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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무라카미 하루키 씨와 마스다 미리 씨는 알고 있을 것만 같다. 만끽하는 삶의 비밀을.
30대 초반에는 소비주의 풍조니 행태니 하는 것들을 따끔하게 꼬집는 식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 집의 가계 사정은 전래동화에 나오는 가난한 집의 쌀독처럼 바닥이 보일 정도로 쪼들렸기 때문이다. 그 책들이 설파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인생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거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진리다.
하지만 그런 책을 아무리 읽어도 싸구려 팬티 한 장이라도 새로 사고 난 뒤에는 주체할 수 없이 기뻤다. 그것은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소박한 식사를 만들어 먹을 때의 묵직한 기쁨과는 다른, 아주 산뜻하고, 아주 가벼운 기쁨이었다. 쉽게 날아가 버린다고 해도 최대한 자주 느껴보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무라카미 T》는 우리의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사랑하는 티셔츠들에 대한 짧은 에세이집으로, ‘무라카미 씨가 쓴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라는 마인드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컬렉션이라도 수집하는 것처럼(사실 수집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저씨의 취미는 중고 가게에 들러 오래된 레코드를 사고 티셔츠를 사는 것이다. 창고 가득 쌓여 있다는 어마어마한 양의 티셔츠는 입으려고 산 것도 있지만 그냥 마음에 들어서 산 것, 선물로 받은 것, 기념품으로 받은 것들도 대다수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티셔츠들에 얽힌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뻔뻔하게 늘어놓는다.
소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주 하릴없고 아주 덧없는 일. 그러나 그 하릴없고 덧없음으로 인해 인생의 무게추를 살짝 가벼운 쪽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일. 나는 소비주의 사회의 병폐를 지적했던 그 책의 작가들이 잊고 있거나 아니면 모른 체하고 싶어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비는 이제 옳음과 그름을 따질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 삶 그 자체다. 그것은 취미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며 위안이 되어버렸다.
《무라카미 T》를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썼다면 그게 과연 재미있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아니, 아니겠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답다. 으스대는 것 같은데 으스대지 않고, 재치 있는데 겸손하고, 즐거워 보이는데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끝까지 읽어도 마음의 찜찜함이 조금도 남지 않는 그런 글쓰기는 바로 이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야말로 무라카미 매직.
이 세상 누구도, 심지어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건재하다. 반항적인 얼굴에 머리털이 꽤 수북하던 30대의 젊은 남자는 이제 흰머리가 헤싱헤싱한 70대 노인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쓰고 달리기를 한다. 이 사람의 (작가로서의) 장수 비결은 역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그리고 아주 깊은 곳과 아주 얕은 곳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타고난 균형감각 덕분이겠지.
현대사회의 기쁨과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감과 그리움 같은 감정들은 소비를 통해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곁에 아무도 없는 외로움은 바에서 마시는 술 한 잔으로 근사한 고독이 되고, 자유의 막막함과 불안감은 카페에서의 망중한 덕분에 자랑할 만한 휴식이 된다. 일하지 않는 무용한 상태를 견디기 힘들 때는 돈을 뿌리며 여행을 떠나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들을 포장하기에 가진 돈은 언제나 부족하다. ‘분수에 맞는 소비’의 ‘분수’란 도대체 무엇인가.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양말에 뚫린 구멍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질구질한 단어는 지금껏 나를 괴롭혀 왔다. 나의 분수는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고, 부풀었다 쪼그라들었다 했다.
24시간 돈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핑핑 돌던 시절을 지나 40대가 되자 다행스럽게도 살림이 조금 피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돈 걱정을 별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림에 여유가 생겨도 가난한 시절의 공포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더 쓰면서도 어쩐지 천벌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돈 쓰는 일은 아무리 해도 편해지지 않는다.
나는 작은 서점에 갈 때마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꼭 한 권 산다. 왜일까. 나는 마스다 미리 마니아일까. 그런 것까지는 아닌데, 이상하게 작은 서점에서는 마스다 미리의 책을 사고 싶다. 기분을 내고 싶은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이라면 설사 내용이 별로라고 해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을 것 같다(남들이 재미있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샀다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어서 화가 난 적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책은 뭘 읽어도 심각하게 재미없는 경우는 없다. 너무 싱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읽다 보면 78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나는 ‘작은 서점에서 마스다 미리의 책을 사는 나’를 좋아하는 편이다.
마스다 미리의 《혼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는 우리 동네의 작은 서점 ‘모도’까지 씩씩하게 걸어가서 사 왔다. 첫 페이지를 펼쳐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생각했다. 그렇지, 나는 이런 것을 원했던 거야.
한 달에 한 곳씩, 일본 전역을 여행하기로 결심한 마스다 미리씨는 이 여행의 목적을 ‘그냥 가보는 것’으로 잡는다. 그의 여행기는 짧은데다 크게 의미도 없으며 깊이 있는 감상도 없다. 어느 정도 감상을 이야기하려 하다가도 ‘어,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정신을 차린 듯 멈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이 하릴없는 여행기는 한 번에 다 읽을 필요도 없다(한 번에 다 읽으면 왠지 진이 빠질 것 같다). 손에 잘 닿는 곳에 놓아두고 잠깐 짬이 날 때마다, 스마트폰 뒤지는 것도 지겨울 때마다 한 챕터씩 읽으면 된다. 뭐 크게 남는 건 없지만 기분은 확실히 나빠지지 않는다. 가끔 좋아지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은 감정들을 그 사람도 정확히 알고 있을 때, 나만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결점들을 그 사람도 똑같이 갖고 있을 때,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는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든다. 동지를 만난 것만 같다.
생필품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선 거의 쇼핑을 하지 않는 편인데, 여행을 가면 안 하던 쇼핑을 몰아서 한다.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액세서리도 사고 장식품도 산다. 가끔은 여행지에서의 황금 같은 시간을 쇼핑몰을 돌아다니느라 다 써버리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 시간들 역시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시간과 돈을 낭비할 수 있는 기회란 내게 자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죄책감 없이 낭비하는 일은, 사실은 무척이나 짜릿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낭비의 기억을,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수업 시간에 몰래 건네받은 쪽지처럼 다시 잘 접어서 품 안에 잘 간직해 둔다. 가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어딘가 기댈 데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그 쪽지를 다시 펼쳐 그 안에 쓰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볼 것이다.
쓰기 위해 번다.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모아두면서 매일매일의 기분을 위해 조금씩 돈을 쓴다. 좋아하지 않는 것에 굳이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좋아하는 것들에 내 소중한 돈을 쓰려고 한다. 하루하루 즐겁게 살았다고, 충분히 만끽했다고 느껴질 만큼의 돈을 쓰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나의 호사스러운 소비가 돈을 써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쓰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 둘 사이를, 일 잘하는 빵집 종업원처럼 현명하고 조화롭게 오가는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T》 무라카미 하루키 | 비채
《혼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마스다 미리 | 북포레스트
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