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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400 days
400일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모두 누군가를 만난다. 운이 좋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을 만나 다시없을 순간들을 보낸다. 누군가는 우리가 여행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뒤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Around the world. 여행을 떠나기 전 세계일주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이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400일의 세계일주, 그 길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샐리와 제이크 그리고
코끼리
치앙마이의 구시가지, 소란스러운 길이 둘로 갈라지고 나면 조그만 식당이 나왔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식당 앞을 서성이다 구석에 앉아 샐리와 제이크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코끼리 보호소에 다녀온다고 했다. 통유리 너머로 다양한 피부색의 여행자들이 수없이 지나가고 나서야, 눈에 익은 얼굴들이 갈림길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름을 부르려는데 샐리와 제이크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길모퉁이로 다가갔다. 제이크가 생수를 꺼내 들자, 샐리는 두 손을 모아 그릇 모양을 만들어 그 물을 받았다. 바닥에는 개 한 마리가 누워있었다. 샐리가 엉거주춤하게 모은 손을 내밀자 개가 살짝 고개를 들고 물을 핥았다. 제이크는 생수를 완만하게 기울여 샐리의 손을 다시 채워줬다. 가까이서 본 개는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샐리와 제이크에게 눈인사를 하고 개를 쓰다듬었다. 뻣뻣한 털이 손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때, 제이크가 말했다. “나 배고파 쓰러질 것 같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국수를 두고 머리를 맞대며 앉았다. 샐리는 물에 오래 들어가 있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하다며 국물만 마셨다. 제이크는 쌀국수를 끊어내기만 하는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결국 포크를 들었다. 물에는 왜 들어갔냐고 묻는 내게 샐리는 코끼리와 같이 들어가서 씻기느라 그랬다고 대답했다. “보호소에는 학대당하다 구조된 코끼리들이 많았어. 사람이 칼로 찔러서 시력을 잃은 코끼리도 있었는데, 코끼리들끼리 이 눈먼 코끼리를 보살펴주는 거야. 어디라도 움직이면 같이 가주고, 큰 소리에 놀라서 울면 괜찮다고 소리 내서 알려주고….” 샐리는 서글픈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려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포기하고 제이크를 보았다. 제이크는 샐리에게 손을 뻗으며 코끼리 울음소리를 냈다. 샐리는 살짝 기댔고, 제이크는 천진한 표정으로 흉내를 계속 냈다.
몇 달 내내 붙어 다니며 함께 여행한 두 사람과 코끼리 보호소를 다녀오지 않은 건, 단지 비용이 비쌌기 때문이었다. 옅은 후회와 부끄러움이 밀려들 즈음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식당 안에서 누군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샐리와 제이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한심하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두 사람을 남겨둬야지. 샐리와 제이크는 어깨동무를 하고 포즈를 취하려다가 웃음이 터졌다. 나도 따라 웃었다. 사진이 다 흔들렸다.
베니와
외국어 사전
버스는 한없이 느리게 달렸다. 반쯤 열려있는 창으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모래가 새어 들어왔다. 운전사는 종종 차를 멈추고 내려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 움직이지 않는 버스의 온도는 빠르게 올라갔다. 땀이 쏟아졌다. 앞에 앉아있는 제이크가 뒤를 돌아보며 샐리와 내가 너무 힘들진 않은지 걱정했다. 그때, 반대편 창가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고개를 쓱 내밀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네 셋이 같이 여행하는 거야? 멋지다!” 노란 곱슬머리의 남자는 독일에서 온 세계일주 여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난 베니라고 해!” 샐리는 나를 툭 치더니 귀엽다며 웃었다. 버스는 한참을 더 달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나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한 아이가 급하게 표정을 시무룩하게 바꾸고 손을 내밀었다. “Money. Money.” 익숙한 피로가 몰려왔다. 좋은 사람인 척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내 옷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아이에게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때 베니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현지어였다. 아이는 자기 나라 말을 할 수 있는 외국인이 신기한지 소리를 질러 다른 아이들을 불렀다. 금세 모여든 아이들은 베니에게 계속 말을 시켰고, 베니는 계속 대답을 했다. 덕분에 나와 친구들은 그늘에 앉아 조금 쉴 수 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표정이 환해졌다. 베니의 대답이 이상하면 더 좋아했다.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기 위해서 떠나는 베니에게 아이들은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몇 번이고 흔들었다.
숙소가 있다는 좁은 길목으로 들어섰다. 현지인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길에서 향신료와 생고기 그리고 오줌 냄새가 뒤섞여 났다. 거기서 사람들이 태연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베니가 현지어로 숙소를 묻자 그중에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집이라며 따라오라고 했다. 남자는 단번에 베니를 좋아했다. 그의 가족들도 베니를 좋아했다. 남자는 영어를 하지 않는 여행자가 처음이라며,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덕분에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베니는 시간이 날 때마다 현지어가 적힌 책을 들여다보는 노력파였다. 샐리와 제이크와 나도 덩달아 현지어를 조금씩 익히게 되었다. 베니와 헤어질 때 그는 우리가 다음으로 여행할 나라의 현지어가 가득 적힌 사전을 선물해줬다. 제일 앞장에 ‘Think globally, Act locally’라고 손 글씨가 적혀 있었다. 베니와 헤어지고 한동안 우리는 현지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오래지 않아 원래의 우리로 돌아왔다. 다시 아무나 붙잡고 영어를 하는 여행자가 되었다.
하지만 찌는 더위에 한없이 느리게 달리는 버스를 타거나, 돈을 달라며 옷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아이를 만나면 늘 베니가 떠올랐다. 언제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여유를 잃지 않던 베니. 그 덕에 나도 아주 조금은 덜 오만 방자한 여행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과
모기
여행을 시작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샐리, 제이크와 헤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만났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함께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탔다. 남한의 30배가 넘는 대륙을 안방에서 거실 나가듯 이동했다. 눈이 뒤덮인 산에서 물의 도시로 내려갔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계절을 여행했다. 좁은 길을 소와 함께 걷고, 북적거리는 야시장에 갔다. 그즈음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계속 열이 오르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가장 멋진 모습만 보여줘야 할 때, 온갖 추한 모습을 그대로 다 들켜버렸다. 여행 일정이 먼저 끝난 그 사람은 결국 내 아픈 모습만 보다가 한국에 돌아갔다. 나는 예정대로 태국에 갔다. 하루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병실 안의 태국 사람들이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라리아처럼 모기로 인한 열병에 걸렸다고 의사가 말해주었다. 각종 수치가 너무 떨어져서 당분간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도 나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링겔을 맞으며 계속 잠만 잤다. 이제 그만 여행을 끝낼 시간이 되었다고 몸이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일어나보니, 눈앞에 그 사람이 있었다. 놀라는 나를 안아주었다. 토닥토닥. 그리고 말했다. “태연 씨 몸에서 옥수수 쉰내 나요.” 그러니까 아주 운이 좋았어서 아니면 아주 운이 나빴어서 그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다. 몸은 곧 회복되었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었다. 매일 만났다. 서로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치졸해지고 한심해졌다. 사랑하고 미워했다. 그리고 헤어졌다.
일 년의 여행과 한 번의 연애로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거나,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모습도 곧 떠나기 전의 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뭐, 내가 생각처럼 괜찮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별로라는 걸 알게 되는 건 생각보다 꽤 괜찮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무척 힘이 난다.
글·사진 김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