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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
2007년, 만 스물세 살의 이탈리아 청년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한국에 도착했다. 그 긴 여정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내면은 늘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고, 설레는 걸음으로 따라가다 보니 거기에 행복이 있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 ‘유일한 행복은 기대하는 것’인 걸까? 그는 무엇을 기대하며 여기까지 온 걸까?
INTERVIEW
알베르토 몬디 | 방송인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주로 방송 활동하면서 지내요. 그 외에는 친구들과 설립한 작은 천연 비누 회사도 꾸려가고, 7~8년 전부터 쭉 일해온 주한 이탈리아 상공회의소 활동도 해요. 내일 아침에도 이사회 미팅이 있어요. 요즘 제일 많이 하는 건 아들 레오나르도(이하 ‘레오’)랑 노는 거예요(웃음).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 ‘알차장’이란 별명이 있었잖아요. 회사는 이제 안 다니고 있어요?
회사는 3년 전에 그만 뒀어요.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면서 방송을 시작했는데, 직장일과 병행하다 보니 주말이 사라지더라고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출근, 토요일엔 회사 행사, 일요일엔 방송 녹화를 했으니까요. 둘 다 좋아하고 계속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어요. 무엇보다 가족이 같이 있는 시간을 더 만들고 싶었어요. 앞으로 평탄한 인생을 살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더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 건지 아내와 긴 대화를 나눈 뒤에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정했어요. 늘 그래왔듯이 마음 가는 대로,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한 거죠.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한국까지 오게 된 여정을 담은 《널 보러 왔어》를 출간했어요. 고향인 미라노의 풍경을 직접 소개해주세요.
미라노Mirano는 베네치아에 있는 작은 중세 시대 마을이에요. 아시다시피 이탈리아 건축법이 무척 엄격해요. 건축물 모양도 그렇고, 건물에 페인트 하나 칠하는데도 다 허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마을이 보기에도 예쁘고 잘 정돈되어 있어요. 이탈리아는 남부, 중부, 북부의 분위기가 각기 다른데, 미라노가 위치한 북부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와 비슷해요. 일인당 소득이 높은 편이라 경제적으로도 모자람이 없고 치안도 잘되어 있어요.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이 상상되네요.
맞아요. 없는 게 없어서 은퇴해서 살고 싶은 그런 동네예요. 저희 집 바로 옆에 고등학교, 수영장, 테니스 코트, 축구장, 럭비장이 다 있어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부터 학교 끝나면 바로 수영장에 가고, 수영하러 갔다가 축구장 가고 그랬어요. 그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나 보네요. 방과 후에 뭘 하고 지냈는지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이탈리아 학교는 아침 여덟 시에 시작해서 열두 시나 한 시에 끝나요. 학교 끝나면 한 시 십 분쯤 집에 와서 동생들이랑 점심을 먹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는데, 제가 삼 형제 중 첫째라서 엄마 대신 밥을 차렸어요. 엄마가 한 요리를 데우거나 간단한 파스타를 직접 만들었죠. 다 먹고 나면 모여서 <심슨 패밀리>를 보고 숙제를 했어요. 셋 다 운동을 했기 때문에 훈련 시간에 지장이 없도록 숙제와 시험공부는 알아서 했어요. ‘컴퓨터 게임–훈련–저녁 식사–숙제’ 이런 식으로 순서를 정해놓고 놀았죠. 참, 축구 훈련이 없는 날에는 낚시도 자주 했어요.
낚시요? 어린아이 취미라고 하기에는 독특하네요(웃음).
옆집 아저씨가 완전 낚시광이었어요. 아들이랑 너무 낚시를 하고 싶은데 딸밖에 없으니까 저희 아빠한테 저랑 낚시하러 가고 싶다고 부탁하신 거죠. 제 낚시 스승님이에요(웃음). 주로 마을에 있는 강에서 메기를 잡았고, 주말에는 호수로 갔어요. 아저씨 덕분에 여섯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낚시를 많이도 했죠. 아저씨가 이사 가신 이후로는 그만뒀지만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어릴 때 같은 골목에 사는 이웃들과 친하게 지낸 기억이 나요.
저희 집은 한국으로 치면 다세대 주택 같은 3층짜리 집이에요. 부모님이 신혼 때 입주하셨는데, 다른 가구에 입주한 분들도 신혼부부였대요. 다들 나이대도 비슷해서 그때부터 가족끼리 친하게 지냈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름이 되면 다 같이 저녁을 먹던 기억이 나요. 아빠들 퇴근 시간에 맞춰 엄마들이 집 앞 정원에 엄청나게 큰 테이블을 펴놓고 요리를 준비하면 모두 즐겁게 먹었죠. 저랑 동생들도 다른 집 애들이랑 무척 친하게 지냈고, 이웃들이랑 같이 휴가를 다녀온 적도 있어요. 부모님은 아직 거기 사세요.
여름 방학은 어떻게 보냈어요?
이탈리아의 방학은 6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3개월 반이나 돼요. 무척 길죠. 저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여름마다 네뷰Nebbiu라는 산골 마을로 가 계셨기 때문에 그쪽으로 휴가를 갔어요. 저희 삼 형제, 사촌들 모두 거의 매년 여름을 그곳에서 지냈죠. 별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들도 여름마다 그곳으로 왔어요. 휴가 때만 만날 수 있는 ‘여름 친구들’인 거죠. 거기서 사랑에 빠진 친구들은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무척 아쉬워했어요.
영화 <어바웃 타임>의 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웃음)맞아요, 그 느낌.
그럼 부모님과 따로 휴가를 떠나지는 않았나요?
산에 가 있는 동안 부모님은 주말에만 한 번씩 오셨어요. 온 가족이 다 같이 쉴 수 있는 기간이 보름 정도 됐는데, 으레 베네치아 바다 앞 캠핑장으로 함께 떠나고는 했어요. 저희가 자주 갔던 카발리노Cavallino라는 곳은 캠핑장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거의 도시만 하죠. 유럽 각지에서 관광하러 오기 때문에 대부분 외국인들이고요. 재작년에 아내와 아이랑 갔었는데, 캠핑장이 오픈한 이래로 한국인 방문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때만큼은 숙제도 안 하고 그냥 놀기 바빴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 알비제와 스페인 그라나다 여행 중 한 컷.
고향 미라노에서의 어린 시절. 왼쪽부터 동생 스테파노, 아빠, 나.
내가 활약했던 미라노의 축구팀 미라네제Miranese.
학창시절에는 어떤 아이였나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웃음), 전 스포츠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어요. 의무감도 강하고요. 사실 똑똑해서라기보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첫째들이 그렇잖아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숙제도 시험 준비도 알아서 잘했어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뭔가 준비가 덜 되어 있는 걸 정말 싫어해요. 엘리트 코스대로 과학고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과학보다 다른 과목에 관심이 많았다고요.
과학 과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탈리아에서는 철학, 역사, 국어가 아주 중요한 과목이라서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리체오Leceo에서는 공통적으로 라틴어를 배워요. 리체오는 과학, 인문학, IT, 외국어 리체오로 나뉘고, 저는 과학 리체오에서 과학 외에 라틴어와 라틴 문학도 공부했어요.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떠나기로 했을 때 부모님이 그 결정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로마나 밀라노 같은 대도시는 개포동, 대치동이랑 똑같아요. 아이들을 국제 학교나 좋은 사립 학교에 보내려고 하죠. 반면에 저희 부모님은 시골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성적에도 별로 관여하시지 않았어요. 저는 공부를 잘했고 첫째 동생은 공부를 엄청 못했거든요. 어린 마음에 나는 칭찬받고 동생은 혼났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웃음). 그냥 저녁에 함께 밥 먹고, 대화 많이 나누고, 그게 다였죠. 그런데 지금 부모가 되어보니까 잘하신 일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럼 부모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저희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그 안에 꼭 지켜야 하는 약속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저희가 밤늦게 들어가든 새벽에 들어가든 귀가 시간에 제약이 없지만 ‘어디에서, 언제까지, 누구와 함께’ 이 세 가지를 꼭 알려드려야 했어요. 그것만 지키면 괜찮았어요. 친구들이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한다고 할 때 저는 ‘엄마, 나 두 시까지 들어갈게.’ 하면서 전화를 끊었죠. 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엄하게 혼을 내셨어요. 한 번은 새벽 세 시에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세 시 오 분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인생 최초로요.
대학교 때는 당시 생소한 중국어 전공을 선택했죠?
선생님과 어른들은 의대, 법대에 가거나 공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하라고 했지만 저랑 너무 안 맞을 것 같았어요. 그냥 좋아하는 걸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외국어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개중에 독학할 수 없는 걸 골랐죠. 한자가 너무 예뻐 보이고 머나먼 아시아의 문화가 궁금해서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에 진학했어요. 사실 그때는 일본어학과가 인기가 제일 많았는데, 학과 설명회에 가보니까 그곳에 모인 학생들 차림새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일본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코스튬 의상이었거든요(웃음). 반면에 중문과는 학생 수가 적기도 했고 어딘가 멋있어 보여서 선택했어요.
중국의 대도시가 아닌 다롄으로 유학을 떠난 것도 특이해요.
조금 더 오래 생각하긴 했지만, 다롄도 중국어 전공과 마찬가지로 충동적인 선택이었어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도시였고, 우리 학교에서 다롄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 끌리더라고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야 진정한 아시아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예상이 적중했죠. 제가 성장하는 동안 베이징, 상하이에 간 학생들은 끼리끼리 노느라 중국 친구도 없고, 중국어로 음식도 하나 못 시켰어요. 제 결정이 옳았다는 걸 그때 다시 한번 느꼈어요.
개척자 기질이나 반항아적 성향이 있다고도 얘기할 수 있을까요?
맞아요. 어른들이 자꾸 어디 가라, 뭘 해라 하니까 반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리고 계속 반대로 하다 보니까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가면 어느 방면이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중문과가 아닌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저는 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은 맹자나 노자, 유교 사상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 데서 가능성이 보이더라고요.
다롄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너무 불편했어요. 지금은 중국이 참 좋아졌지만 12~13년 전 다롄은 모든 게 너무 오래됐고 깨끗하지 않았거든요. 화장실에는 벽도 문도 없고요. 아름답고 깨끗한 마을에 살다가 처음 그런 세계를 경험하니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그 불편함 덕분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안락한 공간에서 벗어나면 재미있는 일들이 생겨요. 이탈리아 식당이 없으니까 중국 식당에 가야 했고, 축구를 하고 싶어지면 자연스럽게 현지인들과 몸을 부딪쳤어요. 그러면서 현지인들과 정말 많이 친해지고 중국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죠. 이왕 아시아에 발 들인 거, 제대로 배워보자 싶었어요.
중국에 다녀온 뒤로 삶에 대한 시선도 바뀌었다고요.
맞아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만 살면 앞으로의 미래와 갈 수 있는 길이 한두 가지밖에 안 보여요. 지금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제 친구들은 대부분 그 길로 가고 있어요. 졸업하면 바로 취업하고, 취업이 되면 집을 사고요. 물론 그것도 좋은 삶이지만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중국에 가서 세상은 무한하고, 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 많고, 사람들도 정말 다양하게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눈이 확 트였네요.
그렇죠. 그러면서 사소한 걱정들도 없어졌어요. 미라노에서는 취업 걱정, 집 걱정이 없으니까 시내에 있는 집이 나을지, 부모님과 가까이에 살 수 있을지 같은, 좁은 범위의 고민들을 많이 해요. 사실 세상에는 원룸에서, 고시원에서, 여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죠. 그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도 다 깨진 것 같아요.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됐어요.
12년 전 지금의 아내분을 만나러 처음 한국에 왔어요. 중국 유학 시절에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외국인 여자친구를 만나러 타지로 떠나는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어릴 때만 할 수 있는 일이죠(웃음). 너무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으니까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서 그냥 온 거예요. 이 여자랑 오래 사귈 수 있을까, 결혼할까, 그런 미래는 생각 안 했어요. 그때 저에게 제일 중요한 건 여자친구였어요. 순간순간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과감한 선택 아니었나요?
오히려 쉽고 간단한 선택이었어요. 물론 두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냥 보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중국에서 이미 경험해봐서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생활하는 게 훨씬 배울 게 많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열여섯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와서 쓸 돈은 항상 있었고요. 돈 벌어야겠다, 취업해야겠다, 그런 걱정은 전혀 없었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만 스물셋이던 2007년 5월 28일에 한국에 처음 왔어요. 초여름이라기에 맑고 화창한 이탈리아의 여름을 상상했는데 너무 다른 거예요. 우중충하게 매일 비만 왔어요. 중국에서처럼 재미있게 놀고 싶었는데 놀 사람도 없고 언어도 안 통하고, 우울했죠. 하지만 여자친구랑 사귀기 시작하는 때였고, 돌아가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니까 버티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 먼 곳까지 왜 왔는지 처음부터 차근히 생각해봤죠. 물론 여자친구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시아 문화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싶어서 온 거였거든요.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도 하고, 영어 공부하려고 영어 동아리도 들어가고, 춘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이랑 조기축구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런 우울함이 다시 즐거움으로 바뀌었어요.
우울감에 빠지면 그런 마음 먹기도 힘들던데, 마음먹으면 바로 실천하는 스타일인가 봐요.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어요. 집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 인생 규칙을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말 그대로 라이프 룰Life rules이요. 남들이 뭘 정했는지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진짜 멋있는, 제가 따라 하고 싶은 규칙 몇 가지를 적었어요.
어떤 게 있었어요?
첫째는 ‘Be a people person. 인간 친화적인 사람이 되어라.’였어요. ‘사람들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반드시 집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또 하나는 ‘Do cool things. 멋있는 일을 해라.’였는데, 집에만 있으면 전혀 쿨하지 않잖아요(웃음). 그런 게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된 것도 인생의 큰 변화죠. 잘 받아들이는 중인가요?
완전 좋아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많이 낳고 싶었거든요. 아내와 합의 하에 결혼 후 5년 동안은 아기 없이 지냈는데 레오가 태어나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제가 아내보다 훨씬 더 잘 놀아줘요(웃음). 친구처럼 몸으로 많이 놀아주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물론 힘들 때도 있지만 그만큼 행복도 크니까 괜찮아요.
레오 장난꾸러기죠?
맞아요. 레오가 저랑 아내를 반반씩 닮았어요. 고집 세고 사교적인 건 저를 닮았고, 배고프거나 피곤하면 화가 나는 건 엄마랑 똑같아요(웃음).
가족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니까 얼굴에 활기가 도네요. 알베르토 씨의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육아를 하기 위해 사업을 정리할 정도로 애처가라고 들었어요. 알베르토 씨의 ‘사랑꾼’ 면모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걸까요?
많이 받았죠. 사실 어릴 때는 몰랐어요. 부모님의 존재, 부모님이 하는 모든 일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이제 저도 부모가 되어서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요. ‘아, 우리 아빠 되게 큰일 하셨구나.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생각하게 되죠. 저는 어릴 때 아빠랑 노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 돈 때문에 아쉬운 일도 많았어요. 운동화 한 켤레를 사도 아빠는 정해놓은 금액 이상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비싼 레고는 크리스마스 때만 받을 수 있었어요. 경제적인 풍요로움보다 아이와의 교감이 훨씬 중요하다는 건 아빠가 된 지금에야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아빠가 저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저도 레오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아내분과의 사이가 참 편안해 보여요.
아내와 저는 서로 많이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안 맞는 게 있으면 대화로 풀어요. 저랑 참 잘 맞는 사람이에요. 이미 만난 지 13년이나 됐으니까 아내이자 여자친구이자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죠.
레오가 어떤 아이로 자랐으면 하나요?
남들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레오가 앞으로 뭘 하면서 살지는 상관없지만 어디에서나 예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예의 있다’, ‘매너 있다’ 느낄 수 있는 사람 있잖아요. 아내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쉬는 날 가족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해요.
일이 없으면 보통 집에서 아이랑 놀아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고, 자전거 타고 공원에 가고요. 옛날에는 매일 약속을 잡고 사람들 만나는 걸 즐겼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랑만 약속을 잡아요.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아내는 당연하겠지만 저도 한국에 사는 걸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레오가 이탈리아의 학교 문화를 경험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어요. 이탈리아에선 초, 중, 고까지 총 13년을 학교에 다니는데 저는 정말 즐겁게 보냈거든요. 특히 고등학교요! 당장 내일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니라고 하면 바로 가고 싶어요.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스포츠 문화와 고향의 맑은 공기도 경험하면 좋겠네요.
요즘 어디에서 행복을 찾나요?
가족이요. 아내, 아기, 처제들,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들. 저는 인간관계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축구랑 음악이요.
한국에 오기로 결정한 날에 쓴 일기에 “나의 미래를 내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싶다.”고 썼어요. 지금까지 흘러간 방향에 자체 평가를 내려주세요.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좋아하는 말 중에 ‘못 했던 일 때문에 후회할 수는 있지만 했던 일 때문에 후회할 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어요. 만약 제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우리 모두 다 인생이 처음이고,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껏 해온 일들에 후회는 없어요.
에디터 이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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