1차 실기 합격을 하고 성적 등급컷도 통과했어요. 하지만 마지막 면접에서 예상 밖의 질문이 나와 답을 못하고 탈락했어요. 한 달 뒤 있는 다른 대학에도 예비 3번으로 떨어졌고요. 

 

이럴 수가,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민소는 힘들어했죠. 저도 안타까웠지만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실패와 불행은 늘 닥칠 수 있잖아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말을 했어요. 지금의 바닥이 진짜 바닥은 아니라고요. 티브이에서 보면 나쁜 일도 너무 많죠. 자신의 탓도 있지만 원치 않는 전쟁이나 사고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요. 우리가 살아 있으면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서야죠. 운명을 탓하지 말고 헤쳐 나가보자고, 엄마가 큰 버팀목이 될지 모르겠지만 네 곁에 서 있을 거라는 말을 했어요. 제가 한 육아의 대부분은 “엄마는 네 편이다.”는 걸 보여주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일어섰나요? 

이번에는 미술 학원에서 너무 아깝다고 다시 한 번만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장학생으로 학원비를 거의 10분의 1만 받겠다고 하고 재수학원에서도 장학금 혜택을 준다고 했어요. 너무 길고 힘든 과정이라서 남편과 친정 엄마 모두 다 반대했지만, 제가 모든 비용을 감당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지긋지긋한 일 년의 과정을 걸었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어요. 하나의 관문을 넘으면 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이가 가장 힘들었을 거예요. 길고 지치는 과정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지나치게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일찍 두각을 보이고 진로를 정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천천히 임계점에 다다르는 아이도 있더라고요. 고3 첫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 성적이라고 하는데, 민소는 그렇지 않았어요. 성적이 올랐거든요. 미대 준비하느라 날마다 미술 학원에 가기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는 게 보통이라지만 그건 아이마다 다른 거 같아요. 

 

정말 치열한 과정을 지나왔군요. 징글징글한 시간을 버티면서 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같이 자랐을 거 같아요.

첫째가 어릴 때는 저와 달라서 좋았어요. 저는 뭐든지 느리고 작고 울고 징징거리고 했는데 이 아이는 키도 크고 너무나 의연해서 대견했어요. 자랑스럽고, 뭐든지 될 것 같았죠. 그런데 크면서는 그 달랐던 점 때문에 너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아이가 사춘기부터는 너무 느긋해서 답답했어요. 고3이 되고 입시 준비를 하면서는 자주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동양화 특성상 서서 그림을 그려서 관절에 무리가 갈 수는 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니라 걱정이 되긴 했죠. 손목과 발목이 아파서 이틀에 한 번꼴로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다녔어요. 근데 아는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외향적인 애들은 “엄마 나 너무 힘들어.” 하면서 자기를 봐달라고 하는데 내향적인 애들은 아프다고 표현한대요. 그럼 엄마가 좀 더 관심을 주고 “그래 너 힘들구나.”라는 걸 알아줘야 한대요. 나와 다른 성향의 아이지만 이해하고, 같은 편에 서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요? 

민소가 학교에 잘 다니는구나 싶어서 고2 학부모 상담을 안 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만 예뻐하는 것 같고, 반 분위가 낯설다며 현장 학습을 안 가겠대요. 안 가고 싶은 애를 억지로 보낼 수 없어서 그러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민소가 너무 고집이 세다고 언짢아하시더라고요. 그즈음 민소 과외 선생님에게 민소가 1학기 때 봤던 역사 수행평가가 최하점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답을 못 써서가 아니라 성실히 썼는데 점수를 낮게 받은 거 같다면서 제가 학교에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민소에게 물었어요. 엄마가 문제를 제기하길 바라냐고요. 이미 점수는 나왔으니까 걸고넘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도 따지기가 무서웠지만 선생님을 만나보기로 마음먹었어요. 내성적인 아이를 인정하는 내용의 책을 읽고, 민소가 해외에서 어떻게 미술을 접했는지, 동양화를 전공으로 정한 이유를 준비하고, 저희가 쓴 책도 가져갔어요. 다행히 이야기가 잘 풀려서 선생님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사실 저는 선생님보다 민소에게 제스처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엄마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했어. “봐봐, 엄마는 네 편이야.”라는 걸 행동으로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네요. 이제는 첫아이가 성인이 되었는데요,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거 같아요.

맞아요. 이제는 육아가 아니라 성인 대 성인으로 어떻게 관계를 이어갈 것인지 고민해요. 옛날에는 제가 가르치고 훈육할 게 있었죠. 엄마가 그림도 그리고 책에도 나오니 커 보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제는 민소가 더 잘 그리니까 ‘우리 엄마 나보다 못 그리네.’ 할 거 아니에요. 하지만 엄마가 못하는 게 창피한 거 아니잖아요. 물어보면 모를 수도 있고, 같이 검색해서 알아보고, 아이한테 배우는 거죠. 고등학생 때 민소가 너무 청소를 안 해서 제가 “여자애 방이 이게 뭐야?” 그러면 민소가 “엄마 왜 거기에 ‘여자애’라는 말을 써?” 하면서 불편해했어요. 처음에는 “네가 여자지 남자니?” 하면서 여자다움, 남자다움이라는 단어를 왜 불편해하는지 몰랐어요. 저는 어릴 때 그런 말을 자주 듣고 자랐고, 당연하게 교육받았으니까요. 민소가 《82년생 김지영》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옆에서 새로운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딸에게 이런 이야기 듣는 거 너무 좋아요. 자식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꼰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웃음). 

 

함께 하는 취미도 있어요?

만들기 좋아하고 바느질 좋아하는 건 정말로 성향이더라고요. 첫째는 제가 옆에서 바느질하고 붙들고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안 좋아해요. 그런데 둘째는 한 번도 안 가르쳤는데도 코로나 때 혼자 플레이모빌 옷을 손으로 만들고 놀았어요. 부모님이 좋아하고 가르친다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취미가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저도 부모님은 여행 싫어하셨지만 삶의 균형이 여행인 사람이잖아요. 부모로서 아이에게 다양한 취미생활을 누리는 걸 보여주지 않는다고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예전에 민소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여행을 안 좋아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어요. “괜찮아. 너는 어릴 때 안 가봤으니까 커서 가면 더 새롭고 즐거울걸?” 저희는 취향이 비슷하진 않아서 일상의 관심사를 나누는 걸로 만족해요. 제가 문학이나 예술, 패션,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면 민소가 옆에서 구글링해서 더 알려주는 식이에요. “이번에 아카데미 의상 봤어?” 같은 일상의 이야기죠. 취미는 각자도생하면 좋겠어요. 저와 남편도 서로의 일과 취미에 큰 관심이 없어요(웃음).

 

요즘 좋아하는 것, 잘하고 싶은 일은 뭐예요?

퀼팅이요. 퀼팅이 되는 재봉틀 구입했거든요. 아직 시작하진 않았지만 급한 일들 마무리되면 해보려고 레퍼런스 찾아보고 관련 책 보는 거 좋아해요.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를 버리지 않는 조화’가 가족이 지향하는 삶이 아닐까 짐작돼요. 어떻게 늙고 싶어요?

새로운 걸 계획하는 게 삶의 원동력이라서 늘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지금처럼 그때그때 샘솟는 관심사에 빠지며 가늘고 길게 일하며 살고 싶어요. 또 아이들을 어서 독립시키고 싶어요. 나중에 같이 살더라도 엄마 아빠의 울타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어린 시절 늘 엄마가 바빴는데, 그게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어요. 차별하고 비교하는 건 정말 싫었지만 엄마가 바빠서 데리러 못 온 거고, 그런 난관은 제 선에서 해결했어요. 입시 준비할 때 새벽까지 그림을 그렸는데 차가 끊기면 엄마에게 전화하기 보다 택시 타고 집에 왔어요. 독립하고 혼자 살아보니 부모님의 고마움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나는 학비 고민 없이 학교에 잘 다녔구나. 밥 차려주는 것도 얼마나 고마워. 우리 엄마 밥 먹고 싶다.’ 하면서요. 저는 민소에게 혼자 살아보라고 권해요. “자취가 싫으면 기숙사라도 좀 알아봐.”라고 말하는 데, 민소는 싫대요. 구박도 좀 하거든요. “엄마 밥 받아먹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아침에 데려다준 거 되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정리 정돈 좀 해. 이제 혼자 여행 갈 때도 됐다.” 하면서요. 아이들이 독립하여 해외에서 활동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괜찮아요. 무얼 하든 건강하고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