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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널 사랑했어, 어쨌든
나는 널 사랑했어, 어쨌든
21세기를 사는 현대 여성에게 용기 있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뉴욕 거리에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는 <비긴 어게인> 속 그레타와 바닷가 마을의 상처투성이 소녀를 보호하는 <도희야> 속의 영남은 이렇게 말한다.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용감해질 수 있다고.
1998년도에 나는 대학 2학년이었다. 사람들이 98학번 후배 중에 얼굴이 예쁘고 이름이 특이한 아이가 들어왔다고 했다. ‘두나’라는 이름의 그 애를 종종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했다. 눈이 너무 커서였다. 세상엔 저렇게 눈이 큰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그 애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끔뻑거리면서 구름 위나 수영장 안을 걷듯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낯을 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 때로는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곧 98학번 배두나가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로 데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TV 모니터에, 또 조금 더 있다가는 극장의 스크린 위에 그 커다란 눈이 비췄다.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올라와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 있던 나에게 잠에서 덜 깬 고양이처럼 나른한 배두나의 이미지는 언제나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배두나 같은 애가 가진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애의 어머니는 연극배우이고, 예술적 분위기로 가득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했다(우리 집에서는 내가 뭘 배우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막걸리 한 병을 더 마시면 이달 생활비가 바닥나 전전긍긍해야 했던 나에게 그 애의 부유한 인생은 상상하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멀리 있었으니까.
배두나가 무려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고 돌아와 선택한 작은 영화 <도희야>는 상처받은 두 여자가 서로를 감싸 안는 이야기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작은 어촌 마을의 파출소 소장으로 좌천된 영남은 할머니와 의붓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 도희를 만나게 된다.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던 도희는 영남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영남은 그런 도희가 안쓰러우면서도 자신의 처지 때문에 부담을 느낀다.
영남 역할의 배두나는 내가 20세기 말에 잠시 목격한 대로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의 모습과 시선과 말투와 걸음걸이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당신은 저렇게 나긋나긋한 몸짓을 하는 여경을 본 적이 있나. 당신은 저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여자를 본 적이 있나. 당신은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내면의 사춘기 소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은 듯 우물거리며 말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나. 당신은 페트병에 소주를 담아서 유리컵에 따라 마시는 모습마저도 근사해 보이는 여자를 본 적이 있나. 가만 보면 그간 배두나가 연기했던, 평범하다는 꼬리표를 달았던 여자들도 사실은 이 세상에 없는 여자들 같았다. 사람들이 ‘평범함’이라고 생각하는 도식 속에 배두나를 구겨 넣어도 그것은 더는 평범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나는 배두나가 저런 여자로 자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실은 어떻게 자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내 앞가림도 힘든 처지에 20대 초반에 이미 잘 나가는 여배우였던 남의 미래를 생각할 틈이 어디 있었겠나. 배두나가 진지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동안, 나는 대체 뭘 하며 살아온 걸까.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하고 변변치 않은 일자리를 전전했다. 진정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그나마 손에 잡히는 것만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것 같다. 술이나 마시고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면서 살았다. 그러니까 이 모양 이 꼴인 게 분명하다. 헛살았다.
그럼에도 다시 20대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종종 떠들고 다닌다. 20대의 열에 들뜬 듯한 미숙함, 뭘 선택해도 암흑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은 불확실함이 내게는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데 <비긴 어게인>이라는 영화를 보니 ‘아, 20대를 저렇게 보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긴 어게인>은 벼락스타가 된 남자친구에게 차인 무명가수 그레타가 우연히 만난 퇴물 제작자의 제의로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노래를 녹음하는 이야기다. 남자친구의 조력자에서 스스로 서는 법을 익히던 그레타는 다시 돌아오려는 연인 앞에서 짧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자신만의 음악,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그레타의 발랄하고 상큼한 분투기를 보고나니 20대에는 남들이 뭐라고 하건 흥얼흥얼 나만의 노래를 불러 봐도 좋았겠다 싶다. 그땐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것들만 실컷 해도 부족할 나이였다. 배짱을 한껏 튕기는 것도 그 나이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랑 대신 인생을 선택해도 괜찮을 나이가 그때였다.
그런데 그레타에게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이런 거다. 그레타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기타를 치며 자신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순간순간 울먹이면서 몇 번이고 거듭해 노래한다. ‘나는 정말 너를 사랑했어. 네가 모든 걸 망쳤지. 나는 정말 너를 사랑했어.’
바람을 피워 나를 찬 남자에게 너를 정말 사랑했었노라고 거듭 말하는 데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걸까. 나를 모욕한 사람, 나를 망친 상처, 나를 버린 세상에 그럼에도 너를 정말 사랑했었노라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노라고 떳떳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견고한 자존감이 필요한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상처를 직시하면 더 아플 것 같아 두려워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위 쿨한 척을 했다. 무표정한 사람, 무감각한 사람, 쿨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보호막을 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함께 노래하자는 남자친구의 제의를 뒤로 한 채, 자전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달리는 그레타는 어디로 가는 걸까. 그레타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아마 또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인생 앞에서 저울질해야만 하는 순간을 다시 한 번 맞게 될 것이다. 남자에게 사랑은 인생의 액세서리 같은 것이지만, 여자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레타는 사랑을 택할까, 아니면 인생을 택할까. 우리는 사랑을 택하는 그레타를 응원해야만 할까, 아니면 인생을 택하는 그레타를 응원해야만 할까. 사랑과 인생은 왜 함께 갈 수 없는 것일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만든 감독 데이빗 러셀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실수 뒤에 항상 새로운 기회가 뒤따른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다.” <도희야>와 <비긴 어게인>은 결국 그런 이야기다. 실수, 또는 실패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우리는 어쨌거나 살아야 한다.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다. 실패를 주홍글씨처럼 이마 위에 새긴 채로 세상을 등질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도희야>에서 건사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인 도희를 등지고 떠나려던 영남이 마음을 바꾸는 것은 젊은 순경의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그 애, 사람이 아닌 작은 괴물 같지 말입니다.” 한때 자신을 괴물처럼 느꼈던 사람으로서, 또 한때 모두에게 괴물 취급을 받은 사람으로서, 지금도 역시 그런 사람으로서 영남은 그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도희에게서 자신을 본 영남은 발길을 돌려 혼자가 된 도희에게로 간다. 그리고 말한다. “나랑 같이 갈래?”
영남은 상처 속에서 웅크린 채로 강소주를 들이키면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안전하고 나약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끝내 약하고 소외당한 작은 괴물, 도희를 품에 안음으로써 더 큰 위험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정말로 강한 여자들은 상처받지 않는 여자들이 아니다. 정말로 강한 여자들은 그레타나 영남처럼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들이다.
분명 나의 인생은 그녀들의 인생에 비해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어려움과 고통과 상처란 값어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강도의 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머뭇거리다 뒤돌아서거나 숨지 않고, 전력 질주하여 삶의 품으로 뛰어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다 끝내 패배하더라도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널 사랑했어. 나는 널 정말로 사랑했어, 어쨌든.
비긴 어게인 Begin again
존 카니 감독 | 드라마 | 미국 | 104분
싱어송라이터인 ‘그레타’는 음반회사와 계약을 하게 된 남자친구를 따라 뉴욕으로 간다. 행복도 잠시, 오랜 연인이었던 애인의 마음은 식어버린다. 낙담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법도 한데, 그녀는 거리를 무대 삼아 계속해서 노래한다. “도시에 혼자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부릅니다!”라고 말하며.
도희야
정주리 감독 | 드라마 | 한국 | 120분
외딴 바닷가 마을에 의붓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학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녀 ‘도희’가 있다. 그녀 앞에 또 다른 상처를 가진 ‘영남’이 나타난다. 마을의 파출소장인 그녀는 도희를 돕고, 영남은 도희의 유일한 존재가 되어간다.
에디터 선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