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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동의 안락한 자리 : 석윤이
“와, 근사해!” 표지의 표정만으로 대뜸 탄성이 흘러나오는 어떤 책들이 있다. 책을 펼치면 열에 아홉은 석윤이 디자이너의 이름과 마주하게 된다. 독서를 끝내고 책을 덮는 순간엔 처음에 느낀 근사함이 훨씬 더 진해지는데, 저자와 독자, 출판사와 디자인 모두를 고려하는 손길이 여실히 느껴지기 때문일 테다. 이토록 사려 깊은 디자인이 탄생하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마법으로 가득 차 있는 반짝이는 곳은 아닐까? 출판사에서 독립해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그녀의 작업실은 염창동에 자리한 평범한 아파트였다. 그래서… 더 좋았다.
일러주신 주소가 아파트여서 더 궁금했던 공간이에요. 아름다운 오브제가 참 많은 곳이네요.
고마워요(웃음). 여기는 염창동에 있는 일반 아파트예요. 작업하는 곳이기도 하고, 생활 터전이기도 하죠. 어린아이가 있어서 친정 가까이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일할 때는 친정에서 아이를 돌봐주셔서 바로 근처에 있는 저희 집을 작업실 삼아 일하고 있죠. 친정과 위아래층에 살고 있거든요.
작업 공간이 방이 아닌 거실이네요?
처음에는 방에서 작업했는데, 일의 양이 많아지면서 방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더라고요. 답답함도 많이 느끼고 움직임이 적어지니 몸에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밖 풍경이 보이는 거실로 책상을 빼고, 마치 집 전체가 사무실인 것처럼 일하게 되었어요. 눈을 쉬게 할 수 있는 시야가 조금이라도 확보되니 조금 낫더라고요. 워낙 오랜 시간 일하다 보니 아늑하게, 또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책상을 거실로 빼고 나니 안락한 휴식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닌 사무실 같은 공간으로 점점 변하게 된 것 같아요.
출퇴근을 안 하게 된 대신 작업 공간에서 살게 된 셈이네요.
맞아요. 이동 시간이 줄어들고 넓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좋아요. 오가는 데 시간이 들지 않으니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많아졌고요. 하지만 남편이나 아이에게는 조금 불편한 공간이 되지 않았나 싶어서 미안할 때도 있죠.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친정으로 올라가면 이곳에서 혼자 작업에 집중하곤 하는데요. 그 집중도가 너무 높아서, 작업 시간 외에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도 큰 단점이에요.
이 공간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어디인가요?
사실 여기는 제가 생각하고 바라는 작업 공간이랑은 거리가 멀어요(웃음). 항상 아쉬움은 있지만, 친정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지금 제 자리에서 빛을 내는 조명만큼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저는 조명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조만간 새로운 작업 공간을 알아보려고도 생각 중인데,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건 없어요.
집에서 일하다 보니 작업할 때 아이가 함께하는 일도 많을 것 같아요.
맞아요. 곧잘 제 옆에서 그림을 그리곤 해요. 얼마 전에는 아이가 ‘엄마는 시리즈를 좋아하잖아.’ 그러면서 시리즈로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더라고요(웃음). 오늘도 친정으로 올라가기 전에 ‘엄마, 손님들에게 내 그림 꼭 보여줘!’라고 신신당부 하고 갔어요.
그림이 너무 멋져서 사진도 찍어 갔다고 꼭 전해주세요(웃음). 작업하다 쉬고 싶을 땐 주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나요?
음… 주로 혼자 즐기는 일들을 해요. 커피를 내려서 좋아하는 컵에 담아 마시거나 음악을 들어요. 아버지가 방송국 기술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셨기 때문에 음향부터 기술적인 부분까지 워낙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아버지 덕분에 이 공간에도 음향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죠. 저기 있는 앰프도 아버지가 만드신 거고요(웃음).
아버지가 만드셨다고요? 와. 작업 공간이 집이어서 그런지 구석구석에 개인사가 녹아 있는 것 같아요. 이런 환경에서 작업하다 보면 업무와 일상의 경계가 느슨해지지는 않나요?
저는 다행히 그런 타입은 아니에요. 제 주변의 에디터나 디자이너는 밤중에 많이들 작업하시던데, 저는 작업은 아침에 해야 잘되는 아침형 인간이거든요. 밤에 해본 적도 있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아이 등원 준비 때문에라도 무조건 깨어 있어야 해서 아침에 일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등원시키고 나면 아침 9시가 되고, 그때 출근하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요. 환기부터 한 다음에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리고…. 창밖을 보며 좋은 생각과 편안한 마음을 가지기 위한 시간도 놓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시간도 따로 두고 있어요.
어쩌면 출판사에서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출퇴근에 몸이 적응되었는지도 몰라요.
맞아요. 그 영향이 클 거예요. 저는 중요한 일은 대개 오전에 처리하는 편이에요. 대부분 창의적인 일들이죠. 12시에서 1시 사이에는 점심을 먹고요, 오후에는 아이가 집에 오는 시간 전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하곤 해요. 아이가 하원 하면 친정에 데려다준 뒤 바로 작업 공간으로 돌아와서 일하는데, 이때부터 6시까지 최대한 부지런히 일하고 되도록 야근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사실 이동하는 시간이 없으니 7시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웃음).
북디자인을 볼 때마다 ‘아, 역시!’ 하고 감탄하게 되는데, 이 공간에서 탄생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해요.
고마워요(웃음). 오랜 시간 북디자인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과 저자가 원하는 디자인, 출판사가 원하는 디자인, 독자가 원하는 디자인이 책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요. 모든 걸 충족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저와 가장 잘 맞는 작업을 선택하려고 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 같아요. 작업해야 할 책이 결정되면 먼저 책에 집중하고 즐길 수 있는 자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요. 그렇게 해야 최대한 짧은 시간에 좋은 결과물이 나오더라고요. 독자, 저자, 출판사, 그리고 저까지 모두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작업물이 나올 때가 당연히 가장 기뻐요.
석윤이
북디자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오랜 시간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독립한 지 3년 차다.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세트 디자인을 비롯하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자존가들》, 《사랑의 기술》 등 다양한 단행본 디자인을 진행했다.
H. sukyoony.com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