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손님들의 휴가 소식이 몰려든 8월의 시작, 사흘간 책방 문을 닫았다.정신없이 대청소를 하다 보니 시간이 무섭게 지나갔다. 다시 문을 연 날.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열다섯 살 아이 둘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좀 있다가 가도 돼요?”
책방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근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큰 액수는 아니지만 책방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 몇몇과는 마음이 맞아, 책방에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나눈 시간과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였다.
휴일에 갈 곳이 없다며 잠깐 쉬고 가겠다는 두 아이는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휴대폰에 코만 박고 있었다. 주머니에 챙겨온 간식도 다 떨어진 듯했다. 아이들과 신선한 이야기를 할 절호의 기회 같았다. 책과 글 같은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다른 이야기로 떠들 기회. 나는 불투명한 주황색이 찰랑거리는 오렌지 주스를 두 잔 들고 그들 곁에 가서는 다짜고짜 물었다. “너희, 고민이 뭐야?”
B: 한 다섯 달 정도 전인가?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약도 먹고요.
나: (태연한 척)안 그래도 너 자꾸 칙칙한 책을 빌려 가더라.
B: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요. 아 참, 그 책 갖다 드려야 하는데…. 재밌었어요. 우울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오히려 위로 받았어요.
나: 다행이네. 그나저나 상담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니?
B: 작년에 친구들과 관계가 틀어지면서 시작된 것 같아요. 여러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니까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기혐오도 심해졌고요.
이야기를 듣던 옆자리의 C는 ‘미처 몰랐다’라는 말을 계속했다. B를 밝은 아이라고 생각했던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다른 학교와 학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일상이 포개어지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매주 주말이면 노래방과 책방을 함께 쏘다니던 친구인데. 갑작스러운 고백을 들은 C는 괜스레 미안해진 것 같았다. 쉽게 대사를 넣지 못하고 한숨이 담긴 추임새만 더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 C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1학년 때 함께 놀던 무리와 2학년 때 새롭게 사귄 무리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다. 한쪽으로부터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과도 같다. 후에 겪을 수모가 두려운 C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무리에서 동떨어지거나 배척당하는 상황이 아이들에겐 가장 무서운 처분이다. 한 무리에 들어가면 다른 친구와는 식사를 한 끼 함께 하는 것도 힘들다. 자유를 빼앗겨 답답하면서도 속한 곳에서 벗어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B는 C의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네 맘 알아’ 하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B: 작년에는 상황이 좀 심했지만 지금은 훨씬 나아졌어요. 근데 제 마음은 계속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요.
나: 그때 받은 상처가 남아있기 때문일까?
B: 그렇기도 하고요. 사람을 대하는 일이 지쳐요.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억지로 밝은 리액션을 하거든요. 그러고 난 후에 집에 오면 너무 힘들어요.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거든요.
나: 생각만 해도 정말 힘든걸.
B: 그래서 요즘에는 연습해요. 남 생각하지 말고 나만 생각하기, 상대방에게 힘든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기. 예전에는 ‘나’도 없었고, ‘거절’도 없었거든요.
사실 우리의 고민도 아이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으면서도 많은 것을 침해당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 어떤 테두리 안에 있지 못하면 극도로 불안하지만 막상 그 좁은 영역에 도달하고 나면 몹시 불편해지는 마음. 나도 한때 절절하게 느꼈던 마음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충분히 혼자 있어야 비로소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또 충분히 함께 있어야 이윽고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어쩌면 ‘함께’라는 두 글자가 아이들의 일상을 꽁꽁 결박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혼자’가 될 수 있는 영역을 만들기.
충분히 혼자가 되는 방법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언제든 갈 수 있는 비밀 공간을 마련해두는 것이다.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영토의, 백성을 가지지 않은 왕이 되는 일만으로도 상처 난 마음은 서서히 회복된다. 그곳은 친구들이 절대 가지 않는 작은 카페일 수도 있고, 검색으로도 찾기 어려운 후미진 인터넷 공간일 수도 있으며, 두꺼운 백지 뭉텅이 위일 수도 있다. 어디든 고요하고 비밀스러운 자리라면 족하다. 청소년 소설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의 주인공 다현은 그가 다스릴 비밀 영토를 블로그로 정했다. 친구 관계로 B와 C처럼 애를 먹던 시기에는 비공개였던 그 블로그가, 다현의 성장과 함께 공개로 전환되는 부분에선 통쾌하기까지 하다.
다가오는 주말에 B와 C는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해사한 얼굴로 책방의 문을 열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무거운 호칭을 듣는 주제에 줄 건 하나도 없고, 일기장을 몇 권 준비했다. 무리의 틈에서 커다란 가면을 쓰는 법을 배우는 그들에게 나는 그 가면을 벗을 시간을 나누어 주고 싶다.
나: 사악하고 지질하고 볼품없는 면을 최대한 많이 써보렴. 너희를 검열할 백성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지금까지도 혼자만의 영역을 맘껏 누리지 않으면 버거운 어떤 날을 잘 넘기지 못하는 나. 튼튼하지 못한 내가 쓸 새 일기장도 한 권을 더 챙기는 8월이다. 날이 아주 뜨거우니 나만의 공간을 위한 조건을 하나 더 늘려본다. 적요 속에 잠겨 있으나, 몹시 시원할 것!
이런 날, 누군가의 비밀 영토가 될 지도 모르는 책방의 온도와 소음을 더 낮고 작게 만드는 아침이 좋다.
친구들이 떠난 허전한 자리에 어느덧 나를 위한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글을 쓰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더 이상 웅크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많이 고민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니까. 체리새우 블로그를 공개로 전환하기로 했다. 공개로 돌리기 전에 몇 가지 글을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블로그 이름을 ‘체리새우’로 정한 사연을 짧게 수정했다.
“외갓집에서 체리새우를 처음 보았다. 수초 가득한 어항에서 나는 것처럼 헤엄치는 모습이 예뻤다. 맑은 물에서 사는 담수새우이고, 몸집이 자라면 주기적으로 탈피를 한다. 빈 껍질을 벗어 버리고 점프하는 모습이 무척 신비로웠다.”
– 황영미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중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